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꺅!”
블론디나의 비명을 깔아뭉갠 에이몬이 그녀의 목덜미에 제 뺨을 비비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살갗 위를 부드럽게 맴돌았다.
블론디나는 까만 짐승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간지러운 감각에 어깨가 떨렸다.
짤막하게 흐르는 침묵 틈으로 에이몬이 건성건성 중얼거렸다.
「그냥 지금 여기서 확 잡아먹어 버릴까 보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고 느릿하게 내음을 맡았다. 앞으로 오랜 시간 떨어져 있을 블론디나의 향기를 기억해 두고 싶다는 듯.
***
멀어지는 황궁을 보며, 블론디나는 마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누구에게도 보일 리 없겠지만 그냥.
황궁 너머로 보이는 신수의 숲에 에이몬이 있을 것이다. 숲의 지배자는 오만하게 꽃 덤불 안에 누워 있을 터.
‘벌써 보고 싶네.’
이 정도면 병이지. 어릴 때부터 늘 붙어 있어 질릴 법도 하건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좋아졌다.
변태 고양이처럼 제 발가락을 핥아도, 이빨이 간지럽다며 제 어깨를 건방지게 왕왕 물어도 귀엽기만 했다.
심지어 어제도 만나서 실컷 뒹굴뒹굴하며 함께 놀았는데…….
이젠 희미해져 보이지도 않는 황궁을 돌아보며 블론디나는 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나.
생각하면 할수록 아쉬움과 불안함마저 치밀었다.
에이몬이 얼마나 멋있는가. 흑표범일 때는 위압감 넘치는 체구가 황홀했으며, 사람일 때는 마주하는 것만으로 자꾸만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잘생겼다.
소꿉친구라는 혜택 덕에, ‘난봉꾼, 호색한이 되지 말라’며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붙들어 놓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침을 줄줄 흘리며 탐을 낼 존재인데. 심지어 발정기인데.
후우. 한숨을 푹 휘자, 마차 의자에 깔린 손수건 위에 누워 블론디나의 반지를 갖고 놀던 마제또가 물었다.
“응? 왜? 왜 그래요, 블론디나?”
마제또는 빨딱 일어나 쫑쫑쫑 뛰어오며 되물었다.
“응? 왜 한숨 쉬는데? 마제또가 반지 달라고 할까 봐? 응?”
진짜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지 짐짓 눈치를 보며 마제또가 짹짹거렸다.
블론디나는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귀엽기도 하지. 귀여운 짐승인 건 에이몬과 똑같은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무릎 위로 포르르 뛰어올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제또의 배를 긁으며, 블론디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반지 너 가져, 마제또.”
애초에 보석에는 관심 없었다. 에이몬이 선물해 주었던 반지 빼고는, 작은 소지품이라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고 해도 제게 맞지 않은 물건을 지닌 듯 늘 부담스럽기만 했다. 황녀가 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진짜? 진짜 나 가져도 돼? 돼요?”
“응. 진짜.”
“고마워! 블론디나가 최고야! 블론디나 님이 제일 좋아!”
블론디나의 어깨 위로 돌진한 마제또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오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보석으로 참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니 새삼스럽게 신기하지. 블론디나는 마제또의 통통한 배를 간지럽혔다.
짹짹짹, 웃는 참새 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는 쉴 만한 공간이 나타날 때마다 20여 분간 멈춰 섰다.
들꽃이 활짝 핀 들판을 달리다가 커다란 호수 앞에 잠시 휴식하려 할 때였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황녀가 있는 마차의 문을 노크 하나 없이 열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루시! 괜찮아?!”
그중 한 명인 라르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몇 시간 전, 덜컹덜컹 산길을 내달리던 마차 승차감이 별로였는지 루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휴식 시간에 루시의 그늘진 안색을 발견한 라르트는 그때부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동 속도를 줄여야 한다느니, 좀 더 평탄한 길로 돌아가야 한다느니.
그러다 종내에는 루시와 함께 마차를 타겠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결국 황제에게 타박을 받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블론디나는 제 손안에 고롱고롱 잠든 참새를 소중히 쥔 채 루시와 라르트를 응시했다.
무릇 둘을 응시하는 건 블론디나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자가 황녀의 시녀에게 철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꽤 흥미로운 장면이다. 함께 여행하는 귀족의 시선이 몰래몰래 꼬리처럼 따라왔다.
“눕지 않아도 되겠어?”
루시의 등을 쓸어내리던 라르트가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귓가를 매만지는 행동에 주저가 없었다.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접촉이었다. 루시도, 라르트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블론디나는 고개를 갸웃 넘겼다.
‘언제 둘이 저렇게까지 친해졌지?’
손길 하나, 눈빛 하나가 이전과는 묘하게 달랐다. 라르트의 시선 속에 무겁고도 진득하게 고인 감정이 있었다.
‘뭐, 내가 에이몬이랑 놀 때 친해졌겠지.’
풀밭 위에 몸을 쭉 늘이며 블론디나는 생각을 날려 보냈다.
푸른 하늘 위로 새까만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그 날갯짓을 보는데 어처구니없게 에이몬이 떠올랐다. 새까맣고도 아름다운 그 표범이.
