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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79화 (79/121)

# 79

#79화

블론디나는 어쩔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누가 누구인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아무튼, 잘했어. 잘 참았어, 에이몬. 내 고양이 잘 컸네.”

커다란 청년을 올려다보며 아이에게 말하듯 칭찬했다. 이건 정말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어릴 적 에이몬이었다면 오히려 본인이 먼저 난동을 피웠을 것이다.

경박한 짐승이라니? 후작의 다리 하나쯤은 분명 없어졌겠지. 애초에 에이몬은 절제와 인내라는 걸 모르고 본능대로만 살아온 짐승이었으니. 하지만 오늘은 아주 의젓하게 잘 참았다.

앙칼진 아기 고양이를 훌륭하게 키워 낸 것만 같아 블론디나는 몹시 뿌듯해졌다.

에이몬은 ‘잘 컸다’라는 블론디나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은 곧 사람들 틈에 자리 잡았다.

제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에이몬의 손을 느끼며 블론디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춤추려고?”

“응. 황자 손잡고 배운 거 써먹어야지.”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바로 지금을 위해 라르트와 그토록 손을 맞잡고 춤을 추지 않았나.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따라 움직이며 떠올렸다. 서로를 외면하며 움직이던 에이몬과 라르트의 데면데면했던 모습을. 절로 웃음이 나는 회상이었다.

둘은 미뉴에트 선율에 맞춰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깔리는 오후의 빛. 저녁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잔디를 밟을 때마다 싱그러운 향이 피어오른다.

블론디나는 왜인지 자꾸 긴장이 됐다. 마주 잡은 손에 열기가 고이고, 그의 손바닥이 닿은 허리가 근질거렸다.

‘왜지. 왜 이렇게 기분이…….’

절 바라보는 에이몬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괜히 시선을 내렸다.

주위에 있던 인간들은 힐끔힐끔 에이몬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가 인간으로 변했을 때부터. 얼굴을 내보이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길 때부터 이미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짙은 흑발과 그사이 선연히 빛나는 눈동자. 정성을 다해 빚은 도자기처럼 우아하면서도 날것의 생기가 느껴지는 외모다.

사냥터에서 흑표범을 본 적은 있어도, 인간형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귀족들은 모두 그를 훔쳐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뒤돌아 훔쳐볼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으나 외모보다 더욱 시선을 끄는 건 특유의 분위기였다. 눈빛에 깊게 새겨진 오만함. ‘숲을 지배하는 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위압감.

주위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론디나와 에이몬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이제 인간이라고 해도 믿겠어.”

블론디나가 달뜬 숨을 뱉으며 웃자 에이몬 역시 나직하게 답했다.

“널 위해서라면 백번 천번이고 인간인 척할 수 있어.”

그는 블론디나의 손을 맞잡고. 작은 몸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남몰래 힐끔거리는 인간을 지나 장미 덤불을 스쳤다.

블론디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새하얀 천사 석상 근처였다. 그곳은 정원 외곽으로 춤추는 이보다는 담소를 나누는 이가 더욱 많은 장소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허리를 붙들고는 가볍게 쑥 들어 올렸다. 그리고 높다란 조각상 난간 위에 훌쩍 앉혔다.

블론디나는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가 에이몬을 톡톡 두드렸다.

“내려 줘, 에이몬.”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에이몬의 손에 휙휙 움직이니 정말 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높은 난간에 앉았음에도 여전히 눈높이는 에이몬보다 낮았다. 시선을 들어 그를 슬쩍 올려다본다. 해를 등지고 선 에이몬의 형체가 오늘따라 더욱 단단하고 듬직하게 느껴졌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양옆 난간을 가만히 짚었다.

블론디나의 머리 위로 어둑하게 그림자가 졌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블론디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여기는 왜 앉혔-.”

하지만 목소리는 이내 끊겼다. 블론디나의 몸을 덮었던 그림자가 그녀를 그대로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고개를 내린 에이몬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는 움찔 몸을 굳혔다. 사고처럼 들이닥친 키스로 머리가 하얗게 정지됐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을 뿐이다.

주위에서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이 숨을 들이켰다. 화기애애하게 오가던 대화마저 멎었다.

에이몬의 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겹쳐진 두 몸이 하는 행위를 모두 눈치챘다. 차마 반응할 수 없어 모른 척 눈을 굴렸을 뿐이다.

황녀님께서? 신수님께서? 저 두 분이?!

인간들의 당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블론디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입술 틈을 빨아 당기던 에이몬이 더욱 몸을 내리며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달래듯 허리를 슬슬 매만지는데,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숨을 흘리느라 벌어진 틈을, 에이몬은 놓치지 않았다. 곧 혀가 부드럽게 들어와 그녀 안을 달래듯 헤집기 시작했다.

“음…….”

블론디나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서로의 것이 아주 천천히, 다정하게 감길 때마다 몸이 녹아들었다.

에이몬답지 않은 느릿한 입맞춤에 자꾸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귓가에 감기는 미뉴에트가 나지막하게 잦아들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아늑하게 품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품에 갇혀 발끝을 움츠렸다. 뜨거운 살덩이가 얽힐 때마다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아랫배를 타고 올랐다.

황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블론디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은 채, 제 숨결을 헤집는 그를 받아들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턱을 살며시 잡아끌어 깊숙이 저를 밀어 넣었다. 뜨겁게 젖은 혀가 맞붙어 엉켰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고갯짓에 따라 둘의 얼굴이 겹쳐졌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꿈같은 시간도 잠시. 주위에 울리던 음악이 바뀌자, 블론디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몽롱하게 잠긴 머리가 확 밝아졌다. 한번 정신이 들자 그 뒤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은밀하고도 민망한 모습을 만인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에이몬, 정말 미쳤나 봐!’

