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21화 (122/171)
  • 제121화. 벼랑 끝에서 (1)

    물가에서 목을 축이던 새들이,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놀라 하늘로 솟아올랐다.

    앞장서 달리는 기사들의 뒤로 새하얀 마차가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를 건넜다. 왕실을 상징하는 보랏빛 휘장을 늘어뜨리고 있는 마차를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보았다.

    마차에 앉아, 제라니아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을 구경했다. 햇살이 수면 위에 닿아 파르라니 부서졌다.

    남부 끝단에 자리한 커다란 강, 블로드를 끼고 발전한 상업 도시 센크라였다.

    시내로 들어서자, 대로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어 삐죽이 솟은 회색 건물들 사이사이로 비좁은 골목들이 보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마차를 보고 놀라 골목 안쪽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도심에 자리한 화려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우아한 금색 무늬가 새겨져 있는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바깥으로 나온 프란츠가 뒤돌아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이 그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얹혔다.

    천천히 걸어 나오며 제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기한 무언가를 보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시선이 퍽 민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제라니아는 명주로 만든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최근 프란츠가 건넨 선물이었다. 상의와 치맛단, 소매에 은빛 자수가 그려져 있는 세련된 드레스가 걸음마다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보라색은 국왕을 상징하는 색인데, 제가 이런 걸 입어도 괜찮을까요?’

    ‘주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잊은 겁니까?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귀한 걸 주시니 답례로 뭘 선물할지 고민하게 된다고요.’

    ‘나는 당신이 주는 거라면, 길가에서 주운 돌멩이라도 소중합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긴 한데,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요!’

    원래도 언변이 유창했지만 유독 선물을 건넬 때마다 프란츠는 매끄럽게 혀를 놀렸고, 제라니아는 얼떨결에 휘말리기를 반복했다. 진심으로 거절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사들이 호위하듯 마차에서부터 정문으로 가는 길의 양옆에 일렬로 섰다. 그들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제라니아는 저택 안으로 총총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시선이 차단되자,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살며시 느슨해졌다.

    휴가 한 번 나오는 게 이렇게 요란스러울 일인가. 왕족도 참 힘들구나.

    제 처지를 잊고 제법 태평한 생각을 하는 제라니아의 옆얼굴을 프란츠가 무심히 눈으로 훑었다.

    안내를 받아 4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곧 넓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흰색 벽지로 도배를 한 방에는 커다란 침대와 더불어 끝이 동그랗게 말린 곡선형의 받침을 두고 길게 다리를 세운 하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보였다.

    하얀 실을 바탕으로 화려한 꽃무늬를 짜 넣은 푸른색 융단이 한가운데에 깔려 있었다. 탁상 위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벽에는 도시의 전경이 그려진 그림이 자리했다.

    바로 맞은편에 마련된 커다란 창문 너머로 맑은 하늘과, 그 아래에 깔린 수많은 지붕들이 차곡차곡 시야를 채웠다.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 만큼 시원한 풍경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창틀에 손을 얹고 바깥을 내다보는 제라니아의 눈이 청명하게 반짝거렸다. 프란츠가 성큼성큼 다가가 뒤에서 제라니아의 허리를 감싸 안아 살짝 뒤로 잡아당겼다.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프란츠의 품에 안긴 채로 제라니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무 거창한 것 같아요.”

    “몰래 밖에 나가자는 겁니까.”

    “시내를 돌아다닐 때만요. 제롬 경이랑 비앙카 경만 데리고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비앙카는 최근 제라니아의 호위로 들어온 여성 기사였다. 성실하고 밝은 성격에 실력 역시 출중한 인물로, 제롬과도 합이 잘 맞았다. 비앙카의 친화력이 뛰어난 덕인지 그 앞에서는 제롬도 제법 말수가 늘어나곤 했다.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그런데 국왕 폐하랑 나가면 무조건 주의를 끌 것 같은데요.”

    아까도 프란츠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숨을 멈춘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던 정적은 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와르르 무너졌고, 흐린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그가 존재감이 있다 못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왜 자신에게 그토록 목을 매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또 가발이라도 써야 합니까? 그때처럼.”

    “이번엔 갈색으로 해볼까요?”

    키득키득 웃으며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랑 아이라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담아 중얼대자 프란츠는 아주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몸이 바투 붙어 있었는지라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이를 낳은 뒤로 둘이서 여행을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실에서 소유하고 있는 별장에 놀러 갔던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대개 아이들과 함께 갔다.

