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115화 (115/121)

# 115

#외전 5화

***

라르트는 제 마음을 꾹꾹 눌러 죽였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짝사랑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괜히 별궁을 기웃대며 루시의 얼굴을 보고. 소리 죽여 그녀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남몰래 시녀를 좇고 또 좇았다. 꼭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라르트의 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황자에게 절절한 순정이 있다는 걸 그 누가 눈치챌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득 없이 몇 년을 보냈다.

황태자가 될 황자였기에 유혹은 많았다. 파티장에서는 웬 백작 부인이 음흉한 눈으로 허벅지를 만져 왔고, 웬 영애는 할 말이 있다며 후원으로 부르더니 다짜고짜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허벅지를 만진 백작 부인에게는 실수인 척 와인을 쏟았으며 드레스를 올린 영애에게는 한숨을 건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라르트가 보기에, 귀족은 막말로 별꼴이었다. 우아한 척 고아한 척 콧수염을 비비다가 뒤로는 아주 난리를 친다. 혼전 순결을 지킨다며 제 검에 맹세의 인사를 하고는 주말 밤에는 난잡한 가면무도회에서 활개를 치지 않나.

그 행태에 치를 떨며, 라르트는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했다.

별다른 신념이 있던 건 아니다. 그저……. 제가 마음에 품고 있는 이가 루시 아닌가. 누구보다 올곧고 선량하며 정직한 루시 헤리브.

그렇기에 저 역시 루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반만큼은 정직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절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자신만 루시를 지켜볼 뿐인데.

직접 루시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 건, 음흉한 짝사랑을 이어 간 지 몇 년이나 지난 후였다.

장애물 넘기 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사냥터를 오갈 때였다. 뭐, 정말로 승마 연습을 해야 했던 이유도 있고. 겸사겸사.

승마 연습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이따금 사냥터 부근으로 놀러 오던 루시와 블론디나 역시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과를 먹으며 절 구경하기 시작했다.

라르트는 괜히 긴장했다. 저 멀리 루시가 있다. 절 보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그냥 놀러 나온 거지만 괜히 식은땀이 났다. 마치 열 살배기 철부지 소년이 된 것처럼 몸이 배배 꼬였다.

멋진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데. 나 원래는 말 정말 잘 타. 이걸 연습하는 건 내가 못 타는 게 아니라 더 잘 타기 위함이야.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 속에서만 울렸다.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펴고 턱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열심히 연습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야 말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긴장해서일까. 의기양양하게 내려오려 했는데 그만 작은 돌멩이를 밟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몸은 휘청 기울어졌고 넘어지지 않겠다며 허우적대다가 볼썽사납게 발목을 접질렀다.

“황자 전하,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리자 루시의 얼굴이 지척에 보였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 있는 제 발목을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낯부끄럽고 쑥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다치기를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의 정수리가 귀여웠다.

“시종은 어떻게 하고 혼자 오셨어요?”

루시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라르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 돌려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레 답했다.

“내가 애도 아니고, 황자가 혼자 승마하겠다면 혼자 하는 거지, 뭘 줄줄이 달고 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린 나머지 진심이 아닌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날카로운 답에도, 루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함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황자 아닌가. 저런 반응에 놀랄 리 없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하.”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목으로 쓸 나무를 주워 왔다. 그리고 응급처치라도 해줄 모양인지 “실례하겠습니다, 전하.”라고 조용히 속삭이더니 라르트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기 시작했다.

라르트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손끝이 스칠 때마다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름 모를 영애가 작정하고 유혹했을 땐 미동 없던 심장이, 루시의 움직임에 고장 난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사이 부목을 다 댔는지 루시는 손을 떼고 그를 다정히 올려다보았다. 라르트는 왠지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전하. 간단한 처치이니 돌아가셔서 바로 치료하셔야 해요.”

“신경 쓰지 마.”

라르트는 퉁명스레 답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루시는 역시 잔잔히 웃으며 그의 뾰족한 대꾸를 대충 흘려넘겼다.

곧 라르트는, 제 몸을 부축해 주는 그녀와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라르트는 루시와 어깨를 맞대고 걷는 내내 제 입을 찰싹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나 미쳤나? 어디 고장 났나? 왜 이렇게 행동하지?’

어떻게 하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사냥터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기사를 만날 때까지, 라르트는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붉어진 얼굴로 벅찬 숨만 쉭쉭 내쉬었을 뿐이다.

그리고 황자 궁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루시와 헤어져 긴장이 풀리니 힘이 쭉 빠졌다. 의사가 다가와 엉성한 부목을 치우려 하자 그의 가슴팍마저 뻥 차버렸다.

어디서 감히 루시가 해준 부목을!

의사를 그대로 쫓아낸 후엔 가만히 앉아 한참이나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루시의 손길이 스쳤을 그곳을. 그러다 보니 해가 졌고, 시종이 들어와 램프에 불을 밝혀 주어서야 절뚝절뚝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커다란 방 안에 울렸다.

