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0화 (41/171)
  • 제40화. 합리적인 결정

    브론스는 영지가 옛 프로모 왕국의 영토와 지나치게 가까워 당시에는 약탈과 침략이 끊이지 않을 만큼 불안정한 장소였고, 넬핀은 커다란 강을 끼고 있는 데다 지반이 약해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는 도시였다.

    넬핀의 영주가 건물 보수에 쏟는 돈을 생각하면 이곳에 본거지를 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거슬리는 점이라면 진네프가 보데로아 후작이 다스리는 영지이며 아렌타에는 역사가 오래된 신전 하나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전과 결탁한 게 아니라면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짱이라 할 만했다.

    물론 프란츠는 그 가능성을 조금 뒤로 제쳐두기로 했다. 그런 논리라면 데브론 영지에서 고아원을 발견했으니, 바이첸 공작이 수상하다고 생각한다 말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티레인의 보고대로라면 아렌타에 이 모든 일의 배후와 관련된 단서가 있을 게 분명했다. 허가되지 않은 사술을 부려 제 이득을 챙기고, 끝내 왕족에까지 그 마수를 뻗으려는 간사한 자가.

    “노예 자체는 합법이라 하나…. 낙인은 확실히 문제군요. 신전과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낙인 마법은 서쪽 왕국 헤리타에서 건너온 것으로, 크레이츠에서는 범법으로 여겨지는 사술이었다. 헤리타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그들의 소유물을 표기했고, 이는 마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 많은 마법사를 소유하고자 평민 신분의 마법사에게 억지로 누명을 씌워 노예로 만드는 귀족들의 행태에, 평민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첩자로부터 간간이 부여받았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신전이 불법을 저지르며 낙인을 찍은 노예를 양성하고 있거나, 신전에 신고되지 않은 마법사들이 몰래 숨어 낙인을 사용해 잇속을 채우고 있거나, 가능성은 낮지만 헤리타에서 관여한 일이거나.

    ‘그걸 알아보는 게 그대들이 할 일입니다.’

    시찰은 남쪽에서부터 시작해 서쪽으로 돌아, 동쪽의 클라단 영지를 마지막으로 했다. 2주라는 기간을 생각하면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공을 들여 선별한 만큼 기사들은 전부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어전을 빠져나가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자신은 어전에 남았다.

    어전을 나서는 국왕을 배웅하던 왕세자가 제 쪽을 돌아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왕세자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의문이 드는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기사들을 선별하는 것에 국왕이 아닌 왕세자가 관여했으리라는 건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켄드릭 국왕은 무예로는 왕국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였으나 정치적 지도력은 그 명성을 따라오지 못했다.

    옆에 재상이 아니라 왕세자가 있는 걸 보면 이 일에는 왕세자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대외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더라도.

    “허가합니다.”

    선선히 대답하는 왕세자를 보며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와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전에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긴장이 되었다.

    “왜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이런 제 상태를 숨기고 차분히 대답했다. 굳이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문제인지는 자료를 조금만 훑어봐도 알 수 있었다.

    요약하면 역도의 무리를 찾아내라는 뜻이 아닌가. 누구보다도 입이 무겁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인물들을 골랐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능력이 있는 자를 선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능력과 신뢰는 별개 문제니까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카르멘 왕국이 멸망하고, 크레이츠에 통합된 이후 왕국에서 겪었던 온갖 차별적인 행위와 언사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말라가는 자신과 달리 왕세자는 더없이 평이한 어투로 답했다.

    ‘그 말대로, 능력과 신뢰는 별개 문제입니다. 나는 두 가지를 전부 갖춘 이들을 선별했고 말이죠. 크리스토퍼 휴스타인. 당신이라면 훌륭히 임무를 수행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간 당신이 보여준 행적을 참고했을 뿐입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의 낯빛에는 별다른 꿍꿍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문이 막혔다. 왕세자의 말과 달리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간 왕국에서 얼마나 많은 차별에 시달려 왔던가. 아무리 작위가 높더라도 자신은 멸망한 왕국의 후예였다. 기존의 귀족들에게 고운 시선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당장 아버지는 이미 결정된 사안에 두 말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 카르멘 왕국은 패배했고, 충성을 맹세했으니 따르는 것이 도리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세우는 논리였다.