    오랜만에 잡은 사흘간의 휴가를 단둘이서 오게 된 이유에는 프란츠의 의지가 컸다. 충분한 의논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괜히 눈치를 보게 만든 것 같아 빠르게 덧붙였다.

    “다음에는 다 같이 와요.”

    고개를 들어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조각상 같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는 푸른 시선은 무척 깊어,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가 자신을 대하는 것에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해도 좋을 텐데. 그런 마음을 담아 프란츠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다정한 손길을 찬찬히 음미하며 프란츠는 눈을 감았다.

    점심을 먹은 다음, 두 사람은 다시금 마차를 타고 시내를 가로질렀다. 도시의 외곽 부근을 흘러가는 거대한 강, 블로드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챙이 넓은 모자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주었다. 남부라 그런지 따사로운 날씨를 배경 삼아, 제라니아는 다리 위에 서서 저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강줄기를 응시했다.

    제 존재도 잊어버린 건지 말없이 강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제라니아의 뒤통수에 프란츠는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기분 탓일까, 제라니아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건.

    제라니아가 넓은 장소를 좋아하는 건 그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성정인 만큼 결혼 전에는 제법 국내를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열두 살에 혼자 다른 영지로 도망을 감행했을 정도니 나이를 먹고는 더했으리라.

    프란츠는 때때로, 제라니아가 정말 지금에 만족하고 있는지에 관해 고민하곤 했다.

    제라니아는 답답한 것을 싫어했고, 이 나라에서 왕족만큼 갑갑한 자리는 없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언제나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삶이었다. 예전처럼 암살의 위협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번거로운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을.

    “프란츠.”

    경칭 없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정신을 차렸다.

    “이 끝에 가면 바다가 있을까요?”

    차분하지만 밝은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앞을 보고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 흥미가 있습니까.”

    크레이츠 왕국은 내륙에 위치한 장소인 만큼 바다와는 거리가 멀었고, 때문에 해양을 이용하는 주변국들과 달리 무역에는 다소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대다수의 국민은 바다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제라니아 역시 책으로 접한 게 다였다.

    “한번 가보고 싶긴 해요.”

    아이작 바이첸은 딸의 의사를 존중하는 편이었으나, 제라니아가 국외로 나가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외국의 정세가 혼란하던 시절인 만큼 제라니아는 아버지의 걱정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왕족이라 마음대로 국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곧 타국의 사절단이 수도를 방문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외국을 방문하는 일이 전보다는 덜 어려워질 것이다. 게다가 둘 다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이니까.

    “강이랑 비슷한데 물이 짜다고 하더라고요. 이 강보다도 훨씬 넓다는데, 직접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요.”

    프란츠를 돌아보며 제라니아는 눈가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뻗는 여인의 등 뒤로 강바람이 몰아치며 옷자락을 펄럭거렸다.

    프란츠는 천천히 걸어 제라니아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손을 붙잡자 제라니아가 조금 더 앞으로 걸어와 그와 나란히 섰다.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여 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했다.

    제라니아가 살며시 입을 달싹거렸다.

    “나중에, 같이 갈래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람에 쓸려나갔다. 사라지기 전, 가까이에 있는 한 사람에게만 간신히 닿았다.

    부피를 키워가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쑥 꺼졌다. 들쭉날쭉한 제 마음이 우스워 프란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소가 무심한 인상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말간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미래를 약속하는 당신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이제 그만 멈춰 설 만도 한데, 감정은 왜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걸까.

    “물론입니다.”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런데, 넓은 걸 보고 싶다면 여기보다 호수가 많은 지역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양념을 곁들여 구운 사슴고기 요리를 나이프로 썰어내던 프란츠가 의아한 듯 말했다.

    실컷 강을 구경한 뒤, 센크라 외곽에 있는 커다란 숲으로 향한 두 사람은 기사들을 끌고 한참 동안 그곳을 걸어 다녔다. 가을을 맞아 제법 알록달록해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무들이 사방에 지붕을 드리웠다.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늘과 빛이 섞여 든 풀밭에 발을 디뎠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햇빛이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숲의 풍광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마치 마법처럼.

    “사실 호수보다는 강을 좋아해요.”

    제라니아의 포크가 온갖 허브를 넣어 만든 청어 절임을 푹 찍었다.

    “어째서입니까?”

    “막혀 있는 것보다는, 어디로든 뻗어 있는 게 좋아서요.”

    그 말과 함께 제라니아는 절임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음식을 씹어 넘긴 그가 되물었다.

    “당신은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굳이 따져보면요.”

    끈질긴 공세에 프란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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