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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54화 (54/121)

# 54

#54화

“황녀님. 라르트 황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블론디나가 하려던 말이 움츠리는 달팽이 눈처럼 쏙 들어갔다. 열렸던 입술은 다시 굳게 닫힌 채였다.

문밖에서 싱글거리는 라르트가 성큼 들어왔다.

“나 왔어!”

루시는 하마터면 ‘다시 가세요!’라는 무례한 대답을 할 뻔했다.

대놓고 고까워하는 표정이 올라왔다. 조금만 늦게 오시지. 왜 하필 지금 오셔서 블론디나 황녀님의 말을 막아요?!

그러나 이내 속내를 지워 내고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위대한 제국의 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왔어, 라르트?”

블론디나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대충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자마자 라르트는 의자에 털썩 앉아 수다를 풀어 내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사이인데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블론디나는 반쯤 얼빠진 얼굴로 그의 말을 들었다.

“블론디나. 블랙윈드 기억나? 내가 보여 준 적 있잖아. 내 멋있는 까만 말.”

블랙윈드는 라르트가 무척 아끼는 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최고로 아름다운 말이라나.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황자에게도 특별히 아끼는 게 있었는데, 블랙윈드가 그중 하나였다.

라르트가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블랙윈드가 여섯 살이 되었거든. 번식 적령기가 된 거지!”

“아아. 그렇군요, 전하.”

루시의 대꾸에는 정성이 없었다. 라르트는 여전히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봄에서 여름이 되어 가는 시기잖아? 바로 번식의 계절이라고.”

“네. 아름다운 시기이죠.”

루시는 상냥한 어조로, 동시에 무미건조한 눈으로 숙제하듯 대꾸했다.

하지만 라르트는 제가 연모하는 이의 지루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의 눈치라고는 깨알만큼도 보지 않고 살아온 황족다운 태도였다.

“이 시기에 가장 수태율이 높아. 그래서 정했지. 블랙윈드에게 아이를 낳을 기회를 주기로!”

“네. 좋네요.”

“알고 있지, 루시? 블랙윈드의 혈통이 제국 최고라는 사실을.”

“네.”

몰랐다. 루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훌륭한 혈통의 말을 소유한다는 건 귀족의 자랑이자 명예기에 라르트는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블랙윈드의 새끼를 얻기 위해 귀족들이 얼마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 알아?”

“잘 모르겠지만 탐내고 있겠지요?”

“흠흠. 그래서 말이야, 헤리브 백작가에 제일 먼저 망아지를 얻을 기회를 주려고 하는데…….”

라르트의 입에서 결국 헤리브 백작가라는 단어가 나왔다.

처음부터 목적은 그것이었다. ‘루시 헤리브. 내가 네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말을 주기로 했어.’라는 그 말.

연모하는 이에게 하사할 크나큰 은혜.

라르트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가슴팍을 당당히 내밀었다. 하지만 라르트의 말에 반응한 건 루시가 아닌 블론디나였다.

블론디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라르트에게 물었다.

“라르트. 지금이 번식 계절이라고?”

“엉?”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라르트는 엉? 하고 멍청히 답했다.

“그런 계절이냐고.”

“어어. 봄, 여름이 새끼 기르기에 적당한 계절이기도 하고…….”

“혹시 모든 짐승이 다 그래? 그러니까, 네 멋진 블랙월드 말고 다른 짐승들도 그러냐는 뜻이야.”

“블랙윈드야.”

“그래서 맞아, 아니야?!”

맹렬한 기세로 묻는 블론디나의 질문에, 라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겁게 답했다.

“맞아. 대부분 그럴 거야.”

라르트는 곧 제가 알고 있는 잡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종마의 수태율과 교배 비용, 블랙윈드의 가치 등등.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나 본인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를.

물론 그 정보에 전혀 관심 없는 블론디나는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흘려보냈다.

