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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97화 (97/121)

# 97

#97화

“신수의 수장을 도와 신수를 제압한다! 신수를 죽여서도, 그대들이 죽어서도 안 된다! 모두 전열을 갖추라!”

제국군을 향해 명한 황제는, 그 이후 저 역시 직접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수의 수장이 신수를 제압하면 그물을 던져 포박한다!”

전장을 뛰며 외치는 단장의 말에 기사들은 검을 버리고 볼라를 움켜쥐었다.

에이몬은 샨티의 목덜미를 꽉 짓누르던 발을 치우고 몸을 물렸다. 곧바로 그물이 날아들어 샨티의 몸을 겹겹이 뒤덮기 시작했다.

크와앙! 에이몬은 발광하는 샨티를 뒤로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는 다른 신수들을 향하여.

“저 흑표범을 죽여! 저 짐승부터 죽이란 말이야!”

악다구니를 쓰는 오토만 백작의 눈빛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늘 침착했던 사내 역시 막다른 길에 몰리자 태도가 놀랍도록 달라졌다. 벗겨 낸 껍질 안, 추한 알맹이가 낱낱이 드러난다.

지금이 아마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이 전투 끝에 갈림길이 있었다.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인지. 단두대의 제물이 될 것인지를 결정할.

차근차근 잘 나아가고 있었다. 모든 게 순탄하다고 여겼다. 아델라이를 황제 자리에 올린 후, 결국은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게 어그러지려 하고 있었다. 바로, 저 새까만 짐승 때문에. 저 흑표범만 없었더라면!

조셉이 급히 물었다.

“시, 신수 모두를 움직여 저 흑표범을 한꺼번에 공격할까요?”

“그래! 모두 동원해! 우선 저 짐승부터 죽이고 제국군을 처리해라!”

조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토만의 명에 따라 모든 신수를 한쪽으로 몰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신수들이 표범 한 마리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목표는 에이몬. 인간과 함께 신수를 하나씩 제압하고 있는 그들의 수장이었다.

크르륵……. 에이몬에게 목덜미를 물린 신수의 몸이 늘어졌다. 신수는 발악하며 뒤틀었으나 제 몸을 꽉 누르며 이를 박아 오는 에이몬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발톱을 휘두르며 바닥을 긁다가 결국 기절하고야 말았다.

에이몬은, 경직됐던 신수의 근육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제야 피에 젖은 머리를 들었다.

「안전하게 포박한 후 당장 치료해.」

그리고 인간들을 향해 뒤처리를 맡긴 후 다시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신수를 제압하기 위하여.

이미 그의 몸에는 상처가 빼곡했다.

신수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제 몸을 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반항하며 발톱을 휘두르는 신수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며 하나하나 기절시켜야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몬의 두꺼운 가죽 위에 생채기가 늘었다.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상처 틈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 우아하게 빛나던 까만 털이 뜨거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에이몬은 격한 숨을 삼키고는 날뛰는 신수를 덮쳐 바닥을 굴렀다.

아래 깔린 갈색 표범이 곧 끄르륵거리는 신음과 함께 늘어지기 시작했다. 에이몬은 곧 그를 짓누른 몸에서 힘을 뺐다.

호흡을 갈무리하며 몸을 물리는데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제게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신수가 보였다.

에이몬은 주위에 있는 인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제국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그로부터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에이몬의 뒤로 갈색 표범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짝 쫓아 달렸다.

인간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검을 움켜쥐었다.

전장에서 떨어진 공터. 맹수들이 얽히고 겹쳐져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한쪽이 몹시 불리했다. 여럿이 하나를 향해 달려드는 일방적인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몬은 제게 달려든 신수를 거세게 내리쳤다. 발톱은 숨겼으나 묵직한 타격에 충격을 입었는지 신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셉의 제어를 받아 다시 벌떡 일어났다.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쓰러지면 일어서고 멀어지면 달려들었다.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졌다.

인간들은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가까스로 다가갔다. 흑표범을 도와 신수를 제압해야 했는데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 다리 한쪽을 물고 늘어진 신수를 내치며, 에이몬이 포효하듯 외쳤다.

「모두 물러서!」

신수와 신수의 싸움이었다. 인간이 끼어들어 보았자 맞이할 건 개죽음뿐이다. 인간까지 보호하며 싸울 여유 따위, 에이몬에게는 없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오히려 수장님께 방해가 될 뿐이다!”

황제가 큰 목소리로 명하며 제국군의 전열을 뒤로 물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한다. 에이몬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다면, 그때엔 신수들의 목숨을 상관하지 않고 일시에 그들을 공격할 참이었다.

에이몬은 홀로 신수 사이를 누볐다. 절 노리고 달려드는 표범의 목덜미를 물고 내던졌다. 한꺼번에 달려드는 신수를 짓뭉개며 밟았다. 핏물이 흘러내려 눈앞이 흐릿했다.

