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만약 그때 잘못됐다면, 블론디나는 차가운 물 속에 깊게 가라앉았겠지. 얼음 아래 갇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저만 남겨 둔 채 홀로 영영 떠났을 터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조였다. 얼음송곳이 가슴을 찔러 대는 것 같은 통각이 아릿하게 퍼졌다.
블론디나는 이전의 사고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듯 한없이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고마워, 에이몬.”
블론디나의 얼굴을 마주하자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에이몬의 두려움과 초조함이 녹아들었다.
에이몬은 팔을 뻗어 블론디나를 쭉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몸을 꽉 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그녀는 듣지 못하게 마음속으로 호소하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느릿하게 정상궤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 등을 깔고 누운 마제또가 톡! 몸을 일으켰다.
“에이몬 님이 내 목숨 구해 주셨으니까 나도 나중에 꼭 구해 줄게요!”
다시 진지했던 상황이 가벼워졌다. 에이몬의 가슴팍에서 블론디나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손바닥으로 에이몬의 가슴을 쭉 밀더니 고개 돌려 마제또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마제또도 나 구해 주려고 애썼잖아. 고마워, 마제또.”
“블론디나 님 죽는 줄 알았다고욧……! 너무 무서웠어!”
몸을 온전히 돌린 블론디나가 손을 뻗어 마제또의 배를 톡톡 두드렸다.
마제또는 다시 짹짹짹, 노래하듯 지저귄 후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바닥에 뒤통수와 머리를 댄 채 무척이나 편하게.
‘아무리 보아도 저건 참새가 할 자세는 아닌 것 같은데.’
통통하게 볼록 나온 배가 귀엽기 그지없다.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맞닿아 왔다. 에이몬이 다시 다가와 뒤에서 끌어안아 온 것이다. 뜨거운 체온이 다시 겹쳐지고 아릿한 숨이 목덜미에 흘렀다.
떨어지면 달라붙고 멀어지면 끌어당겼다. 아기새가 엄마 새를 쫓기 위해 안간힘을 쓰듯, 에이몬은 도통 블론디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에이몬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했기에, 블론디나는 절 단단히 휘감은 그의 팔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자신만 해도 에이몬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잃었다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거다.
간신히 눈을 뜬 그를 다시 잃을세라 온종일 끌어안고 달라붙었겠지. 불안해서. 무서워서.
나무 서랍에서 대충 꺼내 입은 커다란 튜닉 아래, 커다란 손이 슬슬 들어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이 블론디나의 아랫배를 느릿하게 문지르다가 허리를 타고 오르더니 은밀한 위쪽까지 조심스레 진입했다.
“그만해!”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찔끔한 에이몬이 다시 조용히 손을 뺐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맨몸으로 뒹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제 와 만지지 말라며 내치는 것조차 민망한 행동이었다. 이미 에이몬의 손이나 입술이 모조리 닿은 뒤인데.
심지어 중간에 마제또가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분명 벌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
묘하게 달라붙는 에이몬을 내버려 두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흘러갈 것 같아, 블론디나는 제게 비비적대는 에이몬을 내치고 또 내칠 수밖에 없었다.
블론디나는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따뜻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두꺼운 나무 벽에 걸린 커다란 사슴 머리, 이국적으로 짜인 양탄자와 오래된 램프.
아까 이곳이 어디냐 물으니 에이몬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물에 빠진 널 끌고 무작정 몸을 누일 곳을 찾아왔다고. 아마 숲 지기의 오두막인 것 같은데 본인이 왔을 땐 이미 텅 비어 있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이곳을 찾지 못했더라면 에이몬은 새하얀 눈밭을 헤매며 절망만 느꼈을 테니.
블론디나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찾았다.
등 뒤로 닿는 가슴팍이 더없이 단단했다. 딱딱한 품에 안겨 있는데도 이상하게 포근했다. 깊은 충족감과 안정감에 한숨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처음 온 장소에 겁 없이 누워 있는데도, 에이몬과 마제또라는 두 짐승과 함께라 그런지 더없이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눈이 노곤하게 감겼다.
귓가에 촉, 하고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피곤하지. 좀 더 자, 브리디.”
묵직하고도 다정한 저음이 귓가에 감겼다. 그게 꼭 자장가같이 들려 점점 더 몸이 녹아들었다.
몸에 힘을 빼고 등을 푹 기댔다. 에이몬이 더욱 팔에 힘을 주어 몸을 품어 왔다.
블론디나는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얼음물 속에서 정신을 잃었던 순간과 달리 아주 편안하고도 달콤하게.
***
블론디나는 달칵달칵 나무 찬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네.”
긴 밤이 지나고 찾아온 아침. 나무 창문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집안 곳곳에 가득 고였다.
에이몬과 마제또, 블론디나 셋은 이곳에서 며칠 묵다 가기로 했다.
블론디나의 발목 때문이었다. 썰매에서 떨어질 때 발목뼈가 삐끗 어긋났는지 찬바람이 닿을 때마다 시큰거렸다.
아무리 모포로 둘둘 싸매어 안고 간다고 해도, 찌릿 올라오는 고통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제적으로 택한 숙박이었다.
에이몬의 품에서 잠에 깨자마자, 주머니에 달린 보석 몇 개를 떼어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본격적으로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배가 고팠다.
사고를 겪어 그런 걸까. 평소보다 허기가 심히 밀려왔다.