이제야 무언가 형체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가…… 위험해서. 제어가 잘 안 되어서.

‘그래! 번식기라서 그랬던 거구나!’

절 찾아오지 않았던 것도, 피하듯 홀로 숲에 머물렀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게 확실했다.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찾아가다니.

각인이란 게 아무래도 신수들이 말하는 짝짓기 비슷한 거인가 싶은데. 그 충동을 참을 수가 없어서 혼자 끙끙대다가 눈치도 없이 찾아온 절 덮쳤나 보다.

에이몬이 위로라는 핑계로 제게 입을 맞춘 것도, 그의 몸이 무척 뜨거웠던 것도, 절 바라보던 무서우리만큼 낯선 눈빛도.

‘본능 때문이었구나. 에이몬도 짐승이니까.’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했나 고민했는데 수다쟁이 라르트가 답을 알려 주었다.

그래. 본능 탓이었다. 모든 짐승이 발정하는 계절 탓이기도 했다. 에이몬이야말로 짐승 중의 짐승. 어떤 존재보다 본능과 욕구가 강할 신수였으니까.

블론디나는 처음으로 그의 본능에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고마운 번식기가 내게 그런 선물을 줬어!’

인간은 짐승의 정조 관념과 다르다며. 키스했으니 쉽게 회피할 수 없다고 말해야지. 내 곁에 잡아 둬야지.

인간은 짐승과 다르니까 날 책임지라고 해야지.

에이몬은 나름대로 수긍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으니. 게다가 절 아껴 주니 책임져 줄 것 같기도 했다.

모두 다 잘 풀릴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황녀 신분이고 다 벗어던져 버리고 신수의 숲에 눌러살지 뭐.

미래를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 블론디나는 웃는 낯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풍경이 오늘따라 아름다웠다. 솜덩이처럼 하늘을 덮은 구름 사이로 찬란한 볕이 내리쬐었다. 마치 맑게 갠 제 마음처럼.

참으로 고마운 계절이었다.

***

「브리디.」

커다란 표범이 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꼬리로 문을 닫고는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나른하게 그림자처럼 걸어온다.

라르트와 루시가 도서관으로 책을 빌리러 갔기에, 커다란 방 안에는 블론디나 혼자였다.

블론디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에이몬에게 달려갔다.

“왔어?”

그리고 에이몬이 대꾸하기도 전에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표범의 이마에 제 뺨을 비볐다.

에이몬의 집 근처에 꽃 덤불이 있기 때문일까. 에이몬에게서는 늘 잔잔한 들꽃 향기가 났다. 청량한 나무 향기 같기도 한.

한참을 비비적거리고 있으려니, 빳빳하게 굳은 에이몬이 다시 거센 숨을 내쉬었다.

예전엔 성장해서 그렇다더니, 이번엔 발정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누가 신수 아니랄까 봐 참 예민한 짐승이야.’

블론디나는 차박차박 걷는 에이몬의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천천히 이동했다.

둘은 곧 양탄자에 늘어지게 누워 뒹굴뒹굴하기 시작했다.

배를 깔고 바닥에 턱을 대고 누워 절 빤히 바라보는 에이몬을 보며, 블론디나가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콧잔등을 슥슥 쓰다듬어 주자 에이몬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어쩜 이렇게 멋있게 생겼지.’

가느다랗게 드리운 볕 아래, 에이몬의 까만 털이 반짝이며 빛났다.

부드러운 몸의 곡선과 단단한 턱. 찬란한 모피. 제 외모에 늘 오만한 에이몬의 태도가 새삼스럽게 당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눈을 뜰 때 보이는 눈동자는 어찌나 예쁜지. 불꽃이 튈 듯 빛나는 선명한 보랏빛에 늘 홀리듯 시선을 박게 된다.

에이몬의 콧잔등도 문지르고 미간도 쓰다듬고 귀도 만지작거리던 블론디나가 조용히 물었다.

