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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09화 (109/121)

# 109

#109화

식은 정오에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숲속 생명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블론디나는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앉아 석양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불꽃을 응시했다.

블론디나의 목에는 산새 깃털을 모아 만든 색색의 어여쁜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표범의 몸에 맞게 제작된 것이라 그녀에게는 무척 컸다.

‘음. 이건 목걸이라기보다는 망토 같은데.’

표범 목에 살짝 걸리는 목걸이가 온 어깨를 뒤덮는 커다란 장식품이 된 것이다.

블론디나는 풀을 엮어 만든 의자에 반쯤 기대어 있다가 지루함에 어깨를 들썩였다. 임신한 절 배려하여 푹신한 의자까지 만들어 준 건 좋으나 몸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크왕! 크와앙!

그 와중에 옆 공터에서는 신수들이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인간으로 변한 신수가 둥둥둥 북을 두드리고 한쪽에서는 표범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뒤엉킨다.

블론디나는 상체를 기울여 제 옆에 있는 흑표범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에이몬. 우리 결혼식인데 왜 저 신수들이 싸워?”

참다 참다 이제야 물어보는 것이었다.

낮부터 계속된 싸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는지, 한 팀이 싸워 승자가 정해지면 또 한 팀이 싸우는 전투가 계속됐다.

분명 제 결혼식을 하는 건데 왜 저들이 싸우고 있는 건지. 에이몬과 자신은 왜 이 상석에 앉아 싸우는 그들을 보고 있는 건지. 신수들은, 싸우는 주제에 왜 흥겨워하며 북을 치고 들썩들썩 꼬리를 흔들고 있는 건지.

‘물론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 흔드는 표범들이 꽤 귀엽기는 하지만…….’

이 행사는 에이몬과 블론디나의 결혼식이었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신수의 방식으로 진행되며 황궁이 아닌 숲속에서 열리고 있었다.

참여 인원은 많지 않았다. 신수. 결혼식 주인공인 에이몬과 블론디나. 그리고 제국의 황제인 라르트와 그의 연인 루시. 마지막으로 블론디나의 아버지인 선황제까지.

당연한 일이지만 계모인 선황후는 오지 않았다.

신수들이 서로 거칠게 뒹굴며 으르렁거릴 때마다 숲이 울렸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놀란 짐승이 달아난다. 신수에게는 축제였고 인간에게는 다소 두려운 행사였다.

선황제는 덤덤한 척 블론디나 뒤에 근엄하게 앉았으나, 지팡이를 잡은 손은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루시는 대놓고 몸을 떨었으며 라르트는 질렸다는 얼굴로 나뒹구는 표범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황궁에서 싸울 때는 전쟁이었다고 치지만 이건 결혼식 아닌가…….”

어이없이 흘리는 라르트의 목소리가 신수들의 울부짖음에 묻혔다. 인간으로서는 영 이해되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정수리에 뺨을 비비며, ‘지금 저 신수들은 왜 싸우는 거냐’라는 질문마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답했다.

「나도 몰라.」

제 무지를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는 과하게 당당했다.

“신수 수장이 모르면 어떡해.”

「예전부터 신수가 결혼할 때마다 저랬다는데, 사실 나도 처음 봤어. 결혼 처음 하니까.」

“흐음.”

본전도 못 찾은 질문이라 블론디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하기야 에이몬도 그리 나이가 많은 건 아닌 데다가, 신수는 수명이 기니까. 처음 봤을 수도 있지. 그래도 유래마저 모르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뭐……. 에이몬만 안 싸우면 되는 거지.’

하지만 이내 좋게좋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앙앙 물며 비비적대던 에이몬이 갑자기 흠칫 놀랐다.

“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에이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늦은 걱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괜찮아, 브리디?」

그러고 보니 블론디나는 인간 아닌가. 에이몬 자신이야 신수였기에 신수가 싸우든 말든 심드렁했으나 제 소중하고 연약한 블론디나는 다를 수도 있다. 심지어 그녀의 배 속에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도 자리잡고 있는데.

이렇게 멍청할 수가. 이런 간단한 배려조차 하지 못하다니.

에이몬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아기 오리 안듯 안아 제 품에 꼭 파묻었다.

‘저 무식한 짐승들은 보지 마.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만 봐.’

대충 그런 의미의 행동이었다.

