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1화 (42/171)
  • 제41화. 각자의 사정

    곧바로 엘레나에게 편지를 써, 서부 쪽 영지들에 있는 가문의 리스트를 추렸다. 프레망가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집안이기도 했고 그만큼이나 엘레나 역시 발이 넓었다. 서로 마음이 맞아 친해지기는 했지만 가끔 참 신기했다.

    무엇에 쓸 거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영주들의 이름마다 깨알같이 간단한 주석을 달아놓은 엘레나의 마음 씀씀이에 조용히 웃었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올해 2월 이후 서부 쪽 가문에 들어온 하녀. 나이는 스물 초반쯤으로 보이는, 굳이 외부에 집을 두고 출퇴근을 하는 여인.

    조건을 추려 사람들을 보내 탐문을 시켰더니, 몇 달 만에 몇 명으로 좁혀졌다. 개중 줄리아 파시안이라는 이름은 없는 걸 보니, 가명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외모도 좀 변했을지 모른다.

    보고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는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근처에 있는 약방으로 가세요.’

    약방을 탐문해 정기적으로 약을 받아 가는 젊은 여인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과연 며칠 뒤 한 영지에서 서신이 날아왔다. 꾸준히 약을 받아 가는 젊은 여인이 있다는 소식에 제라니아는 이거다 싶었다.

    클라스터 백작가가 다스리고 있는, 셀바 영지의 영향권을 벗어난 수도 쪽에 가까운 영지 쉐브란. 두드러지게 부유한 건 아니나 평화로우며 그라시아 공작과는 연관이 없었다.

    공작이 손을 쓴 건 아닌 건가.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싶어 채비를 했다. 원래 제 호위는 리암이니 그와 외출해야 하겠지만, 리암을 데려갈 수 없었는지라 제롬 경과 함께했다.

    자신의 위치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가급적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사실 여인이 일을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걸 기다리기보다는 사는 곳을 알아내는 게 더 편하기야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은 편지를 전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리암 그라시아의 부탁을 받아 밀드레드 파시안 씨를 찾으러 온 사람이에요.”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냉랭하다 싶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가 줄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짐작했던 반응이라 제라니아는 놀라지 않았다. 공작이 보였을 태도를 생각하면 사실 이 정도도 양호하다 할 만했다.

    “여기 탄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리암 도련님에게 더 이상 저희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각하께서 제 언니에게 가하신 모욕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공작이 집에까지 찾아와, 밀드레드에게 돈주머니를 내밀며 이걸 가지고 내 아들 앞에서 사라지라는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줄리아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애초에 먼저 접근한 것도 먼저 좋아한 것도 제 언니가 아닌데, 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제일 화가 나는 건 그 상황을 밀드레드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는 점이었다. 제가 곁에 있었으면 헛소리에 화라도 냈을 것을, 밀드레드라면 아마 차분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리암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부터 이 관계가 오래 갈 거라는 기대를 일절 않던 사람이니까. 정작 밀드레드를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던 리암을 아는 줄리아로서는 참 웃길 뿐이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서 왜 그렇게 나왔는지 알겠고, 그게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출신도 모르는 병약한 여자를 제 며느리로 들이고 싶지는 않았겠지. 귀족이라면 무릇 혈통을 따지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리암의 탓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자신과 언니가 가문을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그라고 공작가의 외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는가.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보다야 대화를 나누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방향이 이상적이라면 이상적이겠지만.

    “하지만 그 모든 모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언니가 도련님과 함께해야 할까요.”

    줄리아의 시선은 무척 곧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둔 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사랑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공작님께서 언니를 배척하는 한, 도련님과 잘되더라도 밀드레드의 앞길은 가시밭길이나 다름없겠죠. 저는 그게 싫습니다.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지언정, 우리는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어요.”

    “…….”

    “도련님의 옆에서 언니는 언제나 낮아져야만 하겠죠. 공작가의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와 몰락한 집안의 딸. 누가 더 귀하게 여겨질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도련님과 얽히는 순간 언니의 등 뒤로는 분명 수많은 소문이 따라붙겠죠. 언니가 어째서 그걸 다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요?”

    괴로운 건 리암만이 아니다. 밀드레드의 미소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건 줄리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기 마련이다. 이미 난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를 덧새길 필요는 없었다.

    “저희를 그냥 내버려둬 주세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걸로 족하나요?”

    “네?”

    “이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게 공작 각하뿐이라니, 솔직히 좀 억울하잖아요. 당하기만 하는 건 재미없는데 말이에요.”