블론디나는 그에게서 얼굴을 훌쩍 떨어뜨렸다. 하지만 다시 달라붙는 에이몬에 의해 멀어지던 혀가 다시 엉기고 입술이 다시 붙었다.

블론디나는 제 입술을 빨아당기는 그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읏.”

그만하라는 말마저 그에게 모조리 삼켜졌다. 블론디나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맞닿아 있는 에이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곧 입술을 맞대고 웃던 에이몬이 찬찬히 얼굴을 떨어뜨렸다.

엉켰던 살덩이가 풀리고 맞물렸던 숨결이 멀어졌다. 블론디나의 입술 틈으로 가쁜 숨이 샜다. 물리고 빨려 통통하게 부푼 입술 색만큼 그녀의 두 뺨 역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블론디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모두에게 알린 거야. 넌 내 거라고.”

“뭐?”

블론디나의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뱉는 에이몬의 대답은 태평하게만 들렸다. 블론디나는 어이가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인간들에게 네가 내 거란 걸 알리려면 이럴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이건 좀, 좀, 그렇잖아.”

“귀족 놈들이 널 호시탐탐 훔쳐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몽땅…….”

에이몬은 말을 멈췄다.

분명 블론디나가 제 눈에만 예쁜 건 아닐 터다. 심지어 저는 짐승, 블론디나는 인간인데, 인간들이 같은 종족이랍시고 진득한 시선을 보내올 때마다 심기가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말할 수 없기에 홀로 끙끙 앓는 수밖에.

블론디나가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에이몬은 다시 얼굴을 내렸다. 이번에는 키스 대신, 그녀의 귓가에 제 뺨을 비비며 응석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부끄러워, 브리디?”

“아니, 그게…….”

블론디나는 말끝을 흐렸다. 정신이 없어 답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에이몬은 부끄럽지 않았다. 이 훤칠하고도 잘생긴 미청년이 어떻게 부끄러울쏘냐. 부끄러운 건 에이몬이 아닌 에이몬이 한 행동이었다.

남들이 다 있는 곳에서, 보란 듯이. 그것도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싫었어?”

에이몬이 가만히 속삭였다. 블론디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제 귓가를 슬며시 무는 그의 입술이 마치 절 달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에이몬이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나.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당당한 게 에이몬의 특기인지라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는데, 이런 순간마다 놀라게 되니 그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블론디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에이몬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늘 절 한없이 품어 주는, 제 세상을 한가득 채워 주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등은 단단했다. 귓가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는 했으나 어쩌겠는가. 이미 해버린 키스였고 모든 일은 다 벌어진 뒤인데.

이런 일에 하나하나 놀라기엔 에이몬을 알아 온 시간이 너무도 길다. 이미 적응할 대로 적응해 버린 뒤라는 뜻이다.

‘폐하께서 이 무슨 경박한 행동이냐고 타박하며 내쫓으시면 에이몬네 집으로 가버리지, 뭐. 어차피 폐하께서도 나 주워 오신 거잖아.’

대책 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블론디나는 웃었다.

뭐 어때. 진짜 나가라면 나가면 되는 거지.

그의 듬직한 몸이 새삼스레 믿음직스럽다. 귓가를 스치는 입술이 따뜻했다. 절 안락하게 품는 가슴에 모조리 기대고 싶을 뿐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착석했을 땐 모두가 가면을 벗은 뒤였다.

귀족들 사이에 소리 없는 의문이 출렁거렸다. 블론디나가 착석한 위치 때문이었다.

고귀하신 분들의 식사는 그냥 식사가 아니다. 식사 좌석 배치를 통해 곧 그들의 권력과 지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앉은 자리 위치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한 것이었는데.

‘난 왜 여기 앉아 있지.’

블론디나는 테이블 아래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을 마셨다. 살짝 들린 턱과 담담한 눈빛은 무척이나 태연해 보였지만, 실상 매우 당황하는 중이었다.

황족이 아닌 신수와 섞여 앉아 있는 탓이다. 그것도 에이몬 바로 옆에.

귀족은 알게 모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바로 전, 블론디나와 에이몬의 행위는 이미 만천하에 소문이 났다.

곁에 있던 귀족들은 그들의 은밀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에이몬에게 폭 안겨 있는 블론디나와 그녀에게 몸을 바짝 붙인 에이몬이 무엇을 하는지는 쉽게 유추해 냈다.

에이몬과 블론디나가 자리를 떠난 후. 남겨진 그들은 입방아를 찧어 댔다.

“보셨나요, 백작님?”

“봤습니다, 영애!”

“그게 그 의미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어머나.”

어머어머 하며 볼을 발갛게 물들이던 영애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처에 있던 친구에게 빠르게 뛰어갔다. 뒤이어 어머, 꺄아, 하는 탄성이 정원 안을 돌림 노래처럼 돌았다.

확연하게 드러난 사이였다. 몸으로 손수 보여 주는 과시였다.

황제 역시 별다른 참견 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면 황족 사이에 이미 알음알음 퍼져 있는 관계가 분명했다.

신수와 황족의 만남이라니. 유례없이 사교계를 관통하는 큰일인 것이다.

그러한 경위로, 블론디나가 에이몬 곁에 있는 이 상황을 귀족들은 무척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황제가 만찬사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잔을 들었다. 모두 그를 향해 집중하며 눈을 빛냈다. 혹여 오늘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화제를 언급하지는 않을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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