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20화 (121/171)
  • 제120화. 6년 후 (7)

    새하얀 햇빛이 길쭉한 창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에 엎질러진 햇살의 끝자락이 누군가의 발치에 닿았다. 원형으로 된 테이블에 이피나스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선이 그어진 신관복을 입은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의 회의였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요.”

    공석인 아비스를 대신해 이피나스 중, 제일 고참인 단테가 회의의 종결을 선언했다.

    아비스 와이엇은 지금 전국의 신전을 순회하고 있었다. 2년마다 한 번씩 나가는 정기 시찰이었다. 그 바탕에는 민심을 달래고 신전의 위상을 떨치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살아 있는 기적. 아비스 와이엇을 수식하는 호칭은 많았다.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업적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으로 25년 전, 역병이 창궐하던 당시를 손꼽는다.

    당시 그는 압도적인 치유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특히 페네라 신전에 몰려든 수백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치유했던 순간은 아직까지도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간간이 오르내렸다.

    역병이 끝난 뒤, 그는 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신전의 결속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말 이 많은 이들을 전부 파견할 생각입니까?”

    “왕실에 보고를 해야 하니, 보이는 숫자라도 많아야 하지 않겠나.”

    대신전의 운영에 관한 몇 가지 논의 사항을 제치고, 마지막에 나온 안건은 바로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그림자를 조종해 사람을 납치하는 정체불명의 마법사를 찾아내고, 실종자들의 행방을 알아내라는 전언.

    왕실에서 보내온 공문의 길이는 턱없이 짧았다. 별다른 단서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나, 정식으로 문서를 보낼 정도라면 사건을 꽤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막 수색대의 편성을 논의하는 일을 마무리했다. 고작 마법사 하나를 상대하는 일이라지만, 공식적으로 들어온 협력 요청이니만큼 구성에 꽤 많은 신경을 썼다.

    “수색에 열과 성을 다해야겠군요. 사라진 사람들도 찾고, 신전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헐렁하던 평소와 달리 벤자민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힐끗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요즘 날씨가 참 좋은데, 이 화창한 날씨를 두고 술래잡기나 하고 있어야 하는 신세들이 딱하지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히죽 웃는 얼굴로 농을 거는 벤자민을 딜런이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자네는 또 그러냐며 잔소리를 하는 딜런과 가볍게 실랑이를 하는 벤자민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점잖게 둘을 말리는 세드릭과 단테와는 달리 에이르는 팔짱을 낀 채로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에이르를 돌아보는 세드릭의 시선이 온화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영롱한 빛을 머금은 호박색 눈동자가 살며시 깜빡였다. 제 동료들을 돌아보던 그가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경전에 나오는 《세 명의 신관》을 기억합니까?”

    다소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에 모두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곧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그 이야기는 경전에 수록된 일화 중에서도 유명했다.

    신을 섬기는 신관 셋이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그들이 머무는 신전에 어떤 나그네가 방문한다. 산발한 머리와 군데군데 멍과 찢긴 상처,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에게 쫓기고 있다 말했다.

    첫 번째 신관은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와야 한다는 신의 가르침대로 나그네를 아무도 찾지 못할 신전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주었다.

    두 번째 신관은 빗줄기를 뚫고 방문한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나그네를 보지 못했다 거짓말을 했다. 이는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신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사내는 신관의 말을 믿지 않았고, 나그네를 내놓으라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마지막 신관은 장식대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을 꺼내 사내를 찔러 죽였다.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보며 두 명의 신관은 칼을 든 신관을 타박했다. 신을 섬기는 몸으로 살인을 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는 질책에 마지막 신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 신께서는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하라 하지 않으셨던가. 나는 그에 충실했을 뿐이네.

    검을 내던진 신관이 나그네를 부르며 앞장서서 방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방이 그들을 반겼다. 놀란 셋이 뒤를 돌아보자, 쓰러져 있던 남자 역시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간결한 이야기인 만큼 해석의 여지는 다양했는데, 나그네의 정체가 주신이리라는 해석이 압도적이었다. 자신을 섬기는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신관은 규칙에 충실한 자, 두 번째 신관은 상황에 따라 예외를 두는 자, 마지막 신관은 규칙보다도 결과를 중시하는 자로 해석되었다.

    주신이 아무런 평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결국 어떤 신관의 방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해석이 분분했다.

    “최근 내게 그에 대한 대답을 묻는 이가 있더군요. 그래서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이 거의 없던 조용한 예배당에서 묵념하는 신관을 보았다.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던 중 여인은 불쑥 질문했다. 어느 신관의 말에 공감이 가는지에 대해서.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듣는 일화이며 질문이었다. 세드릭은 온화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두 번째 신관에게 마음이 갑니다.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의 예외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딜런은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했다.

    “당연히 첫 번째 신관이 아닌가. 규칙이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걸세. 예외를 두다 보면 끝이 없지. 일관되지 못한 자는 누구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해.”

