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그의 앞발이 바닥을 꾹꾹 눌렀다. 창 아래 풀이 짓이겨져 뿌리를 드러냈다. 결국 홀로 끙끙거리던 에이몬은 제 몸을 블론디나에게서 떨어뜨렸다.
블론디나는 어느새 멀어진 에이몬을 보며 사뭇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이젠 예전처럼 안겨 있지도 않고.’
뜨거운 체온이 빠져나가자 차가운 밤바람이 그 틈을 채웠다.
에이몬은 생각을 다른 데 집중하려는지 고개 돌려 괜히 달만 바라봤다.
블론디나는 달을 보는 에이몬을 응시했다. 짐승의 속눈썹에 하얀 달빛이 아른아른 걸려 있었다.
저도 모를 한숨이 샜다. 어릴 때도 어여뻤던 짐승은 성장하자 더욱 빛났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표범일 뿐인데, 정성껏 그린 명화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
표범이 저렇게 멋있어도 되는 건가.
한참을 달만 바라보던 에이몬이 이내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보석같이 박혀 있는 눈동자가 선연히 빛났다.
「나 오늘 너랑 잘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블론디나는 깜짝 놀라 한쪽 발을 물렸다.
“응? 어? 으응?”
그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표현이 좀 직접적이라 살짝 놀라고 말았다. 목덜미부터 화악 달아올랐다.
이건 다 제 탓이다. 자신이 에이몬을 순수하지 않은 눈으로 훔쳐보고 있어서. 그를 좋아하기에. 그리 느끼는 게 분명하다.
벌게진 얼굴로 어버버 하고 있으려니, 에이몬은 오히려 그런 블론디나 반응에 놀란 듯했다. 뒤로 풀쩍 물러난 까만 표범이 바닥을 펑펑 내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야!」
“어…… 어?”
「오해야!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아니, 절대 없는 건 아닌데! 아무튼! 지금은 그게 아니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에이몬의 말은 가파른 경사처럼 급하고 엉망이 된 퍼즐처럼 두서가 없었다. 당황한 꼬리가 휙휙 움직일 때마다 뽀얀 먼지가 폴폴 날렸다.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블론디나였다. 끔뻑끔뻑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에이몬이 말 하나 잘못했다고 이렇게 당황하다니. 자신이 이상해져도 정말 이상해진 모양이다.
블론디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몬. 진정해. 오해하지 않아. 네가 절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에이몬을 달래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말에 오히려 속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잘라 말할 필요가 있나?」
웅얼거리는 에이몬에게, 블론디나는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튼, 여기서 자고 가고 싶다는 말이지?”
에이몬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을 보며 블론디나가 뒤를 향해 휙휙 손짓했다. 문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에이몬은 약간 주저하다가 이내 결심이 섰는지 경건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몸이 소리 하나 없이 밤길을 걸었다. 별궁을 휘휘 돌아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한 그는, 곧 그림자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에이몬을 구경하던 블론디나가 에이몬을 향해 휙휙 손짓했다. 위기감 없는 손짓에 에이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에이몬이 침대 아래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블론디나는 그의 까만 털을 웃는 얼굴로 응시했다. 태산 같은 몸을 구겨 아래 누워 있는 에이몬을 보고 있자니 심장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블론디나는 예전에 그랬듯, 발로 에이몬의 털을 헤집었다. 털은 부드럽고 몸은 단단했다.
“그런데, 에이몬. 결투할 때 다치지는 없었어?”
결투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으니 몹시 뒤늦은 걱정이었다.
에이몬은 그때 결투를 뒤로하고 곧장 달려왔다고 했다. 그의 몸에서 풍기던 혈향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것이 제 피는 아니라고 말해 왔으나 그래도.
에이몬이 딱 잘라 답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
“혹시 네 입장이 곤란해진 건 아니야? 그날 우리에게 오느라 결투도 마무리하지 못했다며…….”
「곤란?」
에이몬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리고 고개 들어 블론디나의 종아리에 제 뺨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브리디. 이젠 장로님도 내게 뭐라 하지 못해.」
블론디나는 발끝을 흠칫 움츠렸다. 부드럽게 닿아 오는 털이 기분 좋은데, 동시에 근질거리는 감각이 선연했다.
에이몬이 움직일 때마다 종아리 위에서 하늘거리던 잠옷 천이 슬슬 말려 올라갔다. 그의 숨결이 허벅지 위에 맴돌자 시린 소름이 돋았다.
블론디나는 결국 발로 에이몬의 머리를 쭉 밀어 버렸다. 그가 달라붙는 만큼 제 설렘도 심장에 달라붙어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다시 얼굴을 내린 에이몬이 그녀의 발등에 제 뺨을 살며시 기댔다.
「브리디. 이제 내가 수장이야.」
“…….”
「이제 나보다 강한 짐승은 없어. 다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뺨을 블론디나의 살갗에 비비며 에이몬이 기분 좋다는 듯 그르렁거렸다.
블론디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으로 목울대를 꿀꺽 넘기다가 다시 발을 들어 ‘위대한 신수 수장’의 머리통을 가볍게 밀었다.
“그만해. 간지러워.”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제 다리를 끌어안고 문질러 오는 통에 속만 달아올랐다.
‘내 마음도 모르고……!’
에이몬이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들어와서 잔다는 말 한마디에 당황해서 어버버 했는데, 이렇게 하면 어떡하라고.
난 이제 네가 좋아서, 네가 짐승 모습으로 이런 행동을 해 와도 심장이 떨려. 내 속도 모르고. 멍청한 표범 같으니.
