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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96화 (96/121)

# 96

#96화

텅그렁. 신수를 찌르기 위해 높이 치켜세웠던 기사의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이몬의 안광을 마주하자 마치 그 눈빛이 절 꿰뚫는 것만 같아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인간은 마법에 걸린 듯 우뚝 멈추어 섰다.

신수를 공격하려던 인간들은 핏물이 빠져나간 듯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눈만 굴렸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짐승을 제어하던 조셉마저 몸을 굳혔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요동친다. 그건 공포라는 말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손끝에 찌릿한 전기가 튀는 듯했다.

침묵을 뚫고 새까만 짐승이 도약했다. 그는 조각상처럼 굳어 있는 이들을 가로질러 제국군 안으로 어렵지 않게 진입했다.

깜짝 놀란 제국군이 그제야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막아!”

에이몬이 향하는 곳은 제국군의 가장 깊은 곳. 황제가 있는 방향이었다.

“폐하를 보호하라!”

제국군은 검과 창을 휘두르며 에이몬을 향해 마구잡이로 돌진했다.

전장을 누비는 에이몬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제어로 이성을 잃고 막무가내로 날뛰던 신수와 달리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꽉 잡아. 떨어지면 안 돼, 브리디.」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그의 털을 꽉 움켜쥐며 몸을 착 붙였다. 그가 어째서 위험 속을 뛰어드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자신이 믿어야 할 건 그의 말 하나였다.

“폐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해라!”

여기저기서 볼라가 날아들었다. 에이몬은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절 향해 달려든 제국군을 가볍게 후려쳤다.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으악!”

“아읏!”

발톱을 숨긴 앞발에 맞은 제국군이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단단한 철갑옷이 철퇴라도 맞은 듯 움푹 파여 있었다.

블론디나는 뒤돌아 기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후 다시 에이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드는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지금이, 납치를 당했던 상황보다 훨씬 위험했음에도 두려움 하나 치밀지 않았다. 제가 꽉 잡은 짐승이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기에 온몸을 그에게 기댈 뿐이다.

에이몬은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위험을 알아차렸다.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비릿한 피 냄새가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미약하게 들려오는 신수의 울부짖음과 인간의 비명, 인간의 무기와 짐승의 발톱이 마찰하는 소음. 블론디나는 들을 수 없었던, 짐승의 예민한 감각으로 느끼는 혼란함이었다.

그의 본능이 말해 왔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졌어.’

피 냄새를 몰고 온 잔혹하고 잔인한 일이.

황궁 위로 자욱하게 깔린 희뿌연 흙먼지를 응시하며 그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신수의 수장인 이상 저 위험 속으로 당장 뛰어드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제 곁에는 블론디나가 있었다. 생채기조차 나서는 안 되는 소중한 반려.

‘우선 브리디를 숲에 있는 내 저택으로…….’

그녀를 신수의 숲에 숨겨 놓고 갈까 했던 에이몬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별궁을 공격한 건 신수였다. 그 일의 연유도, 정황도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신수의 숲은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블론디나를 홀로 둘 수도, 폐허가 되어 버린 별궁에 데려다 놓을 수도 없는 일. 황궁 구석에 숨겨 놓는다고 하여도 전쟁터로 변해 버린 황궁이 안전할 리 없지 않은가.

고민은 짧았고 판단은 단호했다.

에이몬은 다시 황궁을 향해 훌쩍 도약했다.

그리하여 지금이 됐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황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절 향해 사정없이 날아드는 검과 창을 유연하게 피하며.

“붙잡아!”

“놓치지 마라!”

“황녀님이 계시다! 다치시지 않게 조심해야 해!”

바짝 긴장한 제국군이 온 힘을 다해 막았지만, 결국 에이몬은 제국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창을 치켜든 제국군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그들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황제와 라르트를 비로소 마주했다.

라르트는 검을 움켜쥔 채 고민했다.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앞의 에이몬은 미치광이가 되어 날뛰던 신수들의 왕이다. 그가 자신마저 해칠 것인가. 해치기 위하여 온 것인가.

꿀꺽. 라르트는 긴장을 삼키며 에이몬을 주의 깊게 살폈다. 짐승의 눈빛은 더없이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저 뒤에서 날뛰고 있는 신수와는 달랐다.

날 선 긴장이 흘렀다.

그 긴장이 깨진 건, 누군가 에이몬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바닥을 내디뎠을 때였다.

“공격하지 마, 라르트.”

블론디나의 차분한 만류에 라르트의 검 끝이 슬쩍 내려갔다.

라르트의 옆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황제가 에이몬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에이몬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론디나의 뺨에 제 뺨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넌 여기에 있어, 브리디.」

그리고 곧 황제와 함께 은밀한 대화를 할 곳으로 이동했다.

블론디나는 제 반려와 아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저 멀리서는 여전히 광기에 사로잡힌 신수와 제국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터였다.

