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정부를 들인다면 (2/106)

2화. 정부를 들인다면

플로리아는 욕실에서 씻은 후, 내키진 않지만 에르앙 백작 부인이 챙겨준 옷을 입었다. 아쉽게도 당장 목을 가릴 수 있는 옷은 이게 전부였다.

그리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에르앙 백작 부인.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수요일입니다, 황후 폐하. 그런데 아까도 물어보셨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벌써 한 시간째. 오늘이 3일 전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받고 싶어서 플로리아는 백작 부인에게 끊임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아, 그랬나요? 내가 오늘 정신이 없군요.”

“아무래도 평소보다 늦잠을 자면 시간 감각이 둔해지긴 하지요. 이제 다 됐습니다.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거울 속에 비친 황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플로리아의 눈에도 지금 모습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그래.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처형장에서는 분명 보잘것없고 초라하기만 했었는데, 모든 게 처음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잠깐.

그렇게 바라던 기회를 다시 얻었건만 도대체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조용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냐?”

“황후 폐하. 안젤리나 님이 지금 급히 별궁으로 와주실 수 있냐고 하시는데요.”

에쉬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녀는 플로리아의 측근 하녀 중 한 명이었다.

안젤리나의 이름을 듣자, 플로리아는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맞아. 내가 안젤리나의 침실에 갔다가 살인자에 반역자로 몰렸었지.’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의 순서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지금 제일 급한 건, 실수든 고의든 안젤리나가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는 걸 피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껏 플로리아는 그녀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핑계를 대고 안 가겠다고 하면 다들 뭔가 의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쉬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곧 갈테니 기다리라 전하거라.”

“예. 황후 폐하.”

에쉬는 곧장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침실을 빠져나갔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플로리아는 시녀를 불렀다.

“저기, 에르앙 백작 부인.”

“예?”

“부탁이 있는데, 임신부에게 좋은 음식을 몇 가지만 빨리 좀 구해줘요.”

에르앙 백작 부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래진 눈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그건 어디다 쓰시게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 안젤리나에게 선물을 좀 줄까 합니다.”

“아.”

덩달아 미소 짓던 에르앙 백작 부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플로리아를 향한 측은함이 섞인 듯했다.

“황제 폐하의 정부까지 살뜰하게 챙기시다니 황후 폐하는 참으로 아량이 넓으시군요. 금방 구해오겠습니다.”

카르티스와 서로 애정이 없다 보니 안젤리나에게 질투심이 전혀 일지 않는다는 말 따윈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에르앙 백작 부인의 말에도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

시녀와 하녀 무리를 이끌고 플로리아는 별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떨렸지만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지금 이대로 안젤리나의 침실로 들어가면 예전과 똑같이 살인자로 몰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미 눈치챈 척 안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안젤리나가 묵고 있는 침실의 응접실 문 앞에 도착하자 플로리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크레티안 경, 내가 말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전달했습니다. 아마 곧…….”

플로리아의 호위기사인 크레티안 바르디 경은 말을 하다 멈추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아, 때마침 오시네요.”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엔 카르티스 황제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음식 심부름을 시킨 직후, 플로리아는 크레티안 경에게도 부탁을 하나 해 두었었다.

지금 재빠르게 황제를 찾아가서 그를 당장 별궁으로 오게 해 달라고.

카르티스는 황후의 부름을 받은 황제치곤 표정이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아무래도 만나자고 불러낸 장소가 별궁, 그것도 안젤리나의 침실 앞이라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

플로리아는 평소처럼 카르티스를 향해 인사해 보였다.

그러자 그가 시선을 위아래로 훑으며 대놓고 그녀가 입은 옷을 살폈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오늘 뭔가 의도를 가지고 이 드레스를 입은 걸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황후?”

카르티스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묻는 듯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애정 없는 황후와의 관계를 굳이 주변에 드러내지 않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정부를 수시로 들이는 게 참 모순적이었지만.

“안젤리나가 잠시 와달라 하기에 임신부에게 좋은 음식들을 좀 챙겨왔습니다. 점심때 연락을 한 걸 보면 함께 식사하자는 뜻 같아서요.”

플로리아는 미리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부탁한 음식들이 담긴 바구니를 내보였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굳이 날 부른 이유는 무엇이오?”

“태아에게 아버지의 음성을 들려주는 게 제일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함께 대화하다 보면 좋은 태교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플로리아가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오묘하게 변하는 카르티스의 표정을 바라봤다.

“듣자 하니 요즘 바쁘다는 이유로 별궁에 발걸음도 뜸하시다던데……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셔야지요. 황제 폐하의 아이이지 않습니까?”

플로리아는 일부러 뒷부분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내가 이렇게 챙겨주긴 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닌, 당신과 안젤리나의 아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

카르티스도 그 말투를 느낀 건지 잠시 미간이 일그러졌다 펴졌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를 따라온 이들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 보니 그는 플로리아의 제안을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다른 핑계를 대고 굳이 어색하게 세 사람의 식사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됐지만, 지금 그녀가 제안하는 건 누가 봐도 그럴 필요까진 없는 가벼운 자리였다.

괜히 거절하면 카르티스 혼자만 매정한 황제가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좋소. 오늘은 함께하지.”

셋이서 함께하는 시간이 그에게 즐거울 리 없었다.

