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피곤하지?”
피로연이 무르익기도 전에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덥석 들어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미 흥이 오를 대로 오른 피로연은 주인공들이 없어도 복작복작 잘 굴러갈 터였다.
에이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첫 번째도 블론디나의 안정, 두 번째도 안정, 세번째도 안정.
따뜻한 욕조 안에 블론디나를 조심스럽게 앉힌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걱정스레 들여다보았다.
“피곤하지 않아?”
“우리 결혼식인데 피곤할 게 뭐 있어. 즐거웠어.”
살포시 웃으며 답하자 에이몬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짙은 어둠을 녹여낸 달빛이 창문 틈으로 아스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블론디나.
절 향해 미소짓는 입술과 귀여운 콧대. 온화하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까지. 어깨 아래로 늘어진 금발은 빛을 뿌리며 산란히 빛났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꿈꿔온 이였다. 경배하고, 사랑하고, 원했던. 욕심내는 것조차 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늘 불안하기만 했던 제 신이었다.
라피옌일 때도, 블론디나인 지금도, 바라보기만 해도 초조하고 안달이 나는. 제 피를 들끓게 하는 유일한 존재.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제 반려.
보고 있노라면 늘 심장 안쪽이 간질간질 달아오르고는 했다.
“에이몬?”
블론디나가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에이몬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환상같이 느껴졌던 그녀가 비로소 실제란 걸 알아차렸다.
손을 뻗은 블론디나가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물에 잠겼던 손끝이 따끈따끈했다.
“너도 들어와, 에이몬.”
아침에 경건히 씻고 나가 온종일 청정한 수풀 위에 앉아만 있었다. 더러울 건 없었지만 그 역시 피곤할 터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녹이자는 뜻이었다.
에이몬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물방울을 튕기며 블론디나가 웃었다. 에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느슨히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순간 여유로웠던 블론디나의 눈빛이 굳었다.
툭. 툭. 천이 바닥에 떨구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낯선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블론디나의 목울대도 꿀꺽꿀꺽 넘어갔다.
“…….”
아. 이래서 에이몬이 잠시 주저했는가 보다.
옷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물 안에 담가 주어 깨닫지 못했다. 블론디나 자신을 벗기면 부끄러워할까 봐 에이몬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래. 원래 물에 들어오려면 옷을 벗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이제 나신이 된 에이몬을 앞에 두자 묘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조각상 같아.’
늠름하게 벌어진 어깨와 두껍고 탄탄해 보이는 가슴팍. 손끝으로 누르면 튕겨 나올 것같이 단단한 복부까지. 여기 들어오라고 가볍게 말했을 땐 이런 모습을 상상했던 게 아니었는데.
발개진 귓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블론디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수면이 부드럽게 출렁이고 뒤이어 온기가 느껴졌다. 에이몬이 그녀를 조심스레 마주 안아 제 다리 위에 올린 것이다.
블론디나는, 젖은 등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손바닥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곧 그가 눈가를 슬며시 휘며 미소 짓자 블론디나는 숨을 들이켰다. 물이 뜨거워서 그런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상하다. 에이몬인데. 평소와 같은 에이몬인데.’
이렇게 가까이 있다고. 좀 벗었다고 이런 감정이 들어도 되는 건가.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다리에 올라타, 물에 잠겨 있는 그의 몸을 힐끔힐끔 내려 봤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물론 제 배 속의 아이는 그냥 들어선 것이 아니다. 눈앞의 몸을 맞대고 붙이며 이런저런 행위를 하며 생긴 게 맞았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봐서 그런지 너무…….’
몇 달 만에 처음 보는 커다란 몸은 황홀하고도 새삼스럽기만 했다.
“불편하지 않아?”
에이몬이 그녀의 쇄골을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물었다. 그의 손끝이 쇄골 선을 따라 내려가고, 가슴골에 닿았다가 기어이 곱게 묶인 끈에 도달했다.
손길을 따라 조용히 출렁이는 물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침을 꼴깍 삼키고 싶었는데, 왠지 이상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
차마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면 아마 염소같이 발발 떠는 목소리를 에이몬에게 들려주게 될 게 뻔하다.
에이몬은 부드럽게 가슴 끈을 풀기 시작했다.
“불편할 것 같은데. 우리 아가도 답답할 테고.”
조였던 옷자락이 풀리자 뽀얀 살결이 살짝 드러났다. 하지만 물에 젖어 그런지 천은 흘러내리지 않고 그녀의 몸 위에 달라붙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단추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풀기 시작했다. 뜨겁게 젖은 천 위를 오가며 꽃잎 벗길 준비를 하듯 조심스럽게 헤쳤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여미고 있는 모든 단추를 풀어 낸 후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벗겨도 돼?”
그의 입술이 솜털이 자르르 일어선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부드럽고도 나직한 목소리 역시.
“벗기고 싶어. 응?”
애원하듯, 요청하듯 건네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가라앉아 유혹하는 것만 같다.
두근두근. 사정없이 뛰는 심장 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쾅쾅 울려대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긴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호흡을 얕게 유지하며 애써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 아이가…….”
옷이 벗겨진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몸을 겹치게 될 것이다. 배에 우리의 아기가 있는데 괜찮은 일인가 싶어 블론디나는 뺨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귓가에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안정기라 해도 된대. 험하게만 하지 않으면.”
블론디나는 결국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뭐…… 뭐를…… 이라고 묻기엔 그가 해 오는 말이 무언지 너무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제 뺨을 타고 내려오는 그의 입술이. 기어코 겹쳐지는 입술과 입술 사이의 온기가, 아까부터 아래를 찔러 오는 단단한 것이 모두 하나만을 말해 오고 있었다.
