050. 병문안 (1)
▶ 과제를 시작합니다.
빛이 가시며 들어온 시야엔 파란 하늘이 있었다.
‘여긴 또 어디지?’
네모반듯하지만, 거친 표면을 지닌 돌판 위에 선 태주가 바닥에 뚫린 6개의 구멍을 발견했다.
‘그나저나 배열도 그렇고, 꼭 주사위처럼 생겼네.’
지름 1미터가량의 구멍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넘치기 직전까지 찰랑이고 있었다.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가?’
몬스터의 등장 위치를 가늠하던 태주가 가장자리로 이동해 고개를 쭉 뺐다.
‘와…… 이건 뭐, 끝이 안 보이네.’
구름에 가려진 탓에 지면이 내려다보이진 않았지만, 급격히 낮아진 기온과 세찬 바람의 움직임만 봐도 얼마나 높은 상공에 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바로 F인가?’
다행히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가로 세로 10미터가량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한정된 공간이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 아이스 애로우를 활용해 몬스터를 처치하시오.
▶ 과제 수행을 위해 화살이 임시 개방됩니다.
[N]
[C]
[F]
[I]
[?]
물음표로 채워져 있던 빈칸에 아이스를 뜻하는 알파벳 I가 생겨났다.
‘어? 다른 화살엔 다 줄이 그어져 있네?’
▶ 파이어 애로우[F]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불화살을 선택하자 거부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아이스 애로우를 활용해 몬스터를 처치하시오.
▶ 다른 종류의 화살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이스 애로우 입문이라는 과제명답게 테스트 조건에도 제약이 있었다.
[아이스 애로우]
- 마나로 생성한 속성(얼음) 화살.
- 활시위를 당긴 채 5초간 버티면 『블리자드』 효과 발동.
- 소모 마나: 10
‘이것도 차징이 가능하네.’
노멀 애로우의 증폭이나 파이어 애로우의 화염처럼 아이스 애로우에도 눈보라를 의미하는 블리자드 기술이 존재했다.
‘마나 사용량도 파이어 애로우랑 똑같고.’
화살의 스펙을 확인한 태주가 강화를 마친 희귀 등급의 활을 신속히 꺼내들었다.
▶ 제한 시간 20분.
‘어? 오늘은 20분밖에 안 주네?’
[00:19:59]
여느 때보다 적게 책정된 타이머가 태주로 하여금 쉬운 난이도를 예상케 했다.
‘그냥 폭딜로 빨리 빨리 끝내버려야겠다.’
지금껏 맨손으로 활시위를 당겨 온 태주가 엄 교수로부터 받은 전설 등급의 슈팅 글러브인 피닉스의 집요한 발톱을 오른손에 소환했다.
▶ 착용한 아이템으로 인해 전반적인 스탯이 상승하였습니다.
물론 신성력이 깃든 행운의 목걸이는 휴대성이 강해 평소에도 늘 착용하고 있었지만.
▶ 스킬 『폭주』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뭐야, 스킬도 막아놨어?’
이번엔 루틴처럼 발동시키던 스킬들마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 스킬 『점멸』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까탈스럽네.’
직업 탐구 시간을 통해 이미 증명했듯 버프를 받지 않은 태주의 신체 능력도 몰라보게 성장한 상태였지만, 전투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액티브 스킬까지 차단한 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패시브 스킬도 못 쓰나?’
대미지를 받기 전까진 저항 스킬의 발동 여부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놓고 봤을 땐 기대하지 않는 편이 현명해 보였다.
▶ [경고]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역류하기 직전의 맨홀처럼 보이는 각각의 구멍에서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고블린 6마리가 동시에 기어 나왔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 아이스 애로우[I]를 선택하셨습니다.
유일한 선택지를 고른 태주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머리 부분을 겨냥했다.
바로 그때.
‘어?’
등급이 높은 레이드 보우의 경우 장력이 워낙 강해 궁수를 택한 각성자들도 연사를 하거나 풀 드로우 상태로 버티는 것이 버거웠는데, 슈팅 글러브를 이용해 드로잉을 하는 순간, 100%, 다시 말해, 두 배로 증가한 근력이 팽팽한 활시위를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와…… 이거 뭐지?’