신수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에이몬과, 조셉에게 제어당해 이성을 잃은 신수 사이의 전투는 참혹했다.

지키려는 자와 해치려는 자. 그들 사이의 전투가 누구에게 불리할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나올 답이었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에이몬의 상처가 늘었다. 땅을 디뎌 도약할 때마다 흘러내린 피가 땅 위에 붉은 길을 만들었다.

제게 달라붙은 신수들과 뒹굴던 에이몬은 모두를 던져 놓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르렁-! 날카로운 포효가 진동하며 공간을 휘감았다. 그 속에 폭력적인 경고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셉의 조종을 받는 신수조차 움찔하여 단단히 굳었다.

에이몬은 상처 입은 몸으로 우뚝 서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간신히 억누른다. 강인한 턱 아래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토만 백작은 겁에 질린 얼굴로 조셉을 다그쳤다.

“어찌하여 흑표범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진정 끝이 오게 생겼다. 권력의 꽃 한번 피워 보지 못하고 장렬히 사그라지는 것이다. 초라한 잿더미만 남긴 채.

조셉 역시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수를 조종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이후는 그들의 몫입니다!”

조셉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황궁으로 끌려와 고귀하신 놈들의 명을 착하게 받들었을 뿐이다.

저 흑표범이 신수를 모두 제압하면 자신들을 지켜 줄 방패막이가 사라진다. 그리하면 닥칠 건 죽음이었다. 감히 황궁을 침략한 죄. 몸이 백 갈래로 찢어져 던져질 것이다.

조셉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으악!”

그리고 곧 깜짝 놀라 검에서 손바닥을 떨어뜨렸다. 검 자루가 진동하는가 싶더니 하얀 빛이 손목을 타고 올랐기 때문이다.

“뭐, 뭐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세포 하나하나를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불쾌한 기운이 흘렀다.

라피옌의 검은 홀로 울었다. 마치 조셉에게 명하듯 제 몸을 떨며 빛을 내었다.

조셉은 왜인지 그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곧 오토만 백작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신수 하나를 대동하여 그림자처럼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에이몬과 맞붙은 신수에게는 광적인 폭력성만을 심어 놓은 채.

조셉은 전에 없이 차분한 얼굴로 혼란 속을 걸었다. 짓눌린 꽃과 부서진 건물 잔해를 밟으며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검이 절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다.

어딘가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검은 더욱 거세게 몸을 떨었다. 마치 생명을 지닌 듯 애처롭게 울고 빛을 발했다.

이윽고 조셉이 도착한 곳은 작은 건물이었다.

실내 정원만 있는 곳이라 텅 비어 있을 텐데, 제국군이 주위를 첩첩이 둘러싸고 있었다. 조셉은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신수에게 명했다.

“모두 죽여라.”

말이 끝나자마자 날쌘 몸이 그의 옆을 스쳤다. 그 뒤 갑옷 우그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산발적으로 터지는가 싶더니 곧 침묵만이 남았다.

조셉은 핏물을 밟으며 홀린 것처럼 걸었다. 뚜벅뚜벅.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새빨간 발자국이 이어졌다.

그는 서늘한 고요를 찢으며 안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제국군을 물어 죽이게 한 후,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안에는 황궁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그녀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조셉을 응시했다.

조셉이 움켜쥔 검이 더욱 크게 떨렸다.

여인들 중 하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은 무어냐.”

여인들을 다독이며 당당히 선 이는 블론디나였다. 전투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황궁 여인들과 함께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터였다.

조셉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감을 꿀꺽 삼켰다. 아델라이의 수족이 되어 수없이 보았던 블론디나 황녀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초조함 같기도, 불안 같기도, 미약한 분노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엉망으로 뭉개졌다.

우우웅-. 라피옌의 검은 계속해서 몸을 떨며 빛을 퍼뜨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제 주인, 라피옌을 다시 마주한 환희였다.

이내 조셉은 홀로 결론지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몸을 으슬으슬하게 뒤덮는 이 초조함의 근원이 무언지.

검이 절 주인으로 여겨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이 난관을 극복할 돌파구로 절 이끈 게 분명했다.

조셉은 블론디나를 향해 찬찬히 걸었다. 주둥이에 피를 묻힌 신수 역시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어깨를 쭉 편 블론디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조셉을 마주했다. 속에는 불안함이 차오르더라도 황녀로서 당당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날 찾아온 것인가.”

조셉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웃었다.

자신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검이 안내해 준 것이었다. 눈앞의 황녀가 바로 검이 알려 준 돌파구 아닌가.

그녀는 흑표범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리하여 검이 절 이끈 게 분명했다. 이 여자를 볼모로 함아 흑표범의 숨통을 끊어 놓으라고.

“이 여자를 제외한 모두를 죽여라.”

조셉은 블론디나를 주시하며 신수에게 명했다. 동시에 공포에 젖은 비명이 산발적으로 튀어 나왔다. 하지만 조셉은 곧 명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화병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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