달래듯 제 입술을 핥는 그를 피해 얼굴을 물렸다. 하지만 두 뺨을 맞잡고 따라붙는 터라 끝까지 달아나지는 못했다.
입술이 부드럽게 빨리고 입술 틈 사이로 젖은 혀가 문질러졌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와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물어봤어.”
그는 계속해서 블론디나의 입술을 괴롭힐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닿은 입꼬리를 올려 슬쩍 미소 지었을 뿐이다.
숲을 달려 황궁까지 간 후, 의사를 찾아내어 손수 물어보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슬며시 내려온 손이 블론디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젖은 천을 살살 벗겨 내기 시작했다. 착 달라붙어 몸을 가리던 옷가지가 떨어져 나가자,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여유로운척하던 에이몬의 숨결이 가빠졌다. 말랑한 살덩이를 향해 급하게 얼굴을 갖다 댄다.
“내가 기억하는 가슴과는 조금 다른데.”
가슴 위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아 왔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조심스레 움켜쥔 그는 뾰족 드러난 곳 위로 입술을 갖다 대어 곧장 물었다.
“아……!”
블론디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가 예민한 곳을 물고 빨 때마다 젖은 마찰음이 공간을 울린다. 야하게 달뜬 소리였다.
블론디나는 제 가슴팍 위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살갗 위에 감기는 혀끝은 뜨겁고 축축했다. 무어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아릿한 감각을 참아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가슴과는 조금 다른데.’
아이를 가져 그런지, 이전보다는 가슴이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예민해진 것 같기도.
“읏!”
그가 예민한 정점을 이 사이로 부드럽게 물자, 눈앞에 흥분에 찬 섬광이 튀었다. 참지 못해 몸을 뒤틀 때마다 찰방찰방 물이 튀었다.
“하아…… 너무 그리웠어.”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몸이 절절 녹는 것만 같았다. 맞닿은 몸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 단단해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서.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허리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잡아당겨 제 몸을 그녀 안에 느릿하게 밀어넣었다.
“아…….”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진입하는 것은 달군 돌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블론디나는 무의식적으로 제 아랫배를 매만졌다.
그녀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살살 달랬다.
“아이 놀라지 않게 잘할게.”
“으응…….”
블론디나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녀의 찡그린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어 편 에이몬이 쪽쪽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숨 쉬어 봐, 브리디. 응. 그렇게…….”
에이몬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안에 절 깊이 박아 넣은 채 인내할 뿐이었다.
온몸을 들쑤시는 충동을 억지로 참아 내고, 그는 블론디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굳은 몸을 풀고 얼었던 강을 녹이듯 다정하게.
그저 서로의 몸이 이어져 있는 것뿐인데 호흡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에이몬…….”
블론디나는 그의 목덜미에 팔을 기대며 늘어진 몸을 기댔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이 제 단단한 가슴팍에 닿자, 에이몬은 참기 힘든지 흥분에 찬 숨을 길게 뱉었다.
그를 안은 팔이 잘게 떨린다. 블론디나는 배 속에 차오르는 아릿함을 참기 힘들어 조르듯 속삭였다.
“살짝, 살짝만…….”
이젠 블론디나 자신이 한계였다.
아무런 설명 없는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에이몬은 그녀의 말을 곧장 알아들었다. 허리를 부드럽게 붙잡고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 으응…….”
천천히 쓸려오는 감각에 속이 떨린다. 오히려 정중하고도 느릿했기에 더욱 안달이 났다.
에이몬은 절 자제하려 애쓰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블론디나는 달뜬 흥분이 치밀어 에이몬의 입술을 물고 혀를 깨물었다.
에이몬의 입술을 꽉 깨물어, 기어이 핏방울이 맺힐 때까지 둘의 행위는 느릿하게 이어졌다. 달이 기울고 샛별이 차오를 때까지 아주 천천히.
***
오후의 평화로운 볕이 내리쬈다.
블론디나는 늘어지게 자다가 이제 막 잠에서 깬 참이었다. 임신 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졸음이 점점 밀려왔다.
“깼어?”
커다란 손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블론디나는 누운 상태로 눈만 간신히 뜨고는 절 내려다보는 상대를 향해 가만히 웃었다.
시선 끝에 그가 닿았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도.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도. 늘 저만 바라보는 그가 보였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물었다. 볼록 나온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산달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블론디나는 그저 웃었다.
응. 꿨어. 아주 좋은 꿈. 에이몬 너와 함께 늘 행복하게 지내는 꿈.
그녀는 제 배에 닿은 에이몬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찬찬히 덮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슬며시 깍지 끼며 온기를 나눴다.
“응. 좋은 꿈을 꾸기는 꿨는데…….”
“그렇게 좋았어? 내가 나왔나 봐?”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부드럽게 묻는 그의 질문에,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손을 끌어와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응. 너무 좋았어. 그런데 꿈보다 현실이 더 좋아. 너와 함께 이렇게 있는 게 가장 행복해. 어떤 꿈을 꿔도 지금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거야.”
“…….”
에이몬은 마치 불시에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의 고백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녹아내릴 듯 웃으며 블론디나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아니.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 거야. 브리디, 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뒤이어 키득키득 블론디나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수분에 젖은 풀 향기가 피어오른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볕이 그들을 간질간질하게 덮었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평화로운 하루가, 바람결에 나직이 떠밀려 가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