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에이몬의 뜻을 알아차린 황제가 검을 들며 외쳤다.
“수장을 뒤쫓는 신수들을 막아라! 벽을 만들어 공격에서 그를 지켜야 한다!”
“예! 폐하!”
전장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에이몬 뒤를 제국군이 단단히 막았다. 굳은 눈빛으로 검을 들고 신수를 공격한다. 견고한 벽이 되어 에이몬의 후방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오토만 백작이 제국군의 충성을 제게 돌리고자 했으나, 그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끝내 황제였다.
그 사이 에이몬이 더욱 가까워졌다. 당황한 오토만은 처절하게 외쳤다.
“다, 다가오지 오지 마라! 황녀가 죽어도 괜찮은가!”
에이몬이 제 경고를 무시하고 정공으로 덮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평정을 잃었다.
“더 오면 이 여자를 정말 죽여 버리겠어!”
오토만은 블론디나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해칠 수 없는 건, 흑표범에게서 절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지켜 주던 신수마저 저 흑표범의 발아래 짓밟혔다. 이 황녀만이 짐승을 제어할 수 있는 마지막 패였다. 이대로 죽여 버리면 저 역시 죽게 되는 것이다.
어찌할 바 모르는 사태가 그를 극도의 당황으로 몰고 갔다. 단검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오토만은 미끄러운 단검을 다시 움켜쥐며 초조한 숨을 내뱉었다.
블론디나는 그가 당황한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손에 곱게 죽어 줄 생각 따위 없어.’
그녀는 오토만 백작을 힘껏 밀쳤다. 흑표범에게만 시선을 두었던 오토만은, 갑작스러운 블론디나의 반항으로 기우뚱 중심을 잃었다.
“이 미친 것이!”
오토만은 비틀거리는 와중에 이를 악물고 단검을 휘둘렀다. 블론디나의 쇄골이 깊게 그여 피가 터져 나왔다.
블론디나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넌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어!”
새까만 짐승이 그를 덮친 건 블론디나의 일갈이 끝난 그 순간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인식할 틈도 없이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이었다.
“으아아악!”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히고 비수 같은 발톱이 꽂히자 오토만은 고통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죽음은 재빠르게 찾아왔고 비명은 곧 멎었다. 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통이 끊겼다.
에이몬은 그를 난폭하게 짓누르며 해소하지 못한 살의로 목을 울렸다. 치미는 분노가 눈동자 위에 불꽃처럼 튀었다.
오토만 백작이 목숨을 잃자 조셉 역시 허물어졌다. 배 속의 마정석으로 서로의 목숨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털썩. 조셉의 몸이 허무하게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난동 부리던 신수 역시 행동을 멈췄다. 광기로 가득했던 눈동자에 지성이 일렁인다.
폭력이 사라진 장소를 오싹한 적막이 채웠다.
샨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가 죽이지 않은 이들이 죽어 있고, 흠뻑 뒤집어쓴 피로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상처투성이인 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에 잠겼다.
제어가 풀린 신수들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비죽 나온 발톱을 숨겼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제국군 역시 검을 내렸다.
침묵을 헤치며 황제와 라르트가 다가왔다. 그들은 곧장 블론디나를 향해 가로질러 오더니 깊디깊은 걱정을 동시에 터뜨렸다.
“괜찮은가. 황녀.”
“블론디나, 괜찮아?”
라르트는 옷을 벗어 블론디나의 상처를 눌렀다. 얼굴이 울 것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전쟁에는 의연했으나, 누이를 지키지 못하고 인질이 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힘겨워하는 것이었다.
황제 역시 초조한 표정으로 제 딸과 아들을 지켜보았다. 둘 다 인질이 된 블론디나를 구하고 싶었으나 신수를 뚫고 가지 못해 발만 구르던 참이었다.
제국군은 혼란한 주변을 정리하며 쓰러진 조셉에게 다가갔다. 그의 목 아래 손을 대 본다. 맥박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 사살을 위해, 곁에 떨어져 있던 라피옌의 검을 들어 그의 몸을 깊게 찔렀다. 그리고 상처 틈으로 빛이 스미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에이몬은 오토만의 숨이 끊어진 것을 느끼자마자 블론디나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작은 몸을 꽉 안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뺨을 비볐다.
“브리디.”
품 안의 온기를 끌어안는 것만이. 따뜻한 숨결을 확인하는 것만이 제 유일한 안식이라는 듯.
“미안해. 다치게 해서는 안 됐는데.”
블론디나의 머리 위로 아픈 목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눈물만 방울방울 흘리며 에이몬을 마주 안았다. 단단한 등에 손을 둘러 따뜻한 온기를 더듬었다. 피 내음 가득한 그의 품에 온몸으로 안겼다.
