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녀가 회귀한 이유
플로리아 아리안느 황후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꿈만 같았다.
‘내가 죽는다니? 그것도 처형을 당해?’
처형장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 빠진 몸을 살짝 일으켰다.
전보다 무거워진 고개를 들고, 밧줄에 온몸이 묶인 채 눈앞의 황제를 바라봤다.
카르티스 프로슈트 황제. 이 상황에서도 늘 그렇듯 그의 눈빛은 그저 무덤덤했다.
크게 감정 동요도 없고 애틋하거나 사랑하는 느낌도 없는 눈빛.
플로리아가 싫은 건 아니지만 좋지도 않은 그런 시선.
지난 3년간 봐온 것이었다.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서운함이 밀려오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저 사람에게서 뭘 기대한 걸까? 설마 날 도와주길 바란 거야?’
아니, 카르티스는 그럴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플로리아를 걱정할 사람이었다면 그동안 그렇게 수많은 정부를 궁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황후의 마음과 상처 따윈 관심 없는 무정한 황제였다.
플로리아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 곧 자신의 목을 조여올 올가미 같은 밧줄을 바라봤다.
허공에 매달린 그 모습이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두꺼운 저 밧줄이 목에 감기면서 숨통이 조여올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시선을 느낀 플로리아는 자신을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한 여자와 눈이 닿았다.
안젤리나 페일. 그녀는 가장 최근에 카르티스 황제의 정부로 들어온 갓 스물을 넘긴 젊은 여자였다.
처형장을 바라보는 안젤리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속이려 해도 그 특유의 독기는 여전히 남은 것 같았다.
이런 여자를 황궁에 들인 황제의 안목을 욕하고 싶었지만, 그도 어쩌면 전혀 몰랐으리라.
플로리아 본인도 3일 전까지만 해도 안젤리나가 순수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처형장에 있게 된 이유도 사실 전부 안젤리나 때문이었다.
본인의 상황과는 다르게, 태연한 표정의 안젤리나와 카르티스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에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역겨워.’
어느새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게 죽는 것보다도 싫어진 플로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일부러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원치 않게 그 날의 기억이 더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3일 전.
플로리아는 정부들이 묵는 별궁으로 급하게 와달라는 안젤리나의 부탁에 기꺼이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지?’
보통 황후들은 황제의 정부와 사이가 좋지도 않을뿐더러, 품위 유지를 이유로 정부를 찾아가는 일도 없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플로리아는 안젤리나가 카르티스 황제의 공식적인 6번째 정부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함해 모든 정부와 잘 지내는 편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플로리아 자신과 카르티스 황제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공작 가문이었던 플로리아 집안과 황실 집안의 계약으로 묶인 정략결혼.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들이는 정부들이 딱히 싫거나 밉지도 않았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한 달 전에 들어온 안젤리나는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이미 카르티스의 아이를 품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플로리아는 종종 그녀와 식사도 하고, 임신부에게 좋은 것들도 챙겨주며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고 있었다.
“안젤리나? 무슨 일 있느냐?”
어느새 별궁에 도착한 플로리아가 자신을 뒤따라온 시녀와 하녀들을 바깥에 남겨 두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녀는 안젤리나의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플로리아가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은 직후였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곳을 쳐다보자 바닥에 깨진 유리 화병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안젤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화, 황후 폐하…….”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저, 저 아이가…….”
연한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바닥에 널브러뜨린 채 손끝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젊은 하녀 한 명이 침실 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저 하녀가 저를 모욕하고 능멸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예. 정말입니다.”
“아니, 사실이라 해도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을 한 거야?”
“…….”
“설마 지금 저 화병으로 하녀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야?”
쓰러져 미동도 없는 하녀의 머리 뒤쪽으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한 플로리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당장 궁의를 불러야겠다. 에르앙 백작 부인!”
“제,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깜짝 놀란 플로리아가 바깥의 시녀 이름을 크게 부르자, 안젤리나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럼 대체 누가 그랬단 말이야?”
“그야…… 황후 폐하께서 그런 것 아닙니까?”
“뭐?”
플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안젤리나 쪽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꺄아! 저리 가세요! 당장 저리 가!”
그리곤 옆에 있던 침대에서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안젤리나, 내가 너를 아무리 어여삐 여겼다 해도 지금 뭐하는 짓이야!”
플로리아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안젤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좀 전과는 다르게, 하녀와 시녀들뿐만 아니라 호위기사들까지도 모두 순식간에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플로리아는 갑자기 생긴 상황에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 꺼내입은 드레스가 목 끝까지 올라오는 디자인이다 보니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남은 이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서둘러 침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못 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안젤리나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황후 폐하께서, 제 하녀를 죽였습니다!”
***
에르앙 백작부인을 포함해서 플로리아의 최측근들은 누구도 안젤리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평소 행실로 봤을 때 플로리아는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누군가를 함부로 죽일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젤리나의 거짓말을 카르티스 황제가 믿어버렸다.
아니 믿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임신 중인 제 하녀를 죽였어요.”
플로리아는 아무리 카르티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믿을 줄 몰랐다.
심지어 플로리아도 그 하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안젤리나의 입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된 거였다.
“그 하녀가 품은 아이가 황제 폐하의 핏줄일지도 모른다면서, 일부러 제 앞에서 잔인하게…….”
안젤리나가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도 카르티스가 알아서 현명하게 판단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리 날 사랑하지 않아도 일국의 황제니까. 그 정도 판단력은 가졌으리라고 여겼다.
