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블론디나의 손이 닿자, 에이몬은 그제야 눈을 찬찬히 감았다. 깊게 멍울진 눈동자가 어둠 속에 묻혔다.
에이몬은 무작정 블론디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이미 끌어안은 그녀의 몸을 더욱 꽉 부둥켜안고 귓가에 느릿하게 입을 맞췄다.
커다란 사내가, 마치 잃었던 어미를 찾은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품 안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블론디나는 절 파고드는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옅게 웃었다. 그에게서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나무 향기와, 차가운 눈 내음이 풍겼다.
“여기 천국이야? 나 죽은 거 아니지?”
두려움과 추위가 눈 녹듯 사라졌다. 제 앞에 에이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처구니없게 웃음이 났다.
죽음에서 벗어난 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웃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브리디. 브리디…….”
에이몬은 계속해서 블론디나의 이름을 속삭였다.
혹여 사라질까, 없어질까 두려워 단단히 부둥켜안고 연신 제 뺨을 비볐다.
뜨겁게 젖은 숨결이 블론디나의 살갗을 적셨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을 내려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에이몬의 불안한 호흡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블론디나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와 부드러운 피부를 핥았다.
블론디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젖은 혀 미끄러지는 감각이 너무도 선연했다.
죽다 살아났기에, 정신이 없었기에 느끼지 못했다. 둘이 맨몸으로 뒤엉켜 맨 살갗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이제야 깨닫고는 제 몸을 정신없이 만지는 에이몬의 손길에 몸을 흠칫 움츠렸다.
“왜…… 왜 그렇게 위험한 곳에 혼자 갔어, 응……?”
젖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웅얼거리며,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쇄골을 입술로 문질렀다.
오싹한 찌릿함이 감돈다. 자신과 에이몬의 모습을 한번 상기하자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간 게 아니라…… 사고가…… 으음…….”
그간 뒹군 적은 많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짐승 모습이었을 때에 불과하다.
딱 한 번 사람인 에이몬과 마주했을 때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감각이 지금과는 또 달랐다. 그
순간에도 설레어 견딜 수 없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헐벗고 뒤엉켜 있는 이유를 안다. 제 몸의 온기를 되찾아 주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온기를 되찾다 못해 열기마저 치밀어 눈앞이 어그러질 지경이었다.
한번 상황을 의식하자 가슴이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하라고……. 널 잃으면 난…….”
작은 몸을 파고들며 속삭이는 에이몬 목소리에 희미한 분노가 담겼다.
떠올릴수록 감정이 치미는지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보드라운 살덩이를 거칠게 깨물었다.
“아……!”
블론디나의 입술 틈으로 옅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내 입을 꽉 다물고 고통을 삼켰다. 고통이라기보다는 미약한 흥분이 더욱 컸다.
에이몬이 몸을 깊숙이 맞댈 때마다. 아이처럼 파고들 때마다 손끝이 찌릿했다. 죽다 살아나서 느끼는 감정치고는 고약하다.
제 몸을 꽉 짓누르는 에이몬이 새삼 묵직했다.
블론디나는 목소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숨을 참았다. 이상한 소리가 날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뒤이어 느껴지는 감각에 다시, 억눌린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몬이 말랑한 살덩이를 움켜쥐며 곧바로 입술을 맞붙였기 때문이다.
“네가 사라졌다는 건 알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어.”
“으응…….”
가슴 아래 희미한 속삭임이 울렸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쏟아지는 감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예민한 정점에 스치는 숨결이 뜨겁다. 한 사람과 한 짐승이 자리 잡은 모포 아래, 젖은 소리가 울렸다.
“각인이라도 했다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얌전히 기다렸던 걸 후회했어. 무척. 무척이나 후회했어, 브리디.”
한가득 베어 물며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감각이 선명하다. 하지만 머리는 아찔함으로 아득히 잠겨 갔다.
“아…… 에이몬, 으응…….”
난생처음 느끼는 기묘한 흥분이었다. 허리를 바들바들 떨며 에이몬의 어깨를 밀쳤지만, 에이몬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다급한 몸짓이 블론디나를 옭아매고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단단히 휘감아 끌어당긴 후 가슴 위에 매달렸다. 아이처럼 달라붙어 빨아당겼다.
끊임없이 사막을 헤매다가 기어이 오아시스를 찾아낸 이처럼 달려들었다.
에이몬의 거친 숨소리가 살갗 위에 맴돈다. 뜨겁게 달아오른 호흡이 블론디나의 살갗에 바짝 달라붙었다.
“눈뜨지 않는 널 보고 미치는 줄 알았어.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고.”
탐욕스럽고도 초조하게, 다급하고도 조급하게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핥고 문질렀다.
예민한 살점을 꽉 깨물며 잘근 씹자, 블론디나에게서 짤막한 비음이 터져 나왔다.
“으읏!”
여린 살갗 위에 붉은 잇자국이 났다.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에이몬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붉은 꽃이 가득 피었다.
새하얀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뒤덮였다.
에이몬은 살짝살짝 깨물다가도 다시 꽉 물어 왔다. 제 흔적을 블론디나의 몸에 새기고 싶은 열망으로 몸이 달아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에이몬에게서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울렸다.
“네가 죽으면 모두 죽여 버릴 거야. 네 아비도, 네 형제도, 제국인도 모두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야.”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몸을 굳혔다.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하지만 진득하게 죽음을 말하는 이가 내가 알던 고양이가 맞는 걸까.
