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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78화 (78/121)

# 78

#78화

조금 전.

소동이 벌어졌을 때 아델라이는 알아차렸다. 지금이 바로 신수를 이용하여 사건을 벌이기에 알맞은 시간이라는 것을.

만찬 자리에 앉았을 때 시행하려 했다. 신수를 조종하여 인간을 해친 후 황제에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보세요, 폐하. 짐승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신수가 먼저 움직여 주었다. 이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만 남았다.

아델라이는 조셉에게 공격을 명했고 조셉은 신실히 따랐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 샨티를 조종해 후작을 죽인 후, 곁에 있는 에이몬까지 공격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그리하여 이루고 싶었다. 신수를 조종하여 제 권력을 얻기를. 인간이 평화라는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기를.

샨티는 조셉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후작을 향해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삐죽 나온 발톱이 억세다. 아마 후작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리라.

하지만 샨티의 공격은 미수에 그쳤다. 낌새를 알아챈 에이몬이 샨티를 쏜살같이 덮쳤기 때문이다.

두 짐승이 난폭하게 바닥을 굴렀다. 푸릇한 잔디가 먼지처럼 날린다. 치명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샨티의 두꺼운 살가죽을 물어 버린 에이몬이 그르렁거리며 말했다.

「샨티.」

나직이 불러 오는 이름 안에 명령이 담겼다.

장난은 여기까지야.

샨티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과 짓궂은 일탈로 여긴 에이몬의 경고였다.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던 샨티였으니 에이몬의 오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어가 힘에 부치는지 조셉의 이마 위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렀다. 머지않아 샨티의 제어가 탁 풀렸다.

「엉……?」

의식을 되찾은 샨티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지금 사태가 영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후작을 위협하며 놀고 있었는데 왜 에이몬에게 깔려 있지?

하지만 고민도 잠시. 에이몬의 앞발을 툭툭 두드리며 항복했다는 듯 몸을 늘어뜨렸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에이몬이 그제야 힘을 풀었다.

샨티는 후다닥 몸을 비켜 세웠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절 펑펑 내리치기 시작한 할라의 손에 맞으며 깨갱 몸을 움츠렸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진짜 죽이려고 그러고 있어?!”

「아! 아파! 잘못했어!」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 여자인 할라에게 맞으며, 커다란 짐승은 꼬리만 들썩였다. 뭔가 억울하기는 한데, 어쨌든 본인이 벌인 일이라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인간을 덮쳤던 건 겁만 주기 위함이었다. 죽이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샨티 자신이 아무리 천방지축이라고는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않은가.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려 보니 에이몬에게 숨통이 눌린 뒤였다.

잠시 고민하던 샨티는 이내 생각을 털어 냈다.

‘아무래도 내가 본능에 취한 모양이지?’

신수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짐승. 아무래도 나 몰래 본능이라도 발동한 건가 보다……라고 홀로 결론지은 것이다.

한편, 황제는 에이몬을 향해 찬찬히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벌벌 떠는 후작을 한심한 듯 내려다보다가 에이몬을 향해 부드럽게 허락을 구했다.

“제가 후작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에이몬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하얗게 질려 있는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도미네 후작.”

“예, 예, 폐하.”

간신히 답하며 후작은 황제를 향해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누워 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켜 그 앞에 간청하듯 허리 숙여 조아렸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는 황제의 눈동자는 무감각하기만 했다.

“짐은 인간을 보호하고, 내 백성인 널 품어 주어야 할 황제다.”

황제의 말에, 후작은 언뜻 기대했다. 신수의 편이 아닌, 인간의 편이라는 발언에 깊이 안도한 것이다.

“내 백성인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난 다시 신수와 척을 질 수도 있다. 신수의 발톱 아래 피를 흘리게 되더라도 검을 들고 다시 싸울 것이야, 바로 널 위해.”

고조 없는 목소리가 희망에 젖어 가는 후작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단, 네 행동이 정당하였을 경우. 그러니 고하라. 네가 신수님 발아래 눌려 있던 이유를.”

후작의 얼굴에서 다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눈알을 정신없이 굴리며 사건의 경위를 떠올렸다. 단순한 일이었다. 본인이 신수를 향해 경박하게 입을 놀렸고, 그에 분노한 짐승이 절 덮쳤을 뿐이다.

저 멀리 있던 신수가 어찌 알아들은 건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제 처분이었다.

지금 황제는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았을 경우, 무시무시한 책임을 지우겠다고. 그 사실이 두려워 후작은 입 하나 벙긋할 수 없었다.

굳은 침묵이 휘돌았다. 모두 긴장을 꼴깍 삼켰다. 빤히 보이는 사건이었다. 이제 이 일이 어찌 마무리될는지.

하지만 침묵을 깨고 일을 마무리 지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먼저 일을 벌였던 샨티였다.