기초 근력의 수치가 높은 상황에서 강한 버프를 받다보니 발사 과정 자체가 더욱 안정적이고 유연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활에 붙은 10%의 근력 버프와 목걸이에 붙은 5%의 근력 버프도 미약하게나마 태주의 완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쉬이익!
태주의 손끝을 떠난 화살이 목표물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푹!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지만, 활과 슈팅 글러브에 붙은 명중률 옵션이 작용한 덕분에 체이싱 애로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완벽에 가까운 정확도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유도 화살이 아니어도 보정 효과를 낼 수 있겠는데?’
사실 체이싱 애로우를 제외한 나머지 화살들의 정확도는 궁수 개인의 실력에 좌우됐는데, 지금처럼 장비의 버프를 받아 명중률을 높일 경우 종류와 상관없이 세밀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푹!
미간을 뚫고 들어간 화살촉의 관성에 고블린의 고개가 완전히 젖혀졌다.
우두둑!
심지어 공격력과 관련된 각종 버프들이 만들어낸 폭발적인 대미지가 들어간 결과, 목뼈가 꺾인 고블린의 몸이 하염없이 뒤로 날아갔다.
‘넉백이 장난 아니네.’
상대가 너무 약해 폭딜의 한계를 측정할 순 없었지만, 공격력과 치명타 대미지는 물론 속성 대미지에 화살 속도까지 급증한 터라 적을 밀어내는 부수적인 효과도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휘이잉!
결국 구멍에서 나오기 무섭게 제거된 고블린의 사체가 거센 바람과 함께 경기장 밖으로 날아갔다.
“키엑!”
동료의 허무한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고블린들이 태주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물론 선착순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무모함에 불과했지만.
쉬이익!
신규 장비들의 위력을 체험한 태주가 남은 녀석들을 상대로 아이스 애로우의 성능을 시험했다.
푹!
하체를 조준해 발사한 화살이 고블린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하며 단단히 박혔다.
‘빙결 효과?’
순간, 환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냉기가 고블린의 오른쪽 다리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키엑!”
온전히 걸을 수 없게 된 고블린이 이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철퍼덕!
‘이거 생각보다 빙결의 범위가 넓은데?’
얼어붙기도 전에 추락한 첫 번째 고블린에게선 제대로 된 빙결의 과정을 목격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 녀석 이후론 빙결의 범위와 속도를 비롯해 속성 대미지가 버프된 효과까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키엑!”
연이은 희생에 화가 난 고블린 무리가 원수를 갚기 위해 태주의 꽁무니를 열심히 따라붙었다.
물론 민첩성 수치를 극대화한 태주에게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그림자도 밟지 못한 채 검과 창으로 허공만 가르고 있었지만.
‘느려.’
협공에 당하지 않도록 자리를 옮기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태주가 활시위를 당긴 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하나, 둘, 셋…….’
그러자 서리가 내린 것처럼 생긴 차가운 화살촉 주위로 작은 눈보라 같은 것이 일기 시작했다.
‘……넷, 다섯!’
쉬이익!
5초간의 버티기가 끝남과 동시에 활시위를 놓자 강력한 눈보라를 동반한 아이스 애로우가 전방에 있던 적들을 순식간에 얼리고 지나갔다.
‘와…… 진짜 스쳐도 사망이네.’
블리자드에 정통으로 맞은 고블린은 전신이 얼음 조각상처럼 변해 경기장 밖으로 날아갔는데, 더 놀라운 점은 눈보라에 스치기만 했던 녀석들도 해당 부위가 급속도로 굳어 고통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너희들도 이제 그만 동료들의 곁으로 가라.’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태주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고블린 4마리를 아이스 애로우로 차례차례 제거했다.
▶ 몬스터(1/7)를 처치하였습니다.
‘6마리를 잡았는데, 1로 표시된 걸 보니 몬스터의 숫자가 아니라 단계를 의미하는 거네.’
