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114화 (114/121)

# 114

#외전 4화

10년 전.

한참 승마에 재미가 생긴 라르트는 그날 역시 별궁 뒤 사냥터로 향했다. 숲과 맞닿은 풀은 새파랗고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푸르렀다.

라르트는 쉼 없이 달렸다. 풀을 밟으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한심한 듯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도, 은근히 절 무시하는 아델라이의 폭언도,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사냥터의 끝에서 끝까지 네 번이나 왕복한 라르트가 천막 근처로 다가왔다. 저 멀리, 숲 경계에 올망졸망 앉아 있는 두 소녀가 보였다.

“저것들은 뭐야?”

말에서 내린 라르트가 발을 굴려 흙을 떨구며 물었다. 손수건을 건넨 시종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블론디나 황녀님과 별궁 시녀입니다. 소풍이라도 나온 모양입니다.”

“시녀? 블론디나에게도 시녀가 배정됐어? 아버지께서도 너무 관대하시지. 도대체 어느 귀족 가문 자제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신 거지.”

그때까지는 블론디나를 향한 적개심만 가득한 라르트였기에,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블론디나와 루시를 비웃었다.

“저 시녀는 어느 가문 출신이야?”

“헤리브가입니다.”

“헤리브가? 그건 또 어느 구석에 처박힌 영지지?”

헤리브가. 확실히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아마도, 저와 마주할 만큼 세력이 크지 않거나, 만났음에도 기억할 필요가 없어 기억에서 지운 이름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한때는 명망이 있었으나 권력에서 밀려나 지금은…….”

헛기침과 함께 말끝을 허린 시종이 조곤조곤 이어 말했다.

“나무가 단단하면 태풍에 꺾이는 법 아니겠습니까.”

루시의 아비인 헤리브 백작은 루시만큼이나 선량하면서도, 부드러운 속 안에 단단한 심지를 가진 자였다. 그런 자가 암투와 모사가 들끓는 중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만무.

라르트는 환히 웃는 갈색 머리 소녀를 응시했다. 더없이 맑아 보이는 미소가 순수해 보여 왜인지 자꾸 시선이 갔다. 묘한 표정으로 루시를 응시하던 라르트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굳이 신경 쓸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로군. 뭐, 블론디나의 시녀로 들어올 정도면 알 만하지만.”

애초에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는 오만한 황자다. 저보다 못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라르트는, 권력의 실세인 몇몇 가문의 이름만 기억할 뿐 나머지는 먼지보다 못하게 취급했다.

“저 시녀는 어때 보여?”

아무리 멍청이 취급을 받는 황자라 해도 더 이상 황궁 정세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우선 눈길 한번은 두어야 한다. 보통 곪아 가는 것들은 안에서부터 썩기 마련이니까.

“블론디나 황녀를 각별하게 모신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상한 디저트를 내왔다며, 별궁 담당 주방장에게 찾아가 화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권력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철새 타입은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별궁에 버려진 반푼이를 각별하게 모셔서 무얼 얻겠다고.

보통 시녀의 권력은 그들이 모시는 이의 권력에 기생한다. 그런 면에서 루시는 황궁 안에서 기댈 곳 하나 없는 처지였다.

블론디나는 권력을 가지기는커녕 황녀임에도 별궁에 버려진 신세 아닌가. 버려진 황녀와 몰락한 백작가의 딸이라.

“똑같은 것끼리 모였네.”

라르트는 먼지 묻은 옷을 툭툭 털더니 말에 올라탔다. 다시 사냥터를 달리기 시작한 말꼬리 뒤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

라르트가 루시를 두 번째로 마주한 곳은, 별궁 근처 후원이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다며 어머니인 황후 폐하께 호되게 혼난 후, 우울한 마음에 한참이나 걷는 중이었다. 그러다 흘러 흘러 사냥터 근처 별궁까지 오게 됐다.

“황자가 되어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어찌해! 그리 가벼워 차후 제국을 어찌 짊어지겠다고!”

황후의 호된 목소리를 떠올리며 라르트는 가슴 안에 고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털북숭이 후작 놈이 제 속을 벅벅 긁는데 어찌하는가.

자신이 아직 고대어 배움에 미흡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데 그런 자신 앞에서 어찌 제 아들의 고대어 실력을 자랑하느냐는 말이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모르고 한 자랑이라면 제 눈치 없음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알고 한 짓이라면 그 악독한 의도를 혹독히 혼냄이 옳다. 그렇기에 화가 나 주스를 부어 준 것뿐이다.

차라리 대놓고 욕하는 게 낫지. 야비한 놈 같으니. 귀족이라는 것들의 속은 모두 이끼가 가득 낀 연못처럼 불투명하고도 음습했다.

고위 귀족 몇의 얼굴을 떠올리니 다시 속이 답답해졌다. 최근에는 아델라이에게 달라붙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권력의 개들 같으니.