인간의 발에 차인 에이몬은 그럼에도 계속 달려들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이마를 발바닥으로 밀어내며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이제 에이몬 앞에서 제 진심을 얼마나 많이 포장하고 얼마나 깊게 숨겨야 하는 걸까.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에이몬의 저런 행동에.
에이몬의 태도는 이전과 같았다. 달라진 게 없었다. 아기 표범이 해 오던 어리광을 성체의 모습으로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제 마음이 달라지자 감정의 색이 변했다. 예전보다 짙고도 야릇하게.
블론디나는 절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누르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왠지 앞날이 험난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에이몬의 까칠한 혀가 종아리를 느릿하게 핥아 왔다. 낯선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블론디나는 결국 에이몬을 뻥 차버리고 말았다.
에이몬이 좋은 건 좋은 거고, 기분이 야릇한 건 야릇한 거다. 블론디나는 이런 감각에 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변태 고양이가!”
블론디나에게 머리를 차였음에도, 에이몬은 기분 좋다는듯 그르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
차창을 스쳐 지나는 나무를 보며, 필립은 괴었던 팔의 각도를 바꿨다.
몇 년 만에 보는 제국인지. 새삼스러운 반가움은 없었으나 감회가 새롭기는 했다.
“많이 변했지요, 공자님?”
“그래요. 많이 변했군요.”
“수도 외곽의 길도 모두 단장되고 중앙 시계탑도 새로 세워졌답니다.”
“그런가요.”
필립 로드슨은 여전히 밖을 응시하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은 제 또래 영식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 대고 있었으나 그다지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다.
로드슨 공작가의 자제이자, 라르트 황자, 아델리아 황녀의 오랜 친구인 필립은 며칠 전 제국으로 귀국한 터였다.
금년, 아카데미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학업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방학에도 제국에 귀국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몇 년 만에 돌아오게 된 제국이건만 기쁨보다는 무료함이 더 컸다.
턱을 괸 필립이 가만히 수도 풍경을 훑었다. 비현실적일 만큼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른함을 품고 있었다.
차창 밖을 스치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블론디나.’
절 당당히 마주하던 선량한 눈빛. 독기라고는 전혀 없던 황녀가 치열한 황궁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사뭇 기대마저 들었다.
필립은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창문가를 툭툭 두드렸다.
아카데미 생활 내내 그녀를 떠올렸다고 하면 거짓이다. 하지만 드문드문 그 말간 얼굴이 고요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구름을 찌를 듯 뻗은 황궁 첨탑을 응시하며 필립은 가만히 웃었다.
“공자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좋은 일까지는 아니고 흥미로운 일 정도는 있습니다.”
몸을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며 필립은 팔짱을 꼈다.
조만간 블론디나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
봄에 들어서는 계절이다. 청량한 바람이 분홍 꽃잎을 창 아래로 후우 불어넣고 있었다.
“블론디나!”
쿵쿵쿵. 누군가 매너도 없이 별궁 문을 쿵쿵 두드렸다.
블론디나는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르트겠지. 그 옆에는 시종이 불안한 눈으로 우물쭈물하고 있을 테고. 감히 황자 전하를 막을 수가 없을 테니.
“들어와, 라르트.”
어깨에 붙은 꽃잎을 떼며 심드렁히 답했다. 라르트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급하게 들어섰다.
그래, 문을 허락도 없이 열어젖히는 것보다야 낫지, 라고 블론디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왔어?”
블론디나의 어깨 위로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열린 문 뒤에 서 있던 라르트의 호위가 그녀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문 뒤로 사라졌다.
오가며 황녀를 마주한 지 10년이 되어 간다. 삐쩍 마른 몸에 거친 뺨을 가졌던 황녀는 성장할수록 선명한 미모를 꽃피웠다. 마치 공들여 그려진 명화처럼 찬란한 아름다움을.
하지만 그런 반쪽 누이의 미모도 라르트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은 모양이다. 라르트는 손에 든 봉투를 다짜고짜 내려놓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루시는 아직?”
“아직. 네가 온 시간을 생각해.”
아직 이른 오전이었다. 블론디나가 평소 밤새 파티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일찍 일어나는 것이지,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아직 한밤중일 터.
하지만 라르트라면 자는 그녀를 억지로 깨워서라도 들어왔을 게 분명하다.
라르트는 하녀를 향해 딱딱 손짓을 보냈다. 차를 내오라는 것이었다. 하녀를 내보낸 라르트가 테이블에 상체를 기울였다.
“혹시 루시가 내 마음을 알고 있나?”
“마음? 무슨 마음.”
무언지 다 알고 있으나 짐짓 놀리듯 물었다.
라르트 황자의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었다.
“알잖아.”
“알긴 뭘 알아.”
“그…… 같이 있고 싶고…… 뭐…… 그런…… 그런 마음.”
“내가 루시가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
블론디나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느긋이 웃었다. 라르트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다.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잖아. 뒷골목 굴러먹던 눈치!”
하지만 하녀가 찻잔을 내려놓자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며 우아한 척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저렇게 소용없는 짓을 왜 할까. 네 언동이 가벼운 건 만인이 다 아는데.
블론디나는 라르트를 향해 가볍게 말했다.
“너 가.”
“어?”
“가라고.”
“어어?”
단정한 말투로 전하는 퇴장 명령에, 라르트는 어어 하기만 할 뿐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다짜고짜 쳐들어온 주제에 뒷골목에서 굴렀다느니,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좋다고 듣고 있겠네. 듣기 싫으니 이만 가, 동생.”
라르트가 눈을 끔뻑이며 더듬거렸다.
“……아니…… 이건 습관이라…….”
“그럼 습관처럼 움직여서 가. 잘 가.”
블론디나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