블론디나는 키득 웃으며 그의 털을 슬슬 문질렀다.

“고양아. 나 라피옌이야.”

에이몬의 몸이 멈칫 굳었다. 하기야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신 앞에서는 커다란 애완 고양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그 뒤 라피옌이 힘을 잃었기에 본인이 더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뭐 지금은 신력을 다 잃기는 했지만…….”

블론디나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눈앞의 새까만 털만 만지작거렸다.

이전의 영광과 힘도 모두 옛말이다. 하지만 그리 아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라피옌이었을 때도 모두 잊고 흑표범과 행복하기 살려고 하지 않았나.

바라한의 훼방으로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으나 어쨌든 간단하고도 어려웠던 소망을 이루었다. 이렇게 아이를 갖고 결혼식까지 하고 있으니 더할 바 없이 만족스러울 따름이다.

“아무튼, 저런 어린애 싸움 같은 건 두렵지 않아. 괜찮아.”

에이몬은 다행이라며 그르렁거리더니 벗어나려는 블론디나를 다시 꽉 당겨 안았다.

「그래도 안고 있을래. 이게 좋아.」

지루한 와중에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 그녀의 뺨을 핥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만족에 찬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온종일 의연한 척 앉아 그녀를 힐끔거리기만 했는데 마침 잘됐다.

블론디나는 가볍게 웃었다. 마치 사랑받는 새끼라도 된 기분이었다. 막상 진짜 에이몬의 새끼가 될 아이는 제 배 속에 있는데.

블론디나는 손을 내려 배를 슬슬 문질렀다. 이제 눈에 보일 만큼 볼록 솟아 있었다.

“너도 괜찮지, 아가?”

한때 신이었던 엄마와, 신력을 잃음에도 여전히 신체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아빠 사이의 아이니 그 역시 강할 터. 이까짓 소동에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말을 걸듯 물었다.

통.

대답인지 우연인지 작은 태동이 느껴졌다.

블론디나는 손바닥을 댄 채 흠칫 굳었다. 에이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동시에 블론디나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다가, 얘가 말을 빨리 알아듣네. 라고 농담조의 말을 나누며 이내 웃었다.

처음 태동을 마주했을 때. 에이몬은 무척 놀랐다.

긴장으로 발발 떨리는 앞발을 들어 배를 톡 건드렸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달아나고. 꿀꺽 침을 삼키며 아주 조심스럽게 앞발을 대었다가. 주둥이로 그녀의 배를 문지르며 아주 소중하다는 듯 뺨을 살짝 댔다.

바스러지기 쉬운 설탕 과자를 앞에 둔 것처럼 조심스럽게, 신기하고 애틋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 속 아이가 커 감에 따라 블론디나 역시 제 몸의 변화를 여실히 느꼈다. 임신으로 달라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몸 안을 떠돌던 신력이 차츰차츰 자리잡는 것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힘은 아니었기에 에이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에이몬 역시 조금은 눈치채고 있을 터다.

“그런데, 신수들은 정말 언제까지 싸우는 거야?”

「승자가 나타날 때까지.」

“승자가 나타나면? 결혼식이 끝나?”

「응. 그 승자가 우리의 결혼식을 온 숲에 선포해 주는 거야. 몇 번에 걸쳐 울부짖으면서.」

고작 그 선포를 위해 저렇게 피 터지게 싸운다는 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의아해졌으나 인간인 자신이 어찌 저 짐승들을 이해할쏘냐. 늘 ‘강함’을 추구하는 신수이니 이런 방식으로 결혼을 축하할 수도 있는 거지.

신수 입장에서는 밀을 많이 수확했다고 축제를 여는 인간의 행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해가 끄트머리만 남기고 들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전투 역시 슬슬 끝이 나고 있었다.

전투의 승리는 에이샤 장로의 차지였다. 젊은 혈기의 샨티와 박빙을 이루었으나 결국엔 노련한 연륜으로 승리를 거뒀다.

짐승의 길고 긴 울부짖음 끝에 블론디나와 에이몬의 결혼 선포가 온 숲을 퍼져 나갔다.

“결혼 축하해!”

“결혼 축하드려요, 황녀님!”

“축하한다, 딸아.”

기쁨에 젖은 인간의 축하 인사와 짐승의 포효가 숲을 뒤흔들었다.