모두 앞에서는 아첨하여 고개를 숙이나, 고개 숙인 얼굴이 절 비웃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긋지긋한 놈들 같으니.

‘애초에 이따위 성격으로 태어난 걸 어쩌라고.’

라르트는 퉁, 돌을 차며 모퉁이를 돌았다. 장미 화원 안에서 짐짓 위엄 있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와 동시였다.

“별궁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루시의 목소리였다. 라르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황궁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자이기에 그들이 대화하건 말건 당당히 등장하면 된다. 하지만 왜인지 발이 멈췄다.

루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편한 것이라도 있니?”

상대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루시와 대화하는 이는 블론디나 소속 시종인 것 같았다. 그리고 별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이야기를 한 상태였고.

라르트는 굳이 오래 듣지 않아도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무릇 권력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사용인의 위치는 제가 모시는 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블론디나를 모시는 이들은 모두 별궁을 떠나고 싶어 할 것이다. 권력에 기생해야 부스러기라도 떨어질 테니.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무시하는 블론디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귀족 놈이나, 하인 놈이나 다들 뭐 하나 얻어먹으려고 눈만 시뻘게지지. 필요 없으면 주인이라도 배신하는 거야. 에잇, 더러운 놈들.’

좋아. 분풀이라도 해야겠다. 꼬투리를 잡아 저 시종 놈의 뺨이라도 쳐야지. 그리 생각하며 불쑥 나가려던 때였다. 단정한 루시의 목소리가 라르트의 발목을 잡았다.

“빌테. 그동안 황녀님께서 무척 잘해 주셨잖아. 네가 황녀님께서 아끼시던 잔을 깨뜨렸을 때도 질타하지 않으셨던 것 잊었어? 네 여동생에게 주라며 늘 간식을 챙겨 주셨던 건?”

빌테라는 시종은 차마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황녀님은 네 소식을 들으면 속상해하실 거야. 네가 떠난 이유를 쉽사리 알아차리실 테니까. 널 원망하기는커녕 본인이 부족한 탓이라며 혼자 자책하실 테지.”

“…….”

“그래도 갈 테야?”

덤불에 숨어 엿듣고 있는 라르트는, 빌테 대신 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용없어, 시녀. 애초에 충직한 자라면 떠날 생각도 하지 않겠지. 지금 저 시종은 네 말 같은 건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을걸.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빌테라는 시종은 나직이, 그리고 조금 귀찮다는 듯 자그맣게 답했다. 이런 공방조차 불필요하다는 말투였다.

‘역시.’

라르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저들 앞에 나서기도. 참견하기도 탐탁지 않았다.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는다.

별궁 근처를 벗어난 라르트는 아까 들었던 루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직 소녀지만 진중하고 곧은 목소리. 상냥하지만 동시에 말꼬리가 단단했던.

‘다 너 같은 줄 아나. 무슨 꿈같은 말을 하며 설득하겠다는 건지. 네가 이상한 거야. 네가 이상한 거라고.’

라르트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돌멩이를 툭 찼다.

……그런데. 저 시녀 이름이 로지라고 했던가?

***

가난뱅이 귀족.

무너져 가는 헤리브가의 딸.

외면받는 블론디나의 시녀.

로지가 아닌, 루시. 루시 헤리브.

라르트는 침대에 누워 루시의 이름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서 루시라는 소녀가 떠나갈 줄을 몰랐다.

사실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다.

숲 근처의 청정한 공기를 맡고 싶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먹이며 별궁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멀리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을 따름. 블론디나와 함께 황족끼리 식사를 할 때. 블론디나를 따라온 루시를 힐끔힐끔 몰래 관찰했을 뿐.

침착한 몸짓. 늘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매. 황족인 절 마주할 때마다 항상 살짝 내리깔고 있던 속눈썹. 루리 헤리브.

“……에이씨!”

라르트는 몸을 휙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제 마음을 알고 있다. 외면하고 싶으나 너무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

바보 같은 자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볼 거라고는 올곧은 성품과 예쁜 얼굴밖에 없는 시녀에게. 그것도 매우 진심으로 마음 깊이!

‘안 돼. 안 돼!’

라르트는 괜히 베개만 쾅쾅 두드렸다.

‘난 그런 애랑 만나서는 안 돼!’

씨근덕거리는 호흡이 목 아래 걸렸다.

그런 애. 자신은 ‘그런 애’를 좋아해서는 안 됐다. 가뜩이나 아델라이에게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데 부인이라도 잘 만나 이득을 보아야 하지 않나. 예를 들면 제 어머니를 들였던 황제 폐하처럼.

어머니만큼 우아하고, 위대하고, 배경이 단단한 부인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후 제국을 평화로이 다스려야만 했다.

권력이 없는 황제만큼 제국을 위태롭게 만드는 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진심이니, 사랑이니, 진정한 마음의 결실이니 하는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황족에게는 결혼마저 협상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 루시를 좋아하는 건 철저히 밑지는 장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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