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42화
세상에. 너 정말 루시 좋아하는구나.
“루시는 괜찮아. 오늘 푹 쉬라고 했어.”
“블론디나, 오늘 좀 마음에 드네.”
“네 마음에 들어 봤자 하나도 안 기뻐.”
심드렁하게 답한 후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르트와의 대화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둘을, 아델라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블론디나를 향한 황제 폐하의 태도가 수면 아래 물풀처럼 부드러워지고, 라르트의 태도 역시 한결 누그러졌다.
라르트의 무례한 언사는 여전하나 친근감마저 배어 있던 것이다.
아델라이는 불쾌함에 입술을 물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블론디나가 제 영역을 점점 옥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신수를 황궁으로 초대하는 것은 어떠한가, 블론디나. 이 기회에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황제의 말에 블론디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뵙게 된다면 폐하의 의사를 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하며.
그 신수께서는 이미 질리도록 오고 계십니다, 폐하. 오셔서 쿠키도 먹고 어제는 제 침대 아래 웅크려 잠도 잤습니다.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에이몬이 드나드는 제 별궁이 황궁 외곽에 처박혀 있는 게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블론디나였다.
라르트는 이미 에이몬이라는 신수가 별궁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빤히 블론디나를 바라보았다.
‘블론디나. 이제 말해도 되지 않나?’
얼굴로 그리 묻고 있었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아무런 말도 없자 애써 퍼뜨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델라이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린 시절, 라르트가 새끼 신수에게 치욕을 당했던 일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그 어린 신수와 블론디나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 역시.
이번 의식제에 초청된 것 역시 그 친분에 기인한 것이라고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입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신수의 힘을 등에 업은 블론디나라니.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그 친분을 숨길 수 있다면 끝까지 숨기고, 결국 신수들이 황궁을 활개 치고 다닌다면 그들을 어떻게든 제 쪽에 넘어오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바라한의 후예를 찾아…….
아델라이 황녀는 불쾌함으로 찌푸릴 뻔했던 표정을 애써 풀었다.
맞은편 라르트는 활기찬 얼굴로 새로운 소식을 늘어놓고 있었다.
“몇 년 전, 타국으로 떠났던 로드슨 공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필립 로드슨. 블론디나를 생일 파티에 초청했던. 붉은 브로치를 선물했던 로드슨 공작가의 공자.
그가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블론디나는 그 멀끔한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반지르르한 귀족 사이에서도 특출한 소년이었다.
그의 고아한 분위기를 회상하며 우습게도 에이몬을 떠올렸다.
‘그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에이몬에게는 못 미쳤지.’
자신이 아는 이 중 가장 아름다운 이는 역시 에이몬이었다.
신수이기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날것의 묘한 매력을 지닌.
티파티가 끝나자 라르트가 다짜고짜 별궁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 절 위한 제의는 아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루시를 만날 기회를 노리는 거겠지.
하지만 오늘따라 심신이 피곤하여 우선 거부했다.
씻고 나와 양탄자 위에 벌렁 누웠다. 아직 어제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루시와 라르트는 아니었지만, 본인은 곰의 위협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지 않았는가.
블론디나는 제 머리카락을 빗질해 주는 이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콧노래를 부르는 루시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블론디나의 배려로 충분히 쉬었다가 저녁이 될 무렵 찾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루시와 함께 마제또도 찾아왔다.
“블론디나! 곰한테 꿀꺽 먹힐 뻔했다면서요! 마제또랑 다시는 못 만날 뻔했다면서요?!”
방 안을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며 흑흑대던 마제또는, 루시의 빗질을 피해 블론디나의 머리카락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하염없이 외친다.
“소문 다 들었어요! 하필이면 신수님들 성장할 때 들어가셔서는! 그날은 저도 둥지에 꼭꼭 숨어 있었단 말이에요! 바보! 바보!”
참새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걱정했어, 마제또?”
“그럼요! 마제또가 걱정하는 인간은 황녀님하고 루시뿐이야! 맛있는 거 주니까!”
