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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00화 (100/121)

# 100

#100화

라르트가 짓씹는 것처럼 외치며 블론디나를 붙들었다.

“에이몬 님! 치료해야 하니 블론디나를……!”

하지만 에이몬은 꽉 끌어안은 그녀의 몸을 놓지 않았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이 끝임을 진저리치며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이어져 있던 반려의 각인이 끊겼다. 블론디나의 생명이 이미 다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실히 마주한 것이다.

“브리디.”

차마 인정할 수 없어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절박하게 붙들었다. 차게 식어 가는 뺨에 제 얼굴을 붙이고 멍한 표정으로 그녀 이름만 불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처절하게 끌어안고 망가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것뿐이었다.

조셉을 향한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저자를 죽여라!”

“저 반역자를 한꺼번에 공격해!”

감히 황녀를 죽인 인간을 향해 검을 들었다. 황제와 라르트 역시 미친 사람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셉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모두 폭풍우에 휘말린 낙엽처럼 강하게 튕겨 나갔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신력이었다.

에이몬과 블론디나. 조셉을 중심으로 커다란 힘의 벽이 생겼다. 인간이 들어올 수 없게 방어벽을 단단히 세운 조셉은, 여전히 블론디나를 안고 있는 에이몬을 향해 찬찬히 다가갔다.

과거 절 죽였던 짐승을 처단하기 위하여. 그때 하지 못한 복수를 오늘 이루어 내기 위하여.

“꼴 좋구나.”

조셉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에이몬을 응시했다.

“어디서 본 장면 아닌가. 그때와 똑같아. 라피옌은 다시 죽었어. 널 선택했기 때문이지.”

“…….”

“네가 죽인 거야.”

조셉은 이죽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에이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의식은 블론디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아직 이토록 따뜻한데 왜 숨을 쉬지 않는 걸까. 왜 입을 열어 대답해 주지 않는 걸까.

조셉은 에이몬의 주위를 찬찬히 돌며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방심한 빈틈을 파고들어 날 교활하게 죽였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이번에 죽는 건 너다.”

“…….”

“환생조차 하지 못하게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너와 라피옌 모두!”

광기에 젖은 목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에이몬의 귓가에, 조셉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에이몬은 까맣게 죽은 눈으로 블론디나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던 말만 곱씹었다.

블론디나가 마지막까지 했던 게 내 걱정이었나. 내 이름을 불러 주었던가. 나는 대답을 했었나.

라피옌은 누구고, 과거의 일은 무얼까. 하지만 모두 무의미할 뿐이라 에이몬은 생각을 조용히 멈췄다.

축 늘어진 블론디나를 내려다본다.

모두 제 잘못이었다. 애초에 가만히 있었더라면. 블론디나가 인질로 잡혔을 때, 죽음을 기다리며 숨죽였더라면 어쩌면 블론디나는. 나 때문에. 내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녀를 꿰뚫은 창날을 천천히 뽑았다. 손등을 타고 피가 왈칵 흘렀다. 뜨거운 핏물에 제 몸 역시 눅눅하게 잠겨 드는 것 같았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혔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천천히 바닥 위에 눕혔다.

“브리디.”

여전히 대답 없는 그녀를 보며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피에 젖은 손으로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곱게 반짝이는 금발이 붉게 물들어 간다. 식어 가는 피부에서는 이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나로 인해. 내 잘못으로 널 또 잃었어.

그녀의 죽음을 깨닫고 나서야, 에이몬은 짙은 분노가 절 잠식함을 느꼈다. 이성을 벗어난 감정이 겨울 폭풍처럼 차갑게 몰려왔다.

에이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한 조셉의 얼굴이 보였다.

“…….”

에이몬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물기를 떨군 눈가 위로 다시 슬픔이 그득 고였다.

무감정해 보이는 그의 속은 이미 폭풍이었다. 문드러지고 짓이겨져 핏물이 흘렀다.

시리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광기를 뒤집어쓴다. 곧 고요하던 에이몬의 표정이 깨졌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흑표범이 빛처럼 도약했다.

새까만 짐승이 조셉을 곧장 덮쳤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박아 넣었다. 바라한은 기다렸다는 듯 버둥거리며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끝을 볼 수 있게 됐다.

절 죽였던 짐승의 피를 보고 끝내 승리를 차지하게 될 터.

라피옌과 짐승 모두 윤회도 없는 어둠 속으로 처박을 것이다. 그것이 절 배신한 라피옌과 짐승에게 하는 유일한 복수였다.

조셉은 격한 희열을 느끼며 방어벽 뒤로 대기시켰던 신수를 모두 불러들였다.

신수들의 포효가 땅을 뒤흔든다. 그들은 에이몬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때와 난 달라. 이제 난 혼자가 아니거든.”

에이몬을 조소하며 조셉은 에이몬을 웃는 낯으로 지켜보았다. 굳이 자신까지 끼어들 필요가 있겠는가.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을 구경하면 되는 것이다.

저 새까만 짐승은 이미 죽기 직전까지 상처를 입은 상태다. 가까스로 절 지탱하던 정신력마저 연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끝이 보이는 전투였다.