***
“눈! 눈! 블론디나 님! 눈이야!”
마제또가 마차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호들갑을 떨었다. 부리로 유리창을 콕콕 찍으며 파닥거릴 때마다 부리에서 뽀얀 입김이 나왔다.
해가 질 무렵 도착한 제르반 반도의 휴양지. 며칠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름다웠다. 새하얀 눈 위로 석양빛이 낮게 가라앉고 있다.
“마제또. 이리 와봐.”
루시의 부름에 마제또는 포르르 날아가 그녀 손등에 앉았다. 곧 털실로 짜인 자그마한 옷이 마제또를 폭 감쌌다.
“추울지도 모르니까. 선물.”
“마제또 추위 안 타는데…… 겨울에도 잘 사는데…….”
마제또는 감동한 얼굴로 옷을 내려다보다가 “루시이-!” 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블론디나가 슬슬 상체를 내렸다.
“아까 반지 줬을 땐 내가 최고라며, 마제또?”
“블론디나 님도 최고고 루시 님도 최고야! 마제또는 둘 다 너무 좋아!”
새하얀 털실옷을 입은 참새와, 그 참새를 토닥거리는 인간을 보던 블론디나는 웃는 낯으로 차창 밖을 응시했다.
앞으로 몇 주나 묵게 될 새하얀 장소가 잔상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별다를 게 없었다.
파티에 참석하고, 두꺼운 털옷을 입은 채 눈밭을 밟았으며, 장인이 만든 얼음 조각상을 구경했다.
물에 발이라도 담가 참방거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보이는 건 하얀 냉기뿐이라 지루하기만 했다.
함께 동행하는 이들이 우아한 황족들이라 더욱 숨이 막혔다. 고귀한 이들과 함께 붙어 있다 보니 손짓 하나, 고갯짓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반푼이 황녀라는 비웃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드레스 자락 움켜쥐는 행동에도 우아함을 깃들여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끈에 몸이 칭칭 감긴 기분이었다.
반원 모양의 유리 건물 안에 앉아, 몰아치는 눈바람을 응시하며 블론디나는 차를 마셨다.
몰아치는 설원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따사롭게 티파티를 즐길 수 있다니. 황족이 누리는 사치가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블론디나 맞은편에는 여지없이 라르트와 루시가 앉아 있었는데, 속이 좋지 않다며 쿠키를 멀찍이 밀어 버리는 루시를 보며 라르트는 연신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럼 쿠키는 내가 다 먹을 거야!”
마제또는 신난 얼굴로 쿠키를 향해 부리를 박았다. 마제또의 깃털을 손가락으로 훑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라르트는 시선을 들었으나 상대를 확인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블론디나 역시 뒤를 돌지 않았다.
저를 방문할 이들은 함께 여행 온 황족이나 고위 귀족뿐이다. 황제나 황후가 오지 않은 이상 황녀인 블론디나가 먼저 뒤돌아 아는 척할 이유는 없었다.
“고귀한 황족을 뵙습니다.”
톤이 살짝 높은 목소리. 블론디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며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다갈색 머리를 가진 공작가 남매가 서 있었다. 역시 연한 갈색빛의 눈동자에는 고위 귀족 특유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짙게 새겨져 있다.
둘 중 연장자인 루베로스 데힐 공자가 고개 숙여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블론디나는 굳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맞은편 라르트 황자는 빙긋 웃으며 “무슨 일이야?”라고 쉽게 대꾸했다.
“지나는 길에 즐거워 보이시기에 들러 보았습니다.”
데힐 공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 동생, 클레아 데힐 공녀를 여분 의자에 앉혔다.
어린 시절부터 아델라이, 라르트와 친밀하게 지냈기에 스스럼없는 태도가 대번 나왔다.
데힐 공녀가 앉자마자 공자는 고개를 돌려 루시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라르트 황자와 블론디나를 향했던 상냥한 눈은 온데간데없이 삭막하고도 오만한 눈길이 쏘아졌다.
마침 테이블 의자가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감히 시녀 따위가. 그것도 세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한미한 백작가 출신인 루시가, 공작가의 자제를 세워 둔 채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퍽 불쾌한 모양이다.
눈치 빠른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다는 듯 블론디나 뒤로 물러서서는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라는 듯.
라르트 옆 빈자리를 루베로스 데힐 공자가 차지하자 라르트의 한쪽 눈썹은 슬쩍 올라갔다.
데힐 공작가.
데힐 공작에게는 특출한 자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뛰어난 검술로 모두의 기대를 모으는 장자 루베로스 데힐이요, 하나는 차후 라르트와 맺어져 황후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클레아 데힐 공녀였다.
라르트 황자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클레아 데힐 공녀는 아름답고 총명하여 현 황후마저 탐내는 인재였다.
누구나 그녀가 차기 황자비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탄탄한 권력에 든든한 재력까지 받쳐 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였다.
그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라르트 황자가 사냥대회에서 웬 미천한 백작가 영애에게 사냥감을 주었을 때부터이다.
블론디나 황녀의 시녀인, 누구나 꺼리던 반쪽 황녀 시녀 자리를 어쩌다 차지하게 된 루시 헤리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