어느새 제 몸을 한가득 뒤덮은 어깨를 멍하니 응시한다. 어둠에 묻힌 몸은 단단하고도 거대했다. 묵직한 쾌락이 몸을 한가득 뒤덮어 왔다.
에이몬이 매달리며 조급하게 붙어 올 때마다, 살갗 위로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그 감각이 간지러운데, 그것보다 제 몸을 오가는 입술이 더욱 간지러워 블론디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에이몬…… 읏…… 에이몬, 잠시만…….”
이미 가릴 것도, 막을 것도 없는 상태다. 새하얀 나신을 바르작거리며 블론디나는 애꿎게 그의 머리카락만 움켜쥐었다.
거칠게 달아오른 에이몬의 숨결이 쉼 없이 달라붙었다.
쾌락적인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으나 묘한 감각에서 달아나기 위해 자꾸만 에이몬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성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이 감각에 온몸을 맡기고 싶다가도 묘하게 치밀어오르는 초조함으로 애가 탔다.
에이몬의 입술이 스칠 때마다, 혀가 살갗 위에 미끄러질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이 감각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블론디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낯선 쾌락으로 눈물 한 방울이 뺨 위로 주욱 그였다.
절 온통 뒤덮은 새까만 짐승에게 눌려 밑도 없는 흥분 속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의 단단한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안을 향해 파고든 순간,
“블론디나 님 울잖아! 블론디나 괴롭히지 말아욧, 이 나쁜 짐승!”
난데없이 달려든 마제또에 의해 마구 달려가던 질주가 멈췄다.
마제또는 에이몬의 어깨를 콕콕 쪼며 비명처럼 다시 소리쳤다.
“죽다 살아난 인간, 왜 또 괴롭혀!”
연신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부산스럽게도 울렸다.
에이몬과 블론디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쨍그랑, 깨져 버렸다.
“…….”
“…….”
블론디나도 에이몬도 딱딱하게 굳어 행동을 멈췄다. 뜨겁게 진입한 에이몬의 손 역시 갈 곳을 잃었다.
깊은 침묵이 휘돈다. 타닥타닥. 그윽하게 울리는 나무 타는 소리가 적막을 뚫었다.
블론디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온 힘으로 밀어도 밀리지 않던 에이몬이 조금 이성을 차린 지금이 기회였다.
허벅지를 움츠리며 에이몬을 밀어낸 후, 모포로 제 몸을 황급히 가렸다. 학학 달뜬 숨을 내뱉으며 에이몬에게서 달아나 뒤로 슬슬 물러났다.
에이몬은 엉거주춤하게 앉아 블론디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둠 속에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 안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호흡을 내쉴 때마다, 불빛이 반사된 복근이 보기 좋게 움직였다.
탄탄하게 잘 짜인 가슴근육과 단단한 어깨를 바라보던 블론디나는, 저 아래 탐욕스레 뭉쳐 있는 에이몬의 욕망을 마주하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블론디나는 발을 들어 그의 콧잔등을 가차 없이 차버렸다.
“이 변태 고양이!”
물론 에이몬의 몸은 여자의 희미한 발짓에 조금도 흔들림 없었다. 마치 묵직한 돌덩이같이, 바닥에 뿌리 박은 거대한 나무 기둥같이.
“…….”
에이몬은 무릎 꿇고 앉아 집 잃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눈으로 블론디나만 응시했다.
모포를 두른 블론디나가 낯선 나무 서랍을 뒤져 깨끗한 튜닉을 둘러 입는 모습을.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모습을.
새하얀 목덜미에 난 붉은 자국이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후우…….”
에이몬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을 간신히 되찾은 얼굴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틈새로 허탈함이 샜다.
***
인간 한 명, 인간인 척하는 표범 한 마리, 작은 새 한 마리.
셋은 나무 오두막 양탄자 위에 가지런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에이몬?”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을 꽉 잡고는 웅얼거리듯 답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그 말이 맞았다. 그 말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네가 여행 간 이후부터 보고 싶어서 샨티와 할라만 구경하다가, 널 보러 가라는 샨티의 말에 신나서 뛰어왔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물에 빠진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 도착해서 황족 일행을 찾다가 호숫가에 도착했거든. 그런데 넌 보이지 않고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거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힘겹다는 듯 에이몬의 문장 마디마디마다 아픔이 눌렸다. 에이몬은 시선을 내리고는 담담한 말을 계속 풀어냈다.
“대충 들어 보니 네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무작정 네 냄새를 쫓아 달렸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맡을 수 있었어?”
“향이 너무 희미해서 찾기가 힘들었어. 진작 각인을 해야 했는데.”
에이몬은 천장을 바라보던 몸을 돌렸다. 턱을 괴어 막막한 눈으로 블론디나를 들여다보았다.
블론디나는 가만히 누워 물끄러미 에이몬을 돌아봤다.
블론디나의 순수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에이몬은 쓰게 웃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올리다가 살살 내려와 뺨을 매만졌다.
사고처럼 들이닥치는 초조함에 에이몬은 숨을 간신히 삼켰다.
따뜻하다. 따뜻한 피부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제 블론디나였다.
차갑게 식어 새파랗게 죽어 있던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의 블론디나를 상기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세상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던 그 순간을, 에이몬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에이몬은 얼굴을 내려 블론디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이 눈두덩이에 꽃잎처럼 닿았다가 살며시 떨어졌다.
“너무 무서웠어, 브리디. 네가 눈을 뜨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