“에이몬. 발정기라며?”

「……뭐?」

표범의 털이 자르르 섰다.

너무도 순수했기에, 오히려 블론디나의 질문은 더없이 직접적이고도 직설적이었다.

에이몬이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멍하니 제 눈을 들여다보는 블론디나를 향해 에이몬이 물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귀를 쭉쭉 잡아당겼다. 나보다 어린 게 무슨 소리야? 배워도 너보다 2년은 빨리 배웠지.

“내가 열 살 애도 아니고.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긴. 그냥 아는 거지. 아무튼, 짐승들 지금 다 번식기라면서? 표범도 그런 거 아니야?”

에이몬이 어이없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내가 일개 짐승이야?」

“아니지. 위대하고 지엄하신 신수님이시지.”

블론디나의 농담 조 대꾸에 에이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대접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의미의 한숨이었다.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하려는 말은. 넌 모르겠지만 말이야.”

긴장과 함께 침을 꼴깍 삼킨 블론디나가 어젯밤부터 생각해 온 말을 풀어냈다.

“인간은 막 그런 행위를 아무와 하는 게 아니거든. 짐승은 그 시기가 되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겠지만, 음. 그러니까…….”

「…….」

“여러 상대와 뒹구는 놈을 인간은 흔히 난봉꾼, 바람둥이, 호색한이라고 불러. 매우 나쁜 놈 취급하는 거지.”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가르치듯 단호히 속살거렸다.

에이몬은 아무런 대꾸 없이, 붉은 입술로 종알거리는 블론디나를 빤히 바라만 봤다.

“넌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인 내 입장에서는 그래. 어쨌든 너도 인간 모습을 하고 있고, 나랑도 그, 그, 그런…… 그런 접촉이 있었으니까 짐승같이 행동하면 넌 난봉꾼 호색한이 되는 거야.”

말하자면 날 건드렸으니 책임지라는 소리였다. 그 뻔한 소리를 하기가 힘들어, 블론디나는 연기를 움켜잡듯 부질없이 허우적거리고만 있었다.

에이몬이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천하의 나쁜 짐승이 되기 싫으면, 너랑만 발정기를 보내란 거지?」

“어?”

그 말이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민망해서 제대로 대꾸할 수가 없었다. 에이몬이 재미있다는 듯 눈으로 웃었다.

「브리디. 넌 내가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민망함에 차마 할 말이 없어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앞발만 내려다보며 입술만 꼭꼭 씹었다.

드레스 안으로 슬그머니 무언가가 들어왔다. 에이몬이 슬렁슬렁 흔들고 있던 꼬리였다.

슬쩍 들어온 꼬리는 블론디나의 종아리를 매만지며 간질이다가 은근슬쩍 위로 올라왔다.

드레스가 말려 올라가 뽀얀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뭐 해?”

간지러움에 다리를 움츠리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천천히 적응시키려고.」

에이몬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기어코 허벅지 위까지 꼬리를 문질렀다. 그리고 은근한 안쪽까지 파고들려다가 제 콧잔등을 톡 내리치는 블론디나의 손길에 멈췄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너무 순진해서.」

할짝. 까끌한 혀가 블론디나의 살갗을 핥았다.

“그만해, 이 멍청한 고양이가!”

허벅지를 확 움츠리며 블론디나가 외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발정기라지만 이러는 건 좀 부끄럽지 않은가. 에이몬의 꼬리가 절 간지럽힐 때마다 움찔움찔 떨리는 제 반응도 싫었다.

에이몬은 ‘멍청한 고양이!’라는 말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송곳니를 보이며 울었다.

「야옹.」

어울리지도 않는 묵직한 그르릉이었다.

블론디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에이몬의 귀를 쭉쭉 잡아당겼다.

“커다란 게 고양이 흉내나 내고.”

「네가 고양이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한 에이몬이 벌게진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런 후 살갗을 느릿하게 핥으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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