배가 고프다며 안을 부산스럽게 두리번거리자 에이몬은 자신만 믿으라며 밖으로 나갔다.
문짝과 근처 나무에 발톱 자국을 내어 경고를 새겨 놓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뭐 없나?”
블론디나는 까치발을 들어 위쪽에 있는 서랍까지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보이는 건 술병뿐이었다.
하기야 겨우내 오두막을 비울 텐데 음식을 남겨 두고 갔을 리가. 이렇게 된 이상 에이몬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벽난로 앞에 앉아 무릎을 모았다. 은은하게 타오르는 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결국 목이 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이라도 마셔야지.”
아까 찬장을 열었을 때 체리가 한가득 들어간 분홍빛 술이 보였었다. 그거라도 마셔야지, 안 되겠다.
제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 더 떼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아까 보았던 술병을 조심스레 내렸다.
“그거 뭐야, 블론디나? 맛있는 거예요?”
마제또가 뽈뽈뽈 날아왔다.
블론디나는 나무 잔에 술을 반 정도 채우고는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향기롭고 달콤한 술이 화하게 넘어갔다.
빈속에 마셔서 그런지 취기가 확 올라왔으나 맛은 좋았다. 가슴 안쪽이 불타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물방울 맺힌 술잔을 내밀었다.
“맛만 볼래?”
마제또는 부리로 술 방울을 콕 찍어 맛보더니 다시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맛없어! 마제또는 술 싫더라!”
블론디나는 입맛을 다셨다. 묘하게 다시 끌어당기는 맛이 있다.
술잔에 술을 한 번 더 꼴꼴 채워 넣고는 이번엔 몇 번에 나누어 조심스레 맛보았다. 달콤한 과일 향이 혀끝에 달라붙었다.
창문가에 있던 마제또가 삑,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응? 블론디나! 여기 와봐요, 여기!”
“왜애?”
반쯤 꼬부라진 발음으로 답하며 느릿느릿 창문가로 다가섰다.
그러자 보이는 건 이파리를 떨군 나무 뒤로 보이는 뽀얀 눈.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표범이었다.
물론 에이몬은 아니었다. 블론디나가 그간 보아 온 갈색 점박이도 아니었다. 새하얀 몸에 까만 점이 박힌 눈표범이었다.
“설표인가? 저런 표범은 처음 보네?”
햇살 아래 하얀 털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분명 포식자일 텐데 위험하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이 먼저 치밀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흘러온 햇살이 털 위를 몽실몽실하게 뒤덮는다.
눈동자를 빛내며 블론디나를 바라보는 표범은, 에이몬이 내놓은 표식 탓에 쉬이 다가올 수 없는지 귀만 연신 쫑긋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블론디나는 작게 웃었다. 그간 신수만 보아 와 그런지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일반 표범의 체구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반 표범은 저랬지. 신수들이 현실성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게 컸을 뿐. 그중 가장 무시무시한 건 에이몬이었고.
세상에 그런 몸집이 가능하기나 한 건가.
알코올로 열 오른 뺨을 슥슥 비비며 블론디나는 배시시 웃었다.
순간 흰 표범의 털이 자르르 섰다. 느릿하게 살랑이던 꼬리를 휙 치켜세우고는 무언가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린다.
‘내가 웃는 게 그렇게 이상했나?’
블론디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하얀 표범이 놀란 건 블론디나 탓이 아닌 모양이다. 하얀 표범 뒤로, 그보다 몇 배는 큰 것 같은 거대한 표범이 슬렁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눈과 대비되는 밤하늘같이 새까만 몸. 어둠을 반사해 내는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검은 짐승.
에이몬이었다.
입에 사냥감을 물고 느릿하게 걸어온 에이몬은, 오두막 앞에 서 있는 설표를 심드렁히 쳐다보고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냄새로 멀리서부터 알아챘던 모양이다.
설표는 후다닥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다급한 발짓에 눈발이 폴폴 날렸다.
에이몬이 한발 한발 느긋하게 이동할 때마다 긴장한 듯 귀를 쫑긋쫑긋 세웠다.
한참이나 에이몬을 몰래 관찰하다가, 에이몬이 사람으로 변해 눈밭 위에서 사냥감 고기 손질을 시작하자 상체를 낮추고 조심스레 접근하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킁킁거리던 설표가 에이몬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경배하듯 납작 엎드려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바닥이 삭삭 끌렸다.
물론 에이몬은 설표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슬금슬금, 몰래 기어온 설표가 기어이 에이몬에게 가까이 다가와 킁킁, 코를 디밀었다.
그제야 에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제 커다란 손으로 설표의 얼굴을 쭉 밀었다.
창문에 막혀 에이몬이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만, 입모양으로 보아 아마 ‘꺼져.’라고 말한듯싶다.
설표는 버티려 했으나 에이몬의 힘에 질질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설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졌다가 다시 살금살금 다가와 바닥에 납작 엎드린 후 꼬리를 흔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블론디나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왠지 속이 탔다. 무어라도 마셔야 했다.
술을 쭉, 들이켠 블론디나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벌컥 열어 에이몬을 향해 외쳤다.
“뭐 해?”
블론디나의 눈동자에 미약한 질투심이 담겼다.
새까만 머리의 인간형 신수와, 새하얀 털을 가진 표범이 함께 있을 뿐인데, 어쩐지 애인의 외도라도 목격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