▶ [경고] 전장이 바뀌고 있습니다.
▶ [경고] 전장 밖으로 추락하지 않게 주의하세요.
‘뭐? 추락?’
경고 메시지를 읽고 있던 태주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쿠구구구구구!
“어!”
미리 예고했듯 태주가 서 있는 바닥이 맷돌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기울어진 각도가 커지자 동결된 고블린들의 사체가 미끄러지듯이 밖으로 떨어졌다.
‘점멸이 없으니까 이런 게 불편하네.’
태주가 황급히 경사면을 오르며, 다음 전장으로 이동했다.
쿠궁!
90도로 돌아간 바닥이 완전히 멈추자 이번엔 5개의 구멍이 뚫린 새로운 전장이 나타났다.
‘근데 왜 7분의 1이지?’
주사위 형태의 전장이란 건 확인을 했지만, 주사위 면의 총합은 어디까지나 7이 아닌 6이었다.
‘시스템이 계산을 틀렸을 리도 없고.’
태주가 +1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사이, 정중앙에 위치한 구멍에서 작은 기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블린 때랑은 등장부터가 다른데?’
재빨리 활시위를 당긴 태주가 부글거리는 액체를 향해 아이스 애로우 한 발을 날렸다.
첨벙!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찰랑거리던 액체들이 사방으로 정신없이 튀었다.
‘이건 안 어네?’
액체를 얼려 입구를 막으려 했던 태주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른 구멍의 상태를 확인했다.
물론 특별 과제가 아닌 이상 위기를 느낄 만큼 위협적인 존재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장학생 레벨이 오를수록 과제의 난이도 역시 덩달아 상승하는 것 같아 쉽게 안심을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촤아악!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거대한 뱀 한 마리가 구멍에서 솟구친 뒤 다른 구멍 안으로 아치형을 그리며 들어갔다.
‘거참 더럽게 기네.’
구멍을 오가며 기습을 하는 패턴일 것이라 확신한 태주가 기포를 체크하며 블리자드 효과를 준비했다.
‘하나, 둘, 셋…….’
뽀글뽀글.
‘왔다!’
촤아악!
또 다른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뱀이 아가리를 세로로 찢은 채 태주의 머리를 노렸다.
물론 상대방의 자세가 역동적이어야 얼음 조각상의 자태도 예술적으로 나오는 법이었지만.
쉬이익!
눈보라를 일으키며 날아간 아이스 애로우가 뱀의 입천장에 정확히 꽂혔다.
푹!
순간, 머리를 시작으로 3분의 1가량이 빙결된 뱀의 몸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챙!
▶ 몬스터(2/7)를 처치하였습니다.
‘감상도 하기 전에 깨졌네.’
2단계를 클리어하자 또 한 번 바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이번엔 4개인가?’
과제의 유형에 완벽히 적응한 태주가 한결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새로운 전장을 맞이했다.
쿠궁!
*
*
*
잠시 후.
▶ 몬스터(6/7)를 처치하였습니다.
‘생각보다 별 거 없네.’
[00:17:12]
6개의 주사위 면을 3분도 안 돼서 돌파한 태주가 마지막 1의 의미를 추측하며 활대를 움켜쥐었다.
▶ [일일 과제]를 완료하였습니다.
▶ 점수를 산정합니다.
▶ 과제 점수 [A+]
▶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 보상으로 새로운 화살이 개방됩니다.
▶ 『아이스 애로우』가 화살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어? 왜 벌써 끝나지?’
분자와 분모를 맞추기도 전에 산정된 과제 점수에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때.
▶ 타임 어택 조건을 달성하여 [추가 과제]가 생성되었습니다.
▶ [추가 과제]를 수행하시겠습니까? (Y/N)
‘뭐? 추가 과제?’
새롭게 등장한 과제 유형에 의아해하던 태주가 Y를 선택하는 순간.
쿠구구구구구!
하나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 같던 주사위 모양의 전장이 빈속을 드러낸 채 전개도 형태로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와…… 저건 또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