“저를 보면서 너도, 네 아이도 죽일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심지어 그 끝엔 바람둥이 황제 폐하를 죽일 거라는 말까지……. 아무리 흥분해서 막 뱉은 말이어도, 이건 반역 아닌가요? 너무 무서워요.”
하지만 안젤리나의 거짓말은 멈출 줄 몰랐고, 기대와는 다르게 카르티스는 깊은 고민 없이 단숨에 정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플로리아는 크게 절망하진 않았었다.
어찌보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에 대한 일종의 배려일지도 모르니까.
한편으론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정부의 편을 들어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내게 관심이 없는 분이라지만, 반역을 꾸민다는 거짓을 믿을 리가 없잖아? 그래, 조만간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러나 그다음 날, 카르티스는 플로리아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명하며 딱 이 말만을 건넸다.
“황후, 이게 그대의 운명이니 받아들이시오.”
받아들이라는 그 말이 플로리아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차라리 왜 그랬냐고 그게 정말이냐고 따져 묻기라도 하지. 플로리아는 그의 무덤덤한 말투에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힌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침실에선 쓴 적도 없는 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안젤리나와 카르티스 황제를 죽이기 위해, 플로리아가 살인에 능한 용병과 접촉 했다는 내용이었다.
“…….”
전부 안젤리나가 꾸며낸 짓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플로리아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그저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해도, 남편이 수시로 정부를 들이는 걸 보면서도 괜찮다는 말로 견뎌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초라한 황후만이 남아있었다.
플로리아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카르티스와 안젤리나 두 사람이 너무 괘씸했다.
그러나 그들의 변명 한마디를 듣기도 전에 처형 날짜는 급하게 잡혔다.
***
처형장에서 한참 동안 두 눈을 감고 있다가 뜨자, 플로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안젤리나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치는 게 보였다.
물론 그 미소는 아무도 모르게 순식간에 다시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을 보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젤리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플로리아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목에 밧줄이 감겼다.
그동안 살면서 죽음이 두려운 적은 없었는데 정작 그게 코앞으로 다가오자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하필 그 순간, 구석진 곳에 있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부쩍 작고 초라해 보였다.
심지어 다음 처형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 두 사람의 몸에도 밧줄이 감겨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플로리아에게 반역이라는 죄가 덧씌워지자 그녀의 가문 전체에 그 대가가 따라왔다.
두 분은 이미 많은 눈물을 흘린 건지 멀리서 봐도 눈가가 발갛게 부어있었다.
플로리아는 자신의 아버지인 파슈테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태어나서 오늘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았다.
하필 두 분께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한때는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며 기뻐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플로리아는 이 모든 게 그저 꿈이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울다가 실신한 듯 쓰러지는 어머니 라니에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죽을 만큼 괴로웠다.
이제 그녀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딱 3일 전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야속하게도 그녀에게 처형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멀지 않은 종탑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카르티스가 누군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아까보다 목에 감긴 밧줄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플로리아의 발밑의 높은 받침대도 순식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빠져버렸다.
가볍게 목을 조이던 밧줄은 어느새 작은 틈도 없이 그녀의 목 주변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크헉……. 컥…….”
플로리아는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발버둥쳤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누가 좀 살려주세요.’
마음속으로 간절히 애원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아으, 머리야.”
참기 힘든 두통에 플로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의 침실이었다.
처형당해서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녀는 평소랑 똑같은 황후의 침실에서 잠이 깼다.
“황후 폐하, 일어나셨어요?”
때마침 에르앙 백작 부인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작 부인?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다급한 플로리아의 물음에 그녀가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오랜만에 늦잠도 주무시고.”
“네?”
“가끔 그런 날도 있으셔야죠. 사람이 어떻게 매번 똑같이 사나요?”
시녀의 말에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껏 늦잠을 자본 적이 없는데 해가 중천에 뜬 시각임이 분명했다.
‘정말 내가 이 시간까지 잤다고? 그보다 처형은? 내가 죽은 게 다 꿈이란 말이야?’
플로리아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에르앙 백작 부인이 그녀 곁으로 다가오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목에 그건 뭔가요?”
“목이라니? 왜요?”
백작 부인의 말에 플로리아는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자 목에 선명한 피멍들이 보였다.
가로로 굵은 줄이 몇 개 그어진 걸 보면 이건 분명 처형장의 밧줄 자국이었다.
‘그럼 전부 꿈이 아니란 얘기야?’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아무래도 어젯밤 자면서 생긴 흉인 거 같은데…….”
에르앙 백작 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플로리아의 목을 살폈다.
“어쩌죠? 많이 파인 드레스를 입으면 다 보일 텐데 큰일이네요.”
플로리아가 서둘러 두 손으로 목을 가리자, 에르앙 백작 부인은 급하게 옷장을 뒤적였다.
‘이 자국을 보면 꿈은 아닌 것 같은데…….’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이전보다 더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 속도 모르고 옷장만 뒤적거리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한참 만에 어떤 옷 한 벌을 꺼내 들고 플로리아의 앞에 다가와 섰다.
“황후 폐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오늘은 이걸로 입으셔야겠네요.”
그녀가 내민 옷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드레스였다.
‘이 옷은…….’
이건 분명 플로리아가 안젤리나를 만나러 가던 날 입었던 그 옷이었다.
며칠 전임에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 옷이 1년 전 플로리아의 생일에 카르티스가 보낸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플로리아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라는 생각에 그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었다. 카르티스가 준 옷이라서 더 싫기도 했다.
그런 옷을 처음 입었던 날이다 보니 그녀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순간, 플로리아는 엉켜있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3일 전으로 회귀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