    좋든 싫든 왕국에 적응해야만 하는 현실을 따라 최선을 다했다.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을 거라 믿으면서도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은근하게 표현되는 차별과 뒤로 오가는 말들, 유베르그 기사단에 입단 시험을 칠 당시 제 자질을 두고 귀족들 사이에서 논쟁이 오갔다는 것도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바이첸 공작가와 가까워진 건 그런 의미에서 상당한 행운이었다.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세가와의 친분은 가문이 사교계에 스며드는 것에 큰 공헌을 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제 아버지가 제라니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는 모른 채 아버지의 엄격함을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란 존재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루크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기조를 바꾸지 않는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거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이들이 곁에 있으니 그걸로 됐다 여겼다.

    혹시 나를 시험하기 위해 이런 명령을 하는 건가. 왕세자를 유심히 살폈지만 무감한 낯에는 어떠한 경멸도 껄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싫다고 해도 어명은 절대적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그대들의 실력이라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읊는 것처럼 왕세자의 음성은 고저 없이 차분했다.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눈빛만은 제 마음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보통이라면 싸하다고 느껴도 이상할 것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저 목소리에 어째서 이렇게도 안심이 되는 걸까. 기사 서임식을 받고 유베르그에 들어왔을 때 이후로, 이토록 나 자체로 인정받았다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전하께서 보여주신 신뢰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드시.

    * * *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어둑해진 주변을 헤치고 나아간다. 앞장서서 말을 타고 호위하듯 달리는 기사의 뒤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옆에 둔 채, 제라니아는 맞은편에 시선을 주었다. 마부석에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새까만 단발머리 여인이 또렷한 눈으로 자신을 마주 보았다.

    낡았지만 깔끔한 옷차림을 한 여자의 자세는 곧았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리암의 또래라는 확신이 들 만큼 젊었는데, 비굴하거나 주눅 든 느낌이 전혀 없는 것 역시 여인의 성정을 짐작하게 했다.

    위쪽 구석에 매달려 있는 등잔이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이며 둘의 얼굴 위로 은은하게 빛을 드리웠다.

    ‘시간을 오래 뺏지는 않을 거예요.’

    시간을 내달라는 말에 주저하는 여인에게 제라니아는 그렇게 말했다. 마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여인은 곧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문이 조용히 닫히고 마차는 출발했다.

    굳게 닫혀 있던 여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어떻게 저를 찾았나요.”

    이유보다 방법을 묻는다. 이미 자신이 누구의 부탁을 받고 왔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제라니아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설명하기엔 좀 복잡해요.”

    리암의 부탁을 받았을 때부터, 제라니아는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동생을 주목했다.

    밀드레드라는 여성은 병약하다고 했다. 때문에 밖을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라고 하니, 밀드레드에 초점을 맞추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은 달랐다. 생활비를 책임지는 게 동생 쪽이라면, 어쨌거나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암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소 과장은 있었을지라도 밀드레드의 체력상 그 몸으로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왕국 전체로 범위를 확장할 필요는 없었다. 거리를 생각하면, 여인은 분명 서부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왕국의 지도를 꺼내, 디아미드가 자리하고 있는 셀바 영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도시들을 살펴보았다.

    왕국의 서부는 상당히 넓었다. 표시된 도시도 많았지만 아마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마을의 수도 상당하겠지. 얼핏 보기에 막막해 보이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밀드레드의 가족이 여동생 하나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여성의 몸으로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정확히는, 허드렛일은 많아도 돈이 벌리는 직업은 흔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드는 약값이 상당했을 것이다. 설령 그라시아 공작이 돈을 쥐여주고 떨어지라고 했을 가능성을 상정해도, 돈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었을 테니, 여자의 동생은 아마도 공작가를 떠나 다른 가문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문직이 아닌 이상 여인이 할 만한 일 중 그나마 돈이 되는 건 귀족가의 하녀 일이나 가정교사였고, 가정교사는 그의 신분이나 지식수준을 생각하면 애매했다. 가정교사로 여성을 고용하는 곳부터가 흔하지 않았다.

    밀드레드가 글을 쓸 줄 안다고 했으니 필사도 가능성이 있긴 했으나 인쇄술이 발전한 이후 쳐주는 값이나 수요가 꽤 줄어든 상태였다.

    위의 사실을 고려했을 때, 여인의 동생이라던 줄리아도 글자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리암에게 물었더니 쓰는 건 몰라도 읽을 줄은 알았던 것 같다고 했다.

    자매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했으니, 아마 별채에서 숙박을 하는 것보단 집을 왔다 갔다 할 것 같았다. 실제로 리암에게 물어봤을 때도 비슷했다.

    물론 이 모든 걸 다 고려하더라도 서부는 무척 넓었고, 정보가 많이 필요했다. 리암이 몇 달이나 찾아다녔음에도 상대에 관한 단서조차 찾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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