석양빛마저 사그라진 밤. 어둠이 시작되고 진정 축제가 열릴 참이었다.

청명한 달밤 아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본디 신수들의 결혼식 축제는 아까의 전투로 끝이었지만 인간을 하객으로 초청한 이상 그리할 수는 없는 법. 인간에게 맞춘 소박한 피로연이 열었다.

푸릇한 수풀 위에 새하얀 테이블이 놓이고, 그 위로 인간의 핑거 푸드가 올라왔다.

샨티는 자신들이 사냥한 짐승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겠다 했으나, 에이몬과 블론디나의 만류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에이몬은 애써 의연한 척하더니, 진정 반려가 되었다고 선포되자마자 크게 날뛰며 블론디나를 덮쳤다.

물론, 배 속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를 고려하여 마구잡이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그녀 주위를 빙빙 돌고 괜히 그녀의 발등을 핥다가 그녀의 목덜미에 제 뺨을 비비거나 하며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우리 수장님이 표범이 아니라 개였나…… 하고 샨티가 혼자 중얼거렸을 정도로.

그를 지켜보던 다른 신수들 역시 멍하니 눈동자만 움직여 에이몬의 정신없는 움직임을 좇았다. 블론디나 역시 가만히 미소 지으며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미 아이까지 있는데 이렇게 좋을까…….’

그러다 에이몬이 제 발치에 웅크려 종아리에 뺨을 비비자 손을 내려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단단한 온기. 이제 앞으로 영영 함께할 표범이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웠다.

잠시 후, 온종일 달라붙을 기세인 에이몬을 간신히 떼어 낸 블론디나는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나무 그림자 아래, 고고하게 앉은 한 사람을 향해서였다.

제 아버지이자 제국의 전 황제였던 남자.

라르트에게 황제직을 물려주고 선황제가 된 그는, 황제였을 때와 조금 달랐다. 표정과 행동은 여전히 우아했으나 다소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아델라이를 잃은 후 그는 칩거에 들어갔다. 황제 직을 내려놓고 권력에서 멀어진 것이다.

아델라이가 죽음은 그녀의 지독한 권력욕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권력과 명예에 환멸을 느끼고 라르트에게 모두 넘겨 버렸다.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다운 남자는, 음울하게 잠긴 눈동자로 샨티와 대화하고 있었다.

“폐하. ……아버지.”

블론디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그가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확인한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두 팔을 벌렸다.

“이리로.”

쭈뼛쭈뼛 걸음을 옮긴 그녀가 어색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조금 주저하기는 했으나 예전처럼 아버지와 함께인 것이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절 여전히 제 딸로 여겨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주지 못한 애정을 나름대로 진심으로 표현하며.

“축하한다, 나의 딸.”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블론디나 역시 조용조용 답했다. 장작 타는 소리가 유난히 따뜻하게 밀려왔다. 황제는 블론디나의 몸 상태를 걱정하여 그녀를 안았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고개 숙여 다정히 눈을 맞춘 그가, 블론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어린아이일 때는 해 주지 않았던 그 행동을 다 큰 이제야.

“릴리가 기뻐하겠구나.”

“…….”

릴리. 그녀는 블론디나의 어머니이자,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이의 이름이었다.

“네 배 속에 있는 아테스가의 핏줄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다정한 어미와 상냥한 아비가 있을 터이니.”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말을 쉬더니 이내 어렵게 웃었다. 미소 위로 씁쓸한 자책이 흘렀다.

“네 유년 시절을 망가뜨려 미안하다.”

무겁게 묻어 두었던 감정을 뒤집어 솔직한 사과를 건넸다.

그가 블론디나를 버림으로써,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후 인고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만 했다. 폭력적이고 거친 세상에 던져져 홀로 힘겹게 살아갔다.

황제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블론디나를 처음 만났던 영주의 성. 꼬질꼬질하게 더러웠던 그녀의 옷과 바짝 말라 앙상했던 팔뚝을.

제 딸에게 차마 용서를 구할 수도, 용서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블론디나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랄 수밖에.

블론디나는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정말 행복해질 거니까.”

정말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황제의 뒤에서 몸을 웅크린 채 절 불만스럽게 응시하는 에이몬과 함께라면. 아버지와 딸이 붙어 있는 것마저 유치하게 질투하는 저 짐승과 함께라면 이 세상이 늘 향기로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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