    이건 무슨 소리지. 줄리아가 해괴한 무언가를 보듯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제라니아는 그 시선을 담담히 감내했다.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당신과 당신의 언니가 리암의 입장을 이해하길 바라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리암에게 이곳의 위치를 알려줄 생각 역시 없고요.”

    제라니아는 그제야 조목조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묻어났다.

    “그런데 왜….”

    “리암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식의 이별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이에요.”

    제라니아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줄리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줄리아의 손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줄리아가 괴이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듣고 나서요.”

    “…밀드레드 씨는 잘 지내고 있는 거죠?”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줄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결례인 걸 알기에 태연함을 유지했지만, 낌새를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 제라니아에게 줄리아는 차분히 말했다.

    “도련님이 부탁한 거로군요.”

    하여간 그 바보 멍청이가.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줄리아는 아파오는 골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하필 좋아해도 그런 녀석을 좋아하는 언니가 문제였다. 다른 귀족들처럼 적당히 오만하고 짜증 나는 녀석이었다면, 여기서 편지를 찢어버리고 단호히 대답하면 되었을 텐데.

    줄리아의 머릿속에 서늘한 미모를 가진 미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니랑 엮이기 전에도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사람을 막 대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잘생기고 젊은 후계자에 여타 귀족들처럼 짜증 나게 구는 타입이 아닌 만큼, 성에서 그를 연모하던 하녀들의 수는 상당했다. 개중에는 작정하고 유혹하려 드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가차 없이 내쫓겼다.

    인간한테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 도련님이 뭐에 꽂혔는지 제 언니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 가장 나서서 반대한 건 자신이었다.

    보나 마나 변덕일 거라고 생각했다.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는 제 언니를 그런 대귀족 도련님이 진심으로 좋아할 리 없었다. 가진 게 넘치는 그와 달리 언니가 가진 건 미모와 젊음뿐이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것들.

    그럼에도 리암은 꽤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편지를 전해줄 때마다 더없이 기뻐 보이는 얼굴을 하는 그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되곤 했다.

    너무 진심 같아 보여서.

    조용히 다른 지역으로 사라지기로 결정한 뒤에도 불길함에 몇 번이고 흔적을 지우고자 애썼다. 어떻게든 리암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리암이라면 분명 밀드레드를 찾으려고 할 테니까.

    그의 마음이 단순한 변덕일 거라고 생각하던 초반의 자신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언니는 잘 지내요. 도련님이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잘 지내는 건 아니지만, 줄리아는 작은 심술을 덧붙였다. 제라니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답장을 보내주실 의향이 있다면, 여기 이 주소로 사환을 통해 편지를 보내주세요. 사환을 고용할 만한 돈도 이 안에 넣어 두었어요. 물론 편지를 보내실 생각이 없다면, 드린 돈은 그대로 쓰셔도 괜찮아요.”

    봉투와 함께 준비해 두었던 주머니를 줄리아에게 건네자, 줄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받을 수 없어요.”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녀석이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이거든요.”

    나직하게 웃는 제라니아를 보며 줄리아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도련님이요?”

    말한 대로, 리암이 그간 호위를 서면서 받은 급여의 일부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라니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밀드레드 씨가 자기를 어리게만 보는 게 싫었는데, 돌이켜 보니 자기가 어리게 굴었던 건 맞는 거 같아서 반성하고 있대요.”

    기사가 된 뒤로 리암은 예상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원래도 단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지만, 근무 태도라든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평판이 꽤 좋았다.

    사람들과 부대끼기 싫어하는 리암의 성격을 생각하면 극적인 변화라 해도 무방했다.

    생각보다 더 열심히 하길래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리암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가 열심히 하라고 하는 거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고…. 예전에 밀드레드가 나한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자길 선택한 거라고 한 적이 있었어. 그땐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억울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게 보일 만했다 싶어서. 신분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긴 했지.’

    ‘…….’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내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네가 밀드레드를 찾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편지에 적은 대로.’

    “어떻게든 연락을 받고 싶은가 봐요. 노력이 가상하다고 생각해 주세요. 리암이 ‘희망이라도 가지려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잖아.’라고 하더라고요.”

    줄리아는 뭐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창문을 통해 마차 안으로 밤바람이 흘러 들어와 침묵을 적셨다. 돈주머니를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한 채 줄리아는 생각에 잠긴 듯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딱히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지만….”

    성을 지나 한참을 달려, 시내로 들어간 마차는 줄리아의 한마디에 멈춰 섰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마차 밖으로 내려서던 줄리아가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제라니아의 녹색 눈동자가 빛을 담고 반짝였다.

    “혹시나, 밀드레드 씨가 용기를 내시겠다면 너무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드레드 씨의 편을 들어드릴 테니까.”

    “…도련님의 편이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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