신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에이몬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쾅! 갑옷조차 간단히 우그러뜨리던 힘이 바닥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거칠게 일었다. 흐릿한 시야를 헤치고, 에이몬은 오로지 조셉만을 응시했다.

‘바라한!’

바라한, 그였다. 다시 그였다.

과거의 일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자신은 다시 라피옌을, 블론디나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신수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에이몬을 포위했다. 쓰러졌던 신수가 다시 일어나 그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미 상처뿐인 다리 위에 다시 핏물이 흘렀다.

에이몬은 제게 달려드는 신수들을 매단 채 거침없이 움직였다. 송곳니가 박히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조셉을 향해 내달렸다.

목덜미를 공격하는 표범을 내친 후 짓밟자 으드득, 갈비뼈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신수에게서 고통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신수인 이상 쉬이 죽지는 않을 터.

에이몬은 제게 달라붙는 신수를 모두 내치고 조셉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이는 건 조셉 하나. 그밖에 없었다. 광기에 젖은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린다.

“막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조셉은 당황하여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맞서기엔 저 짐승의 눈동자에 밴 살기가 너무도 짙다. 두려움을 피해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미 기력이 빠질 대로 빠진 것 아니었나!’

도망치던 조셉은 제게 신력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입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힘을 날렸다.

하지만 살기를 드러낸 짐승은 공격을 그대로 받아 냈다. 목숨 따위는 모두 내려놓은 듯한 광기였다. 조셉을 공격하고 죽이는 것만이 그의 목표가 된 듯한 처절한 사투.

“저, 저, 미친!”

조셉에게서 새하얀 신력이 마구 터져 나왔다. 화살처럼 날아가 짐승을 공격하고 단단한 살을 파헤쳤으나 짐승은 꿈쩍하지 않았다.

콰쾅! 중심을 잃은 신력이 처박혀 사방이 진동한다. 에이몬의 움직임이 재빨라 공격 범위를 한정짓기 힘들었다.

어느새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에이몬의 앞발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쳤다.

“으악!”

조셉의 전신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처음 공격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뒤이어 날아든 발톱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으아아악!”

조셉의 어깨에서 붉은 핏물이 터졌다. 제법 큰 상처였으나 신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범위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흐르는 상황으로 반쯤 패닉에 빠진 조셉의 정신력은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에이몬의 공격이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날카로운 검이 지나는 것처럼 살기가 스쳤다. 짙은 공포가 조셉의 전신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짐승 따위가!”

그는 두서없이 팔을 휘저으며 신력을 터뜨렸다.

점점 광분하는 그와 달리, 에이몬은 차분하게 그를 상대했다. 숨죽인 차가운 분노로 조셉을 물어뜯었다.

부들부들 떠는 조셉이 몸서리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한 이마 위로 차게 식은땀이 흐른다.

“저리 가!”

땀이 흘러들었는지 시야가 흐릿하다. 흐릿한 눈앞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려들었다. 그는 간신히 상체를 돌려 피했다. 이번에는 금방이라도 절 난도질할 것 같은 발톱이 귓가를 스쳤다.

“잇! 이 짐승 따위가 감히!”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처절하게 반항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제 가슴팍을 관통하는 충격으로 조셉은 휘청이며 날아갔다.

“으아아악!”

뼈가 부수어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공중으로 붕 뜬 몸이 방어벽에 부딪혀 초라하게 뒹군다. 툭. 예리하게 베어 낸 한쪽 팔이 뒤늦게 떨어졌다.

“으윽!”

조셉은 고통이 몰려오는 어깻죽지를 붙들었다. 공포에 젖은 눈동자가 절망에 물들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그는 악독한 원망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 네까짓 놈에게! 내가! 내……!”

하지만 그의 뱀 같은 혓바닥 역시 곧 멈췄다.

으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에이몬의 송곳니가 그의 목덜미에 박혔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비명조차 소리를 죽였다.

“끅…… 으…….”

바라한에게서 피 끓는 소리가 흘렀다. 처절하게 짓이겨 나오던 신음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한때 다시 신의 힘을 가졌던 인간은, 흙바닥을 뒹굴며 초라한 마지막을 맞이했다.

진득한 피 내음이 퍼진다. 주위는 다시 적막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에이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셉의 죽음 이후 신수들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차마 에이몬을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터벅터벅. 에이몬은 발을 겨우 끌어 블론디나를 향해 애처롭게 다가갔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

톡. 그녀의 얼굴이 힘없이 움직였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에이몬은 한동안 블론디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에 젖은 뺨을 핥았다. 생명을 잃은 피부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에이몬의 목 아래,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렸다. 죽음 같은 고통으로 힘겹게 진저리쳤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샨티 역시 애끓게 신음했다.

에이몬……. 조셉의 제어를 받아 행한 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들이 에이몬을 상처 입히고 벼랑 끝까지 몰아간 것이다.

한참이나 블론디나의 뺨을 핥던 에이몬은 콧등으로 블론디나의 목덜미를 비볐다. 한기가 돌기 시작한 살갗 위로 피에 젖은 털이 문질러졌다.

「브리디.」

에이몬은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에이몬은 어둠에 잠식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때 우웅,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라피옌의 검이 몸을 떨며 흰빛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빛이 무언지를 아는 에이몬은 떨리는 호흡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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