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인간의 경외를 받던 신수가 블론디나의 턱을 따라 콧잔등을 비비며 어리광 피우듯 무겁게 치댔다.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 붙었다.
「멋있었다고 해줘. 세상에서 제일 멋있었다고.」
블론디나는 소름 돋는 팔뚝을 문지르며 가까스로 답했다.
“으응…… 멋있었어…… 멋있었는데…….”
아. 너무 간지러워.
에이몬이 주둥이로 비비적댈 때마다 얇은 슈미즈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매끄러운 어깨가 뽀얗게 드러났다.
에이몬의 숨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듯, 하얀 블론디나의 어깨를 송곳니로 살짝 눌렀다.
충동을 참기 힘든지, 그녀의 어깨를 아주 살짝 물었다가 곧장 떨어뜨렸다.
“아파!”
블론디나가 슈미즈 자락을 치켜올리며 에이몬의 콧잔등을 톡 때렸다.
이갈이하는 새끼 고양이도 아니고…… 에이몬이 요새 자꾸 제 몸 여기저기를 물어 대고 핥아 대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버릇을 고쳐 줘야 할 것 같다.
에이몬이 절 해치거나 잡아먹는다든가 할 리 없으나 혹시 모르니까. 의도치 않게 힘 조절 실패하면 피가 철철 나지 않겠나.
피를 보면 극도로 흥분한다고 했으니, 잡아먹히기 싫으면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지.
매끄러운 살갗 위에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블론디나는 실금같이 그어진 붉은 자국을 문지르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팠어? 미안해, 브리디. 요새 참기가 힘들어서.」
속삭이는 에이몬이 상처 위를 할짝거렸다.
블론디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따끔한 통각이 저릿하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어깨를 괴롭히던 에이몬이 슬슬 움직여 쇄골을 핥고, 더욱 아래로 내려와 가슴을 덮은 슈미즈 드레스를 향해 느릿하게 접근했다.
드레스 자락을 콧등으로 들추자 부드러운 굴곡이 드러났다.
에이몬의 달뜬 숨소리나, 달아오른 체온이 심상치 않아졌다. 얼굴이 블론디나의 둥그런 굴곡에 닿을 즈음,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휙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동자 속에 타오르는 열은 눈치채지 못한 채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참기 힘들어? 요새 또 이갈이라도 해?”
신수는 이갈이를 여러 번 하나? 순수하게 묻는 블론디나의 질문에 에이몬은 아주 느릿하게 답했다.
「……아니.」
블론디나는 흘러내린 슈미즈를 가슴 위까지 다시 올리며 에이몬의 콧잔등을 문질렀다.
“하기야 너 이갈이는 예전에 끝났지. 내 보석상자에 네 송곳니 있는 거 알아? 되게 귀여운 송곳니.”
마치 아기 고양이에게 말하듯 나직하고 다정한 속삭임이 흘렀다.
에이몬은 식지 않은 숨을 조용히 내쉬다가 이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두운 밤, 불꽃이 튀는 듯 새파랗게 빛나는 자줏빛 눈동자가 선연하게 드러났다.
에이몬은 결국 제 콧잔등을 문지르는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저 역시 비비적댔다. 한숨과 함께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난 오늘 수장이 됐는데 넌 도대체 언제 크지?」
낮은 속삭임을 듣지 못한 블론디나는 고개를 빗겨 올려 창문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흐드러지게 빛나는 별 사이로 푸른 달이 한가득 떠 있었다.
“밤이 늦었네. 오늘 피곤했지? 이만 가봐.”
「…….」
“혹시 자고 갈 거야?”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의 귓가에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좀 더 기다리지, 뭐…….」
허락도 받았겠다, 급할 건 없으니. 어차피 짐승의 법이 아닌 인간의 법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
황궁 서쪽의 깊숙한 곳.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신을 기리는 작은 신전이 있다.
제국이 세워지기 전. 대륙을 다스리던 존재는 인간도, 신수도 아닌 태초의 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강물이 마르듯 태초의 신 역시 어느 순간 소멸했다.
태초의 신이 사라진 후 남은 건 그가 살던 신전 터뿐이었다.
황궁은 그 신전 터 위에 세워졌다. 한때 대륙을 다스리던 신을 기리며 그의 영험함을 얻고자 함이었다.
아델라이 황녀는 자그마한 백색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걷는 중이었다. 그곳은 태초의 신을 기리는 신전이었다.
늘 따르던 호위 기사도 없었다. 고운 드레스를 꽉 움켜쥔 채 가신 오토만 백작 하나만 달고 성급히 발을 놀렸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
흥분으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 멀리 신전이 보였다.
늘 당연한 듯 박혀 있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장소. 제국과 함께 평온하게 뿌리 내린 건물.
아델라이는 새하얀 돌기둥을 지나 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신전 중앙으로 들어섰다.
버석하고 메마른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외부와 단절된 또 하나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벽에 걸린 ‘진리의 창’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황금색의 전신에 붉은 보석이 박힌 호화로운 창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세월의 흔적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반짝거렸다.
오토만 백작을 향해 손짓하자 그는 두 손으로 겨우 창을 쥐어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성인 남성의 힘으로도 겨우 들 무게였다.
아델라이는 목에 걸린 열쇠를 비틀어 쥐어 빼냈다.
창이 있던 곳. 이음새 하나 없는 벽에 무작정 열쇠를 갖다 대자 아무것도 없는 벽에 마법처럼 열쇠가 맞물렸다.
“…….”
아델라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안쪽을 향해 천천히 들어섰다. 케케묵은 먼지가 부유하며 어른거렸다.
