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화
당황한 블론디나가 에이몬을 쭉쭉 밀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커다란 짐승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달뜬 숨을 내쉬며 더욱 달라붙을 뿐.
블론디나는 에이몬에게 깔린 채 힘겹게 낑낑거렸다.
에이몬이 절 핥는 건 질리도록 겪은 일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야릇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이전의 그 일 때문일까.
에이몬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는데 받아들이는 자신은 너무도 달라졌다. 뜨거운 숨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소름마저 돋았다.
“무거워. 왜 계속 표범 몸으로 이러는 거야.”
「내가 인간 모습이면 더 곤란할 텐데.」
쇄골을 문지르며 에이몬이 속삭였다.
「당장 사고 칠까 봐 네게 시간을 주는 거야, 브리디.」
차분하게 중얼거리는 에이몬은 여전히 블론디나 몸 위에 달라붙어 느릿하게 지분거렸다.
“앗, 에이몬…… 으응…… 잠깐…….”
「이해해 줘. 발정기잖아.」
커다란 고양이가 붙어 오는데, 블론디나는 평소처럼 귀여워해 주기는커녕 바르작거리며 도망가기만 했다.
물론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한번 찍은 사냥감을 절대 놓친 적 없던 맹수다.
양탄자를 뒹구는 블론디나를 덮치고 드레스 자락을 앞발로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는 블론디나를 온몸으로 덮쳤다.
“기분 이상해, 에이몬…….”
블론디나가 울먹이며 에이몬의 귀를 꾹 움켜쥐었다.
털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웠다.
기분이 나쁜 건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으슬으슬함이 발끝부터 타고 올랐다.
“아, 앗. 그만해…….”
블론디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앙앙 물린 뒤에야 에이몬의 품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인간으로 변해서 계속해도 될까, 브리디?」
라고,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헐떡거리는 에이몬의 코를 발로 퍽 차고 나서야.
***
“필립에게 갈 테니 준비해.”
아델라이는 충동적으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를 향해 휙휙 손짓을 보내자, 시녀는 그녀의 뜻을 바로 눈치채고는 치장을 돕기 시작했다.
“선약도 없이 갔다가 공자가 자리에 없으면 어쩌지요?”
갑작스러운 방문인 건 사실이라 머리를 빗겨 주던 시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필립 로드슨. 그는 제국을 떠받치는 공작가의 후계다. 아델라이가 아무리 황녀라고는 해도 간다는 통보 하나로 부리기 쉬운 자가 아니다.
아델라이의 표정이 대번 구겨졌다.
“황족이 간다는 언질을 받으면, 다른 선약에 갔다가도 돌아와야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야.”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아델라이는 제 머리를 빗겨 주던 시녀를 밀어 버리고는 그녀의 가슴팍을 향해 빗을 던졌다.
떨그렁. 하녀의 가슴팍을 맞고 떨어진 빗이 차가운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당장 나가.
소리 죽은 명령에 시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아델라이는 거울을 마주하고는 분에 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블론디나 천것과의 관계도 그렇고, 라르트와 블론디나의 관계도 그렇고. 황실을 위협하는 신수 짐승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녀조차 탐탁지 않았다. 입안의 혀 같은 자들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멍청하지는 말아야지.
아델라이는 거울 속 저를 노려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성이 보였다.
탐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빛나는 눈동자. 하나 외모는 세월이 가면 시들 터. 죽을 때까지 화려하게 빛날 것. 아델라이는 그것을 원했다.
황제가 되어 차지할 명예, 바로 그 영원히 찬란할 빛을.
‘블론디나는 절대 빼앗아 가지 못할 나만의 자리이지.’
제아무리 아버지의, 쌍둥이 동생의 마음을 빼앗아 간 블론디나라 할지라도 그것만은 제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황녀라고는 하나 어미의 출신이 미천한 반푼이였으니.
‘바라한의 후예를 찾은 후, 로드슨 공작가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는 거야.’
언젠가 제가 앉을 황좌를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델라이는 거울 속 저를 향해 미소 짓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빗으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똑똑똑.
문 뒤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곧 은빛 안경을 쓴 한 남자가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는 오토만 백작. 아델라이 황녀의 모친인 현 황후의 사촌 동생으로 아델라이의 신실한 측근 중 하나였다.
그가 최근 맡은 임무는 하나였다.
“찾았습니다.”
금발에 금안. 어딘가에 있을 바라한의 후예를 찾는 것.
“이번에는 누구이지?”
“악명 높은 산적이라고 하는데 웬 말에게 차인 후 부상이 심해 칩거 중이라고 합니다.”
“흐음.”
아델라이는 무언가 탐탁지 않았지만 이내 그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뭐, 신수 짐승 놈들을 잡는 건 육체의 힘이 아닐 테니까.”
“황금의 방으로 데려갈까요?”
“그래.”
아델라이는 목에 건 황금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아버지인 황제를 대신하여 그 얼마나 바라한의 후예를 찾기 위해 애썼던가.
하지만 모두 하프 줄 하나 울리지 못하여 개죽음을 면치 못했다.
“반응 없으면 바로 죽여 버려.”
“예.”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을 개미 눌러 죽이듯 쉽게 내뱉은 후, 아델라이는 다시 등 돌렸다.
그녀 등 뒤에 서 있던 오토만 백작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
「마제또.」
에이몬은 마제또를 가만히 불렀다. 에이몬의 꼬리를 퉁퉁 타고 넘으며 놀던 마제또가 깜짝 놀라 숭덩 미끄러졌다.