    “나는 모두 다 조금씩은 이해가 되는군. 굳이 한 명을 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네.”

    단테는 연륜을 발휘해 점잖게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제법 예상대로의 대답들을 들으며 에이르는 제게 질문을 던진 여성 신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명하신 이피나스께서는, 어떤 길을 선택하실 건가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에게서 묘한 예감을 느낀 에이르는 가볍게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듯 여인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손끝에서 흘러들어 오는 생각을 읽고도 그는 무표정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신관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남편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면서도, 힘이 없고 아이들이 있어 견딜 수밖에 없는 가엾은 이가.

    벗어날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이후에 따라올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감수하고 이혼을 종용하든가, 신전으로 도망친 뒤 그 남편을 배척하도록 요청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면, 그 남편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든가.

    거기까지 읽어내고도 에이르는 침묵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본인의 입장에서 적당한 대답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닻을 내린 것처럼 입술은 점점 무거워져만 간다. 괴물과 신의 현신은 종이 한 장 차이만큼 얄팍하고 애매모호했으므로.

    평범한 불행의 이야기였다. 별것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건, 자신이 그러한 운명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벤자민 산드리아.”

    유일하게 대답하지 않은 이에게 에이르는 조용히 질문했다. 가만히 턱을 매만지는 벤자민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글쎄요, 저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가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문밖에서 다음 일정을 고하는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피나스 다섯은 가만히 시선을 교환했다.

    “자자, 일어나죠.”

    능청스럽게 웃으며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르는 그런 그의 등에 제법 오래 시선을 두었다.

    * * *

    “그래서, 이번에 아카데미 관련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사흘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지 뭐야. 밖에 나갈 시간도 없더라.”

    날이 이렇게 좋은데.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제라니아는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덕분에 아이라랑 제니스한테 나중에 엄청 혼났어. 하필이면 잠깐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을 때 와서 말이지. 어머니가 죽은 줄 알았다면서 울상을 짓는데,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방금 전보다 살짝 빨라진 목소리, 단아한 얼굴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맞은편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제라니아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던 크리스토퍼가 툭 말을 던졌다.

    “즐거워 보이네.”

    “…네가 보기에도, 내가 너무 들떠 있어?”

    제라니아가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며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그들은 꽉 닫혀 있는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주변에 시종이나 시녀를 두지 않는지라 방에는 단둘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크리스토퍼는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잘 단련된 몸도 그렇지만, 서른이 넘어가면서 그는 한층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 되었다. 눈가를 곱게 휘는 남자의 눈빛이 그윽했다.

    “제니스 전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이라 전하는 너를 꽤 닮은 것 같아.”

    “리암도 그런 소리를 하더라. 그렇게 닮았어?”

    “응. 특히 겁이 없으신 점이. 국왕 폐하 머리 위에 올라가는 배짱을 아무나 부리지는 않잖아.”

    “…내가 그렇게 겁 없는 이미지야?”

    크리스토퍼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까지 그럴 거냐고 한탄 섞인 목소리를 내뱉던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 각하는 여전하셔?”

    “아버지야 뭐.”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제라니아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겼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묻던 제라니아는 네이선이 약혼을 했다는 말에는 꽤 놀랐다.

    벌써 그렇게 컸나. 스물두 살이니 슬슬 그럴 나이이기는 하지.

    루크도 4년 전인가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던가. 누군지 몰라도 그 가엾은 여자를 위해 묵념해야 한다며 혀를 차던 코델리아를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나지막이 웃었다. 따라 웃는 크리스토퍼를 응시하던 제라니아가 무심코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친구 사이라면 가볍게 던질 만한, 그저 의례적인 질문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의 표정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가 물감을 덧칠한 듯 짙어졌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궁금해?”

    낮아진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상당히 놀랐지만, 제라니아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면 미안해. 묻지 않을게. 결혼을 재촉하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바로 사과를 건네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크리스토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알아. 그냥, 아직은 별생각이 없어서 그래.”

    이러다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르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크리스토퍼는 별것 아닌 일인 양 질문했다.

    “그러는 제라니아, 너는 어때. 지금 행복해?”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고도 가벼운 한마디였다. 최대한 무게를 덜어내려 애쓴 그의 노력이 통했을까, 제라니아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응, 물론이지.”

    꾸밈없는 진심이 담긴 대답이 날뛰려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크리스토퍼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럼 됐어.”

    나는 그거면 돼. 엷게 웃어 보이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제라니아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비슷한 느낌을 어디선가 받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의문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상대가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을 굳이 캐낼 생각도 없었거니와, 알아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뻗어가는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의미 모를 작은 의심을 마음 한구석에 남겨둔 채로, 담소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어쩌다 떠오른 사소한 의문 하나 정도는 무리 없이 가라앉힐 만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