“조심해야 해.”

그에게는 닿을 수 없는 걱정이 애처롭게 사그라들었다.

아마도 에이몬은 황제와 이야기를 끝낸 후 다시 저곳을 향해 뛰어들 것이다.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저곳으로.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블론디나. 이리로.”

어느새 다가온 라르트가 떨리는 블론디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안전한 안쪽 장소를 향해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토만 백작은 갈기갈기 갈라진 목소리로 처절하게 외쳤다.

“당장 저 흑표범을 제어해! 짐승 앞에 선 황족을 모조리 죽여 버리란 말이야!”

에이몬이 종횡무진 제국군 안을 누빌 때부터 명했다. 어서 저 신수를 조종하여 끝장을 내라고.

하지만 조셉은 끙끙거리며 식은땀만 흘렸다. 온 힘을 집중해도 저 새까만 신수의 수염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 무도회장에서 제어하지 못했던 건 우연이라 생각했는데 우연이 아니었던 걸까.

“힘이 통하지 않습니다, 백작님!”

초조한 얼굴로 검만 만지작거렸다. 이 미지의 검을 얻은 후, 제 몸에서 샘솟는 힘을 통제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 신수 수장에게는 이 위대한 힘이 도통 통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벽에 마주한 것만 같이.

“신수들이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급했기에, 황제는 에이몬을 향해 곧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에이몬을 적이 아닌 제 편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 황궁을 침략하여 제국군을 죽이고 있습니다.”

에이몬 역시 진작 눈치챈 일이었다. 일의 연유와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언뜻 마주한 신수들의 기운이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황제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위엄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인간의 왕으로서 청합니다. 부디 살육을 멈추어 주십시오.”

황제는 판단했다.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열쇠는 에이몬이 쥐고 있으리라고.

과거가 말해 오지 않는가. 흑표범은 바라한의 후예에게 제어 당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의 힘이 꼭 필요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일으킨 ‘바라한의 후예’를 반드시 죽여 주십시오.”

분노와 뒤섞인 격한 감정을 황제는 어금니로 짓씹었다.

아델라이가 몰고 온 죄악. 바라한의 후예가 황궁을 침략하고 부수었다. 제 백성을 죽이고 감히 위대한 황권에 생채기를 냈다.

황제의 청에, 에이몬은 간단한 문장을 내뱉고는 뒤돌았다.

「브리디를 꼭 지켜 줘야 해.」

그리고 무자비한 전투지를 향해 그대로 뛰어들었다.

알 수 없는 격분이 에이몬의 몸을 관통했다.

‘바라한의 후예를 반드시 죽여 주십시오.’

황제가 청하지 않았어도 반드시 그리할 생각이었다.

바라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이 발산되는 적의.

황궁은 참혹했다. 에이몬은 죽은 인간의 텅 빈 동공에서 시선을 돌려 참담하고 잔인한 모습을 마주했다. 말라붙은 피가 엉겨 있는 시체가 보인다.

블론디나와의 결혼을 이야기하며 꿈꾸었던 모습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몸 안에 휘도는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 냄새와 무자비한 전투 내음이 감각을 거칠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짐승의 본능이 일었다. 호흡에 차츰 열기가 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이몬은 충동을 억누른 후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제국군을 헤집으며 포효하는 신수를 살핀다. 그들의 눈동자에 깃든 이질적인 기운이 보였다. 만신창이로 우겨진 이성. 본능만이 가득 차 미쳐 날뛰고 있었다.

에이몬은 곧 한 신수를 향해 빠르게 도약했다.

기사를 향해 포악하게 달려들고 있는 샨티를 등 뒤에서 그대로 덮친다. 두 짐승이 얽히고 굴러 흙먼지가 일었다. 커다란 송곳니가 박히자, 샨티는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샨티, 정신 차려.」

「크르르르…….」

상대가 이성을 잃었기에 오히려 제압이 쉬웠다. 샨티가 그보다 약하다고는 하나 평소 같았다면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을 것이다.

에이몬은 샨티의 목덜미를 물어 날뛰며 몸부림치는 움직임을 봉쇄했다. 일반 짐승이었다면 숨통이 끊겼을 것이나 신수인 이상 죽지는 않을 터.

샨티의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에이몬의 단단한 살가죽에 생채기가 그였다. 하지만 에이몬은 비키지 않았다.

샨티를 짓누르며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는 일이다. 이성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샨티는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기에.

제어 당하는 신수의 편에 서서 죄 없는 인간을 죽일 수도. 그렇다고 제 가족과 같은 신수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에이몬은 자신이 신수를 직접 제압하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다.

두 짐승을 둘러싼 제국군은 당황했다.

두 짐승을 공격해야 하는지. 저 흑표범은 왜 같은 편을 공격하여 짓누르는 것인지. 제 편인지 적인지 알 수 없어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그때 저 멀리 커다란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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