“이제 안 할게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마제또는 통통한 배를 드러내고 버둥거리며 우선 사과부터 외쳤다. 에이몬이 단 한 번도 절 진심으로 위협하거나 괴롭힌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실 마제또가 에이몬에게 위협을 느꼈다면, 마제또는 에이몬의 꼬리를 밟으며 놀기보다는 그를 피해 달아났을 터였다.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던 마제또가 찬찬히 다시 눈을 떴다. 그런 후 여전히 절 가만히 바라보는 에이몬을 향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에이몬 님?”
저 신수님이 왜 저런 눈으로 바라보실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쫑쫑쫑 두 발로 신나게 뛰어갔다.
“마제또 왜 불렀어요?”
에이몬은 마제또를 빤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괜히 크르렁거리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마제또가 파드득 날갯짓하며 뒤로 물러섰다.
“왜 또 갑자기 화를 내려고!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지만 에이몬의 상태는 어쩐지 분노라기보다는 주저에 가까워 보였다.
앞발로 괜히 얼굴을 슥슥 문지른 에이몬이 심연을 긁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결혼 전에는 교합을 할 수 없다고 들었어. 관습이라고.」
“넹?”
「인간의 결혼이란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마제또는 ‘삐곡?’ 고개를 다른 쪽으로 기울였다. 지금 에이몬 님이 난데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지금 표범인 에이몬 님이 참새인 마제또한테 인간의 결혼에 대해 묻는 거예요?”
「…….」
에이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이건 마제또의 말대로 종족을 너무나 초월한 질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이몬이 꼬리를 휙휙 내저으며 다시 몸을 웅크렸다.
「알았으니까, 가봐.」
마제또는 에이몬의 등에 올라타 쫑쫑 뛰어다니며 웃었다.
“마제또가 어딜 가요! 내 집이 저 위인데! 오늘 에이몬 님 진짜 이상하네!”
에이몬의 저택 바로 옆 나무에 마제또 둥지가 있는 터였다.
어디든 가. 어디든! 에이몬은 꼬리를 팍팍 흔들며 참새를 향해 송곳니를 보였다. 하지만 저런 표정에 겁을 먹었다면 벌써 둥지를 다른 곳에 틀었을 거다.
마제또는 물러나는 척 포르르 날아올랐다가 다시 에이몬의 등에 올라타 귀까지 쫑쫑쫑 뛰어왔다.
“제가 인간한테 가서 물어볼까요? 블론디나 님한테 가서 교합이 어떻-.”
「하지 마! 절대!」
마제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이몬은 마제또의 말을 급하게 싹 자르더니 괜히 꽃 덤불을 거세게 후려쳤다.
「하면 절대 안 돼!」
팔랑팔랑. 분홍 꽃잎이 예쁘게도 낙하했다. 방금, 에이몬의 성질머리로 애꿎은 꽃만 생명을 잃었다.
폴폴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에이몬이 자색 눈을 번뜩였다.
「입 한번이라도 벙긋하기만 해. 네 깃털 하나 안 남기고 꿀꺽 삼켜 버릴 테니까.」
제 발톱보다 작은 참새를 향한 거대한 표범의 협박이었다.
“…….”
마제또는 절 한입에 삼켜 버린다는 에이몬을 빤히 바라보다가,
“삑!”
부리로 에이몬의 콧잔등을 콕 찍어 버리고는 도망치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작은 새의 겁도 없는 공격이었다. 에이몬이 절 진심으로 해치지 않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간 큰 반항.
“맨날 먹는대, 맨날! 나빴어! 블론디나 님한테 이를 거야!”
쨱짹거리는 항의 틈으로 에이몬을 향한 불만이 쏟아졌다.
“힘만 세면 다야? 나 이사도 할 거야! 여기 안 살 거예요!”
한참이나 에이몬 근처를 날아다니며 짹짹거리던 마제또는 이내 기분이 상했는지 푸른 하늘 뒤로 날아가 버렸다.
「내 말 진짜야. 말하면 가만 안 둬. 네 둥지 다 부숴 버릴 거야!」
위대한 신수 수장의 유치한 협박에, 마제또는 항의하듯 짹! 하고 지저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에이몬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고민했다. 꽃 덤불 안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고 떠올리다가 이윽고 느지막하게 몸을 일으켰다.
30여 분 정도 달리자 에이몬의 숲보다는 어두침침한 침엽수 숲이 나왔다.
발아래 덜 여문 풀잎이 밟힌다. 제법 싱그러운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나비가 팔랑거리는 나무 기둥을 지나자 풀로 뒤덮인 공터에 다다랐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샨티의 저택이 보였다.
에이몬은 주저 없이 다가가 다짜고짜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두 마리 신수가 뒤엉켜 있었다. 최근 연애를 시작한 할라와 샨티였다.
샨티는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야, 갑자기?!」
표범은 무척이나 개인적인 성향의 짐승이라, 제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에 무척 민감하다.
만약 이렇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짐승이 에이몬이 아니었다면 송곳니를 박아도 몇 번은 박았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에이몬.
수장인 데다, 제멋대로이며, 무식하게 힘만 센 친구였기에 샨티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너. 나와 봐.」
에이몬은 시비 걸듯 샨티를 불렀다.
샨티는 허망하게 서서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샨티가 답 없이 멀뚱멀뚱 서 있자 에이몬은 휙 뛰어 들어와 무작정 샨티의 목덜미를 물고 그를 밖으로 질질 끌고 나오기 시작했다.
혼자 남게 된 할라는 몸을 일으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것들 또 시작이네.」
샨티를 질질 끌고 가는 에이몬이나, 애처롭게 끌려가는 제 애인이나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 모습이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오던 일상이라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몸을 둥그렇게 웅크릴 따름이었다.
밖으로 나온 에이몬은 샨티를 휙 던져 놓고는 다짜고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