천장 틈으로 드문드문 내리쬐는 햇살 아래 누군가가 누워 있다. 수염을 기른 사내가 넋을 놓은 얼굴로 시선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우웅-. 중앙에 놓인 하프에서 공명 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힘에 반응한 듯 제 존재를 드러내며 힘없이 울고 있었다.
아델라이는 제게 드러난 다가온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섰다.
“황녀님. 이것을.”
아델라이는 오토만 백작이 건네는 푸른 보석을 꿀꺽 삼킨 후 주문을 외웠다.
그런 뒤 누워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입을 억지로 열었다. 그의 입에 제가 먹은 것과 같은 보석을 밀어 넣었다.
아델라이와 사내가 같은 보석을 삼키자, 비로소 그녀 배 속에 있는 보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개의 보석이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드디어!’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희열로 아델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왜. 왜 안 되는데……. 나도 갈래…….」
커다란 흑표범이 낑낑거리며 블론디나의 허리에 뺨을 비볐다.
제게 비비적대는 에이몬의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블론디나는 조용히 답했다.
“넌 우선 몸집이 너무 크고…… 크고…….”
너 지금 발정기잖아. 블론디나는 할 수 없는 직언을 꿀꺽 삼킨 후 ‘크잖아.’라는 변명만 되풀이했다.
지금, 에이몬과 블론디나는 끝 모를 공방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이번 여름에 블론디나는 제르반 반도로 휴가를 가기로 했다. 평소처럼 루시와 가는 게 아닌 황족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에이몬이 갑자기 저도 같이 가겠다며 우겨 대기 시작했는데 차마 허락할 수 없어 블론디나는 식은땀만 흘렸다.
에이몬이 갈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제어가 힘들고, 본인 스스로가 위험하다는 발정기 시기 짐승과 어찌 함께 가겠는가.
심지어 요새 에이몬은, 매우 더운 여름, 강을 향해 앞뒤 없이 달려드는 어린애 같았다.
별궁 안에 라르트와 루시가 있건 말건, 하녀가 들어와 찻잔을 내려놓건 말건 블론디나 곁에 달라붙어 여기저기 지분거리기 일쑤였다.
무거운 몸 좀 치우라며 낑낑거리는 제 모습도 부끄럽고, 발개진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라르트와 루시를 보는 것도 민망하고, 에이몬의 응석에 자꾸만 속이 달아오르는 자신도 한심했다.
충동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시기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 모습을 어찌 황족에게까지 보이겠는가. 그것도 위대한 신수님인데.
에이몬이 와락 달려들 때마다 블론디나는 그의 얼굴을 팍팍 때리거나 수염을 꽉 잡아당겼다. 힘으로 이길 수 없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신수 수장께 하는 그 불손한 행동을 타인에게까지 보일 수는 없는 것.
“조금만 참아. 금방 올게.”
휴가가 꽤 기니 그사이 발정기도 지나가 있겠지. 다녀오면 예전처럼 커다랗고 귀여운 고양이로 되돌아가 있을 터.
다정한 블론디나의 말에, 에이몬은 귀를 축 늘어뜨렸다.
「할 게 많은데.」
꼬리가 힘없이 살랑거렸다. 풀 죽은 에이몬의 귀를 쓰다듬으며 블론디나가 상냥하게 물었다.
“뭘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있어, 그런 게!」
에이몬은 버럭 화를 냈다. 부끄러울 때마다 괜히 소리를 지르는 게 그의 귀여운 버릇이었다.
블론디나는, 씩씩거리는 에이몬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의 뺨을 두 손바닥으로 붙들었다.
표범은 체구가 큰 만큼 머리도 커서 제가 아무리 감싸 쥐어 봤자 반도 못 덮는다. 하지만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약한 힘에도 쉽게 고개를 들어 주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콧잔등에 쪽, 입을 맞췄다.
에이몬의 꼬리 털이 자르르 섰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얼른 올게.”
마치 집 지키는 강아지를 달래듯 말해 오는 목소리였다. 에이몬은 언제 송곳니를 내밀었냐는 듯 예쁜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빨리 와야 돼…….」
“알겠어.”
블론디나는 빙긋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착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만큼은 말 잘 듣는 애완 고양이 같았다.
비록 송곳니 하나가 인간의 목을 그대로 꿰뚫을 만큼 커다랬지만, 발톱 하나가 커다란 나무를 쪼갤 만큼 단단했지만, 절 향해 이빨을 위협스레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귀여운 고양이에 불과했다.
블론디나는 커다란 고양이를 보며 웃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머릿속을 묘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에이몬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블론디나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에이몬. 나 없다고 아무한테나 막 달려들면 안 돼.”
「응?」
“본능만 좇아서 아무 상대하고 뒹구는 사람을 내가 뭐라고 부른다고 했지?”
「난봉꾼. 바람둥이. 호색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라 그런지 딱 떨어지는 답이 대번 나왔다.
표정이 짐짓 심각해진 블론디나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똑똑하다, 우리 에이몬.
“맞아. 넌 짐승이지만 나랑 붙어먹었으니까 저 소리 듣기 싫으면 행동 조심해야 해. 알았지?”
‘천하의 나쁜 짐승이 되기 싫으면, 그간 쌓은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나와 발정기를 보내야 해.’라고 질리도록 말하기는 했으나…….
위대한 신수이긴 하지만 그 전에 동물이고 짐승 아닌가. 이성보다는 본능이 짙은 존재라는 뜻이다.
묘한 불안함이 치밀어 블론디나는 제법 진지한 말투로 에이몬을 단속했다.
에이몬이 픽 웃었다.
「진짜 붙어먹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새까만 형체가 블론디나를 다짜고짜 확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