“에이몬.”
쏟아져 나오는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이렇게 다친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는 왜 날 걱정하는 건데. 제 몸 소중한 줄도 모르고.
마주한 짐승이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분명 절 안은 품이 태산같이 넓음에도, 정작 그에게 안겨 있는 건 자신이었음에도, 그를 안아 다독이고픈 마음이 치밀었다.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인간과 신수를 지키기 위해 버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이기적이었지만 그 사실이 못내 마음 아프게 쓰렸다.
“너나 걱정해. 너나. 넌…….”
원망해서는 안 되나 원망이 터져 나왔다. 상처 입은 그를 마주 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짙은 피비린내가 풍긴다. 하지만 조금의 틈 없이 그에게 안기고 붙들었다.
에이몬은 지쳤는지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초조하게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다가, 비로소 안도했는지 단단히 굳은 긴장을 그제야 풀었다.
블론디나가 찬찬히 몸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에이몬. 너 피가…….”
그에게서 풍기는 피 내음이 다른 이들의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 몸을 흠뻑 적시는 피가 너무도 뜨거워 손끝이 떨려 왔다.
네 거였구나.
블론디나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뺨을 문질렀다. 차마 다른 곳은 손을 대지도 못하겠다. 이 몸 아래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는 건지.
피에 젖은 얼굴로 에이몬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걱정을 알아차린 것이다.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위대한 신수잖아.”
장난스럽게 속삭였지만, 블론디나는 그의 미소를 차마 마주하지조차 못했다.
“어떡해. 이거 어떡해…….”
홀로 모두를 짊어지려 했던 대가는 컸다. 신수의 재생 능력으로도 쉬이 아물지 않는 상처가 깊게 새겨졌다.
“어떡하면 좋아…….”
블론디나는 괜히 에이몬의 옷자락만 더듬었다. 오토만에게 그였던 작은 생채기조차 이토록 아픈데, 넌.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찬찬히 젖었다. 뜨겁게 차오른 열기가 고여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 정말 괜찮아, 브리디.”
에이몬이 홀로 우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그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에이몬의 벌어진 상처가 닿아 아파할까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에이몬은 그녀의 거부에도 다시 두 팔을 벌려 막무가내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다시 안아 줘. 응?”
응석부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애원마저 담겨 있었다.
블론디나는 차마 두 번 밀어내지 못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저 역시 조심스럽게 팔을 벌려 그를 가득 안았다.
“에이몬. 에이몬.”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애절한 그녀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
블론디나의 몸이 휘청거리며 허물어졌다.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이었다. 제 몸을 관통한 고통으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녀는 천천히 무너졌다.
시선을 내려 가슴팍을 응시했다. 피로 물들기 시작한 드레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죽이 머리를 내민 창끝.
“다 기억났어! 네놈들! 날 기만하고 죽였던 네놈들이 모조리!”
등 뒤에서 악독한 목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에게 창을 찔러 넣은 조셉의 목소리였다.
호흡이 끊긴 채 죽어 있던 조셉. 그의 가슴팍에 라피옌의 검이 꽂혔다. 확인 사살을 위하여 기사가 찔러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을 위한 행위가 오히려 생명을 몰고 왔다. 검에서 흐른 신력이 상처를 봉합하고 새로운 피를 돌게 한 것이다.
새로운 숨결이 깃들자, 가까스로 눈을 뜬 조셉은 기억해 냈다. 아주 머나먼 과거. 라피옌의 배신. 그리고 바라한이었던 저의 죽음까지 모두.
조셉은 블론디나의 등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에이몬의 품에서 무너지는 그녀를 보고는 달뜬 희열을 내뱉었다.
악독한 환희가 진득하게 밀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저들을 완벽히 끝장낼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 된 라피옌과, 상처투성이가 된 흑표범. 그 둘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악에 받친 미소가 흘렀다.
배 속의 마정석도, 인간의 몸으로 입은 상처도, 진정한 힘을 되찾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너희가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
바라한은 격렬하게 웃었다. 윤회의 굴레에 갇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피워 낸 증오의 씨앗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비로소 완성된 승리였다.
에이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제 품에 허물어지는 블론디나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브리디……?”
블론디나의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려 있는지. 왜 이렇게 힘없이 늘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블론디나!”
“저자를 포박하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라르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에이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머리를 거세게 내리친 것 같은 고통이 인다.
“브리디.”
에이몬은 그녀의 이름을 쥐어짜듯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떨리는 그녀의 뺨을 더듬었다. 아직은 따뜻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은 끝끝내 입을 열리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죽은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뛰었다. 한기가 일어 몸이 떨린다. 무언가 제 멱살을 잡아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