난처하다는 듯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관찰하는 게 플로리아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 점심 식사 자리가 아주 끔찍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식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먼저 앞장서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

쨍그랑—.

플로리아가 안젤리나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전과 똑같이 유리 화병이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이번엔 카르티스가 먼저 반응하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를 바라보는 안젤리나의 눈빛은 어떨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플로리아도 급하게 뒤를 따라 들어갔다.

“……화, 황제 폐하?”

역시나 예상한 대로 카르티스를 바라보던 안젤리나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바닥은 유리 파편이 튀어 엉망이 되었고 방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하녀의 뒤통수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폐하께서 어떻게…….”

“안젤리나, 이게 무슨 일이야?”

플로리아는 자신도 전혀 예상을 못한 상황이라는 듯, 안젤리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저 하녀의 머리를 이 화병으로 내려친 건 아니겠지?”

“…….”

이어지는 플로리아의 말에, 안젤리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 아이가…….”

“그래, 말해 보거라.”

카르티스는 황후에게 억지로 하던 것과는 다르게 안젤리나 곁으로 다가가며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저 하녀가 저랑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진 하녀였는데…….”

안젤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아이와 바꿔치기하려 한다는 말을 하다가 저에게 들켰습니다.”

“……뭐?”

카르티스는 심하게 분노한 듯 미동도 없는 하녀를 노려봤다.

“그게 사실이더냐?”

“예. 정말입니다. 황제 폐하의 아이가 탐난다는 말을 감히 제 앞에서…….”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게 정말 이 일의 진실이란 말인가?’

플로리아는 이렇게 상황이 틀어진 게 자신이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와는 묘하게 달라진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나서다간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저 하녀는 왜 저렇게 된 것이냐?”

“모든 사실을 들키고 나자 저를 죽이겠다고 먼저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어를 하려다 그만 화병으로 내리쳐서…….”

그 말을 하며 안젤리나는 정말 울음이 터지기라도 한 듯 제대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저 하녀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군. 네가 울면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 그만 진정하거라.”

카르티스는 눈물을 흘리는 안젤리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는 자신이 그동안 알던 카르티스가 이렇게까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나 싶은 이질감이 들었다.

지난 몇 년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식사는 힘들 것 같군요. 에르앙 백작 부인!”

결국 보다 못한 플로리아는 서둘러 자신의 시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챙겨온 음식들을 바구니째 내려놓게 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플로리아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카르티스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게 전부요? 많이 놀란 사람에게 진심 어린 위로는 못 할망정……. 황후는 역시 매정한 사람이군.”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플로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카르티스와 안젤리나를 돌아봤다.

“그럼 제가 뭘 더 할까요? 뭘 바라시죠? 하녀의 시신이라도 수습할까요?”

그녀는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뱉어버렸다.

“됐소. 가 보시오.”

그러자 카르티스도 냉정하게 답했다.

“예. 그러지요.”

최대한 차분하게 인사를 한 후 침실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카르티스 옆에 안기듯 매달려있던 안젤리나가 이쪽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뭐지? 방금 그 표정, 분명 본 적이 있는데…….’

잠시 고민하던 플로리아는 문득 어느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회귀하기 전, 처형장에서 봤던 그 미소가 분명했다.

그녀를 누명 씌운 후 보였던 만족의 미소.

그 모습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젤리나 때문에 처형장에서 밧줄에 묶인 채 눈물을 흘리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언제가 되더라도 모든 진실을 밝히고 말리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플로리아는 몸을 휙 돌려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

그날 저녁. 플로리아는 늦은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인지 괜히 하루종일 싱숭생숭한 감정이 교차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이 들자, 오늘 낮 안젤리나 곁에 있던 카르티스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내게도 정부가 있다면 황제에게 맞설 힘이 생길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스가 안젤리나에게서 안정을 찾듯이, 곁에서 힘을 주고 그들에 대한 복수까지도 돕는 존재.

혼자서 끝없는 고민하던 플로리아가 급히 밖에 있던 측근 시녀와 하녀를 불렀다.

“예. 황후 폐하.”

에르앙 백작 부인과 에쉬가 급하게 들어오며 동시에 대답했다.

“혹시 말입니다.”

“네?”

“내가 만약…… 정부를 들인다면 제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나요?”

“정부라면, 설마 황제 폐하께서 들이신 그…… 정부요?”

“그래, 에쉬.”

“……저는 일단 한 명의 제국민으로서 찬성입니다! 무슨 이유든지 저는 무조건 황후 폐하의 편이니까요.”

조용한 에르앙 백작 부인과는 다르게 에쉬가 먼저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저도 물론 황후 폐하의 뜻을 존중하겠지만…… 조금 걱정은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들려오는 에르앙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라도 그 정부라는 자리가 황후 폐하의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하지만 장담하건대 황후 폐하께서 정부를 들인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이 제국 안에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황후 폐하의 어진 품성에 대한 소문도 자자한 데다, 이미 황제 폐하 곁엔 정부가 여섯인걸요.”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잠시 고민하던 플로리아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에르앙 백작 부인 똑바로 바라봤다.

“나도 황제 폐하처럼 정부를 들여볼까 합니다.”

“네?”

“그대들의 얘기를 들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폐하의 집무실로 가야겠습니다. 에쉬, 채비를 도와다오.”

그 말을 끝으로, 플로리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