날 걱정한 건지, 간식을 걱정한 건지. 아리달쏭했으나 우선 제 머리카락을 헤집는 작은 참새를 톡톡 두드려 안심시켰다.
“걱정해 주어 고마워.”
“응, 응. 다시는 위험한 짓 하지 마요! 마제또는 황녀님 여행 갔을 때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죽어서 못 보면 큰일 난다고!”
“그래그래, 알겠어.”
쨱짹거리는 새에게 다정히 답해 주고는 다시 루시를 향해 눈을 들었다. 마제또 덕에 끊겼던 질문을 건넬 참이었다.
“루시.”
“네, 황녀님.”
마제또와 블론디나의 대화를 들으며 킥킥 웃던 루시가 웃으며 답했다.
“어려운 질문 하나 해도 돼?”
“둘도 됩니다.”
“에이몬과 라르트 중에 누가 더 좋아?”
블론디나가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에이몬과 라르트가 둘 다 루시를 좋아하니 루시의 마음이 새삼 궁금해진 것이다. 루시가 에이몬을 좋아한다 하여 포기할 마음은 없었으나 그래도.
루시는 쉽게 답했다.
“에이몬 님이요.”
“음.”
역시. 블론디나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를 어쩌나. 루시와 연적이 되는 거 싫은데. 내 소중한 루시와.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헤집던 마제또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루시도 참 이상한 인간이네? 에이몬 님을 왜 더 좋아하지? 그 깡패 신수님을?”
블론디나는 마제또 머리를 꾹 눌러 머리카락 안에 다시 넣었다. 그런 후 꺅꺅거리는 참새를 무시하고 다시 진지한 질문을 건넸다.
“그럼 에이몬하고 라르트가 동시에 네게 좋다고 하면 누구를 택할 거야?”
사뭇 개인적인 질문이었으나 루시는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쉽게 답했다.
“라르트 님이요.”
마제또가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뭐욧? 루시는 왜 그래? 에이몬 님이 좋은데 왜 라르트를 택해? 뭐 그래?!”
참새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나 보다. 루시는 손을 뻗어 쿠키통에서 쿠키를 하나 꺼내더니 마제또를 향해 내밀었다.
이거나 먹으며 참견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마제또는 말린 체리에 부리를 콕콕 박으며 참견을 멈췄다.
그제야 블론디나와 루시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졌다.
“루시. 왜 라르트를 택해? 에이몬이 더 좋은데?”
루시는 잔잔히 웃더니 간단히 답했다.
“에이몬 님은 신수잖아요.”
“응?”
“신수님은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걸요. 먹잇감이라면 모를까…….”
“으음…….”
“그리고 전 에이몬 님을 존경의 의미로 좋아하지만, 이성으로서 흠모하지는 않아요. 애초에 그런 마음 가질 수 없어요.”
“왜?”
에이몬처럼 잘생기고 멋진 신수를 왜 좋아하지 않지? 블론디나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묻자 루시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몬 님은, 저와 황녀님을 대할 때 태도가 다르셔요. 그래서…… 아직 제게는 조금 두려운 존재이고…….”
에이몬이 두렵다고? 제 커다란 고양이가 두렵다니, 블론디나는 왠지 에이몬을 변호하고 싶어졌다.
블론디나가 없을 때 에이몬이, 마냥 귀엽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몰랐기에. 이따금 루시를 향해 쏟아 내는 에이몬의 시퍼런 안광을 알아챈 적 없었기에.
하지만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변호하는 대신 심란한 속을 달랬다.
에이몬이 루시를 대할 때 태도가 달랐다니. 그게 혹시 ‘루시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인가. 좋아하니까 행동이 달라지는 거지. 신경 쓰여서.
어쨌든 루시는 에이몬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거지. 에이몬 혼자 짝사랑하는 건가.
‘내 불쌍한 고양이.’
괜히 마음이 안 좋아 블론디나는 입꼬리를 축 내렸다.