“나 어떡하냐…….”

얼굴에 오른 열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좋다. 계속 루시와 말하고 싶다.

기분이 좋으면서 답답하고 행복하면서 동시에 착잡했다. 라르트는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뒹굴 몸을 뒤집어 천장 장식을 응시했다.

어떻게 하죠, 아버지? 폐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루시가 좋아요. 좋아 죽겠어요.

***

“폐하.”

라르트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답이 없는 상황을 누군가에게 토로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역할은 아버지인 제국의 황제 폐하의 몫이었다.

황제는 홀로 간식 시간을 가지다가 라르트의 등장에 빙긋 웃었다.

“웬일로 네가 아비를 찾아왔느냐.”

아델라이야 지겹도록 드나들지만, 라르트는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일반적인 아비와 아들 사이가 그렇듯.

“폐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어냐.”

라르트는 소파에 푹 앉으며 제 맞은편에 앉는 황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아주 강렬한 말을 던졌다.

“블론디나의 어미는 왜 버리셨습니까?”

“…….”

황제는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늘 유연히 상대방을 다루던 황제답지 않게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했다. 제 아들에게서 튀어나온 말이, 그로서 전혀 예상했던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르트는 굳은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분명 블론디나의 모친을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했으니 황궁 밖을 2년이나 나돌며 아이까지 만들었지.

한데 어째서 그녀를 버리고 홀로 온 걸까. 사랑이 식어서? 권력을 좇아서? 그녀의 출신이 미천했기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라르트는 도통 제 아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권력을 좇아 결국 자신의 어머니인 황후와 결혼한 아버지라면, 루시를 향해 가는 제 마음의 방향을 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그녀를 버려 행복하셨습니까.”

라르트의 이어진 질문에 황제는 그대로 찻잔을 내렸다. 달칵. 찻잔과 받침이 맞붙는 소리가 울리고 황제의 얼굴에는 어둠이 내렸다.

블론디나의 모친, 릴리. 그녀는 황제가 의도적으로 마음속에서 지워 냈던 이름이었다.

도려내고 잘라 내 떠올리지조차 않았다. 제 진짜 삶은 황궁에 있다고 믿으며 기억 속에서 파내 버렸다. 파내고 잘라도 그 뿌리가 가슴 한구석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다.

저 혼자 속에서 곰삭아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라르트의 질문은 다분히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그런 라르트의 질문에 불쾌해하지 않는 것은, 라르트가 그간 보여 왔던 언동 때문이다.

늘 생각 없이 말을 내뱉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던 황자 아닌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한편, 라르트는 황제의 표정을 보며 대충 대답을 짐작해 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몇 년이나 품고 있는 마음을 지워 내면 행복할까? 누구보다 냉정하신 아버지마저 후회하시는데?

“폐하. 혹시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라르트.”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하실 거냐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질문을 딱 자르는 황제의 말로 미수에 그쳤다.

라르트는 눈동자만 굴려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화를 내시려나? 다행히 아버지의 얼굴에서 분노를 찾을 수 없었다.

황제는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라르트. 혹시 마음에 둔 이라도 있는 것이냐.”

연륜이 있기 때문일까. 황제는 라르트의 방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저 어리고 미숙한 황자가 사랑에라도 빠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상대의 신분 때문에 고민의 기로에 놓인 것이겠지.

제 아들이 언제 자라 사랑에 고민하는 사내가 된 것인지. 등을 소파에 푹 기대며 턱을 괸 황제가 라르트를 향해 인자하게 말했다.

“옆에 두고 싶은 이가 생긴 것이냐.”

라르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제 아비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가지고 싶으냐.”

그 말에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을 보내지 못했다. 가지고 싶다기보다는 함께하고 싶었다. 루시를 ‘가지다’ ‘버리다’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건 역시 좀 그렇지 않은가. 물건도 아니고.

“아니면, 지키고 싶으냐.”

“……예.”

하지만 마지막 질문에는 고민 끝에 작게 답할 수 있었다.

지키고 싶었다. 곁에 두고 상처받지 않게 함께하고 싶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황제는 턱을 괸 손가락을 슬슬 움직여 제 뺨을 매만지며 웃었다. 가까스로 나온 아들의 대답이 그리 마음에 거슬리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나가 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하여라.”

“예?”

“황자로서 네 몫을 해. 황제 자리에 앉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 한다.”

라르트는 황제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어렴풋하게 황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 아비가 하는 말은.

황제는 긴장한 표정의 아들을 향해 나른히 말을 이었다.

“네가 반석같이 단단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된다면…….”

그리고 고개 돌려 창밖을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진중한 얼굴로 라르트를 쏘아보듯 응시했다.

“네 여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아. 무언가를 깨달은 라르트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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