할라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던 샨티가 후작의 옷을 발톱에 걸고 휙 내던졌다. 후작은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러 테이블 아래 구겨지듯 처박혔다.

「난 이제 괜찮으니 이 인간은 무시하고 파티나 계속했으면 좋겠는데.」

바닥을 뒹구는 후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샨티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변하더니 후작을 지나쳐 퐁뒤 냄비를 향해 걸어갔다.

꼬챙이를 들어 빵을 끼운 샨티가 그것을 퐁뒤 냄비 안에 넣고 휘휘 저었다. 모두 말없이 샨티를 지켜만 봤다. 더없이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얼굴로, 샨티는 빵을 먹었다.

“괜히 인간 건드렸다가 에이몬에게 맞고, 할라에게 맞고. 난 이거나 먹으련다…….”

억울함 섞인 목소리가 흐트러진다.

인간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황제가 도미네 후작을 향해 다가섰다. 후작은 땅을 두 손으로 짚고는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작의 머리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 일의 경위는 차근차근 묻도록 하겠다. 후작은 자택으로 돌아가 쉬도록.”

배려같이 들렸으나 명백한 퇴출이었다.

그것이 사교계에서, 권력에서 멀어지는 경고임을 알기에 백작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쉽게 입을 놀린 죄가 너무도 컸다.

기실 자신 말고도 짐승을 비웃은 이는 많지 않은가. 어찌하여 나만. 억울하고 또 억울했으나 이 자리에서 억울함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터덜터덜, 후작이 떠난 후, 황제는 에이몬을 향해 고개 숙이며 눈빛을 보냈다. 좋은 날이니 이쯤에서 넘어가 달라는 의미였다.

에이몬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켜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몸짓으로 말하는 긍정이었다. 사실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샨티가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충분했다.

상황이 대충 마무리됐다. 황제는 뒤에 있던 시종에게 눈짓했다.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시종이 음악단을 향해 손짓하자 침묵만 가득하던 공간 안에 음악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긴장이 슬슬 풀려간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인파 사이를 걸으며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멍청한 것 같으니.’

후작을 향한 분노가 거세게 일었다.

겨우 마련한 자리가 하마터면 멍청한 후작에 의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힘들게 쌓은 신수와의 관계가 그대로 뭉그러질 수도 있던 것이다.

앞으로 후작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돌아갈 터였다.

한편, 분노로 열띤 눈동자를 보이는 건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델라이가 표독한 얼굴로 오토만 백작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어찌하여 후작을 죽이지 못한 것인지!

눈으로 보내는 질타에도 오토만 백작은 동요 하나 없었다.

“황녀님. 다른 이들이 봅니다.”

“설명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그는 대답 대신 고개 돌려 조셉을 질타했다.

“조셉. 중간에 왜 힘을 거두었지?”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샨티가 후작을 죽었어야 했다.

아델라이와 오토만. 둘의 서릿발 같은 시선을 받으며 조셉은 당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변명했다.

“분명 저 갈색 표범을 움직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데 저 새까만 짐승 놈이 움직이자마자 제어가 힘들어져…….”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태도가 축 늘어져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오토만이 아델라이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진행했던 일이라 부족함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황녀님.”

그러고는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 흑표범은 몇백 년 전에도…….”

하지만 이런 곳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아델라이는 그의 뜻을 알아채고는 등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사뿐사뿐 잔디를 밟으며 그녀는 떠올렸다.

오백 년 전, 바라한의 후예가 나타났을 때 흑표범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결국 그 짐승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다시 바라한의 후예가 나타난 현재. 당연한 듯 나타난 저 흑표범.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발걸음이 느려진 그녀는 이내 다시 성큼 걸었다.

짐짓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발치를 응시하던 아델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길 거야. 그리되고말고.’

무도회가 파하면 은밀한 작당이 계속될 터였다. 아델라이의 눈빛 속에 새파랗게 반질거리는 악의가 차올랐다.

나뒹구는 가면을 들고,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향해 걸었다.

아까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는 금세 말랑해져 있었다.

샨티는 여전히 퐁뒤 주위를 서성이며 킁킁거렸고 황제는 보란 듯이 황후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귀족들 역시 분위기에 따라 하나둘 모여 춤을 추거나 담소를 나눴다.

다시 평화로운 피타가 이어진 것이다.

“에이몬. 샨티는 왜 화를 냈던 거야?”

에이몬의 콧등을 문지르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꼬리만 슬렁슬렁 흔들던 에이몬이 몸을 일으켜 곧 인간으로 변했다.

“경박한 짐승이라고 말하며 무시하기에.”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건네는 가면을 내려다보더니 심드렁히 던졌다. 그러고는 블론디나가 쓴 가면마저 벗겨 버린 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내던졌다.

“난 이거 말고 네 얼굴을 보고 싶어.”

텅그렁, 가면 두 개가 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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