“황녀님?”
루시는 그런 블론디나를 의아하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
블론디나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창밖만 응시했다. 까맣게 물든 밤하늘이 오늘따라 높다랗다.
루시와 에이몬 얘기를 하니 에이몬이 더욱 그리워졌다. 얼마 전에 왔다 갔으니 이제 며칠은 안 오겠지? 늘 그랬으니까.
숲으로 찾아가면 어떨까. 위험하니까 안 되겠지.
생각해 보면, 에이몬과 자신의 관계는 몹시 일방적이었다. 그는 이곳을 은밀히 드나들 수 있어도 자신은 그를 찾아갈 수 없다.
저번에도 경험하지 않았나. 아무런 준비 없이 숲에 들어섰다가는 개죽음만 맞이할 뿐이다.
한참을 에이몬을 떠올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몬.”
「왜.」
어디선가 심드렁한 답이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대번 알아차린 까닭이다.
블론디나는 후다닥 창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커다란 짐승이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에이몬?!”
「응.」
에이몬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웅크리고 있을 때도 커다랗던 몸이, 찬찬히 일어나자 더욱 거대해졌다. 들이치던 달빛이 가려져 주위가 어둑해졌다.
어둠 깔린 침실 안에서 블론디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언제 왔어?”
「방금.」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잠행과 은둔은 내 특기라고 항상 말했었잖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고 에이몬이 답했다.
하기야 새끼 표범일 때도 늘 비밀스레 방문하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몸이 저렇게 커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몰래 올 수 있는 걸까.
다시 생각해 보건대, 자신의 별궁이 황궁 외딴 구석에 박혀 있어서 몹시 다행이었다.
“들어올래?”
창문을 더욱 활짝 열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에이몬은 시선으로 창문을 살피더니 조금 머쓱하게 답했다.
「거기로는 못 들어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다. 블론디나는 창문 크기와 에이몬의 체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이 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면 아마 벽의 반은 부숴야 할 것이다.
덩치가 커다래진 에이몬이 새삼 사랑스러워, 블론디나는 슬금슬금 웃음이 났다.
게다가 절 부르지 않고 왜 밖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행동이 귀여워 견딜 수 없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리 와.”
예전처럼 안아 주고 예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그 품으로 뛰어드는 대신 블론디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다가오지 않자 블론디나는 창밖으로 상체를 더욱 기울였다.
“얼른.”
「…….」
에이몬은 한 발짝 뒷걸음쳤다가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주저하는 듯 고민했으나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블론디나를 향해 조용히 다가섰다.
곧 블론디나 품 안에 커다란 짐승이 안겼다. 사실 안겼다고 표현하기는 모호했다. 두 팔 벌린 그녀 품에 에이몬의 머리만 가까스로 안겼을 뿐이다.
블론디나는 그의 목덜미 털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에이몬의 가지런한 털이 긴장한 듯 부스스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표범의 몸체는 단단하고도 매끄러웠다.
이렇게 다시 안으니 알겠다. 에이몬은 에이몬이었다. 체구는 이전과 달라졌으나 부드러운 털도, 뜨거운 체온도 여전했다.
에이몬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문질렀다. 목덜미에 닿는 에이몬의 숨결이 살짝 가빠지기 시작했다. 손아래 닿는 체온도 점점 달아오르는 것 같다.
블론디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몬. 어디 아파?”
「……아니.」
블론디나의 품 안에서, 에이몬은 겨우 웅얼거렸다.
“몸이 뜨거워.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성장…… 성장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숨도 거칠고.”
「신경 쓰지 말라니까.」
품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위협이라기보다는 응석 비슷한 느낌의 울림이었다.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머리에 제 뺨을 비볐다. 동시에 에이몬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보드라운 뺨이 에이몬 몸에 문질러졌다. 에이몬은 안절부절못하고 달뜬 호흡만 내뱉었다. 그의 숨이 아까보다 더욱 가빠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