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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6화 (37/171)
  • 제36화. 달갑지 않은 조우

    프란츠가 제라니아의 어깨를 붙잡고 살짝 그를 밀어냈다. 선선히 밀려나는 제라니아를 바라보며 프란츠는 재빠르게 눈빛을 갈무리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사실….”

    “……?”

    “원래는 진작 출발했어야 하는데, 이래저래 일을 처리하느라 시기가 좀 늦춰지긴 했습니다. 행사도 코앞이고.”

    “추수감사절 말씀이시죠.”

    건국절과 더불어 왕국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곡식을 수확하고 그를 자축하는, 일주일 뒤인 10월 중순부터 약 사흘 동안 벌어질 국가의 대행사.

    올해 작황이 그리 좋지 않다 하나, 그럴수록 떠들썩한 행사는 침체된 분위기를 북돋기에 좋았다.

    “행사 이후에 곧장 출발하는 셈이 되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맞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뭡니까.”

    “혹시, 하루만 제롬 경과 리암 경의 위치를 바꿀 수 있을까요. 전하가 편하신 날짜로요.”

    쉽게 말해 호위를 바꾸자는 얘기였다. 이유가 짐작이 갔는지라 프란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날짜가 있습니까?”

    “음, 대략 이쯤?”

    듣기 좋을 만큼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프란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창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 * *

    수도 카암의 중심부에는 둥그스름한 푸른색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성이 자리하고 있다. 은색을 잘 개어낸 도료를 사용해 특별한 기법으로 광택을 낸 궁의 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언제나 한결같은’이라는 의미를 담아 체스틴이라 명명된 왕궁의 외벽에는 수상한 이들이나 마법의 침투를 막기 위한 무형의 결계가 설치되어 있고, 들어가는 문의 입구마다 위병들이 서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커다란 본궁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그 건물들 사이사이를 기다란 야외 통로가 이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아치형의 지붕을 가진 통로의 천장 역시 장인이 솜씨를 부린 듯한 화려한 무늬들로 가득했다.

    인적이 없는 통로를 사뿐히 걸어가는 제라니아의 몸을 커다란 그늘이 가득 덮었다. 두꺼운 책들을 들고 있는 시녀들이 제라니아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평소처럼 도서관에 오래 머물까 했지만,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창문 밖의 경치를 보고 있자니 가만히 앉아 있기 좀이 쑤셨다.

    책을 가져다놓고 산책이라도 할까. 좋은 날씨 아래 제라니아의 결단은 번개처럼 빨랐다.

    둘이서 구상하던 걸 혼자서 하려니 묘하게 진도가 안 나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 그럭저럭 한가해진 제라니아와 달리 이렌스는 무척 바빠졌다. 저번에 재정부에 들렀을 때 이후, 도서관에서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제라니아는 이렌스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일거리가 늘어 추수감사절 전까지는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전하던 이렌스의 눈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재정부의 일도 그렇거니와 프란츠와 무언가를 작당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나 제라니아는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프란츠는 요즘 들어 들어오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한가해졌다는 말이 둘러대기 위한 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서관은 본궁에 자리하고 있어 왕세자가 머무는 궁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궁과 궁을 잇는 야외 통로를 부지런히 걸어가던 제라니아의 귀에 와아아-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옆을 돌아보자 저 멀리에 은빛으로 빛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건….”

    “기사 분들이 대련 중이신 것 같습니다.”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장난감 모형처럼 작아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얼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먼발치에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광경을 제라니아는 그 자리에 멈춰서 바라보았다.

    왕국이 기사를 임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에게 봉토를 수여하거나, 특정 기사 밑에서 몇 년간 수련을 마친 이에게 서임을 내리거나, 그도 아니면 명예직의 개념으로 하사되기도 했다.

    왕실 기사단은 그중에서도 신분과 능력을 모두 따지는 최정예 부대에 속했다.

    리암도 원래였다면 저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얌전히 세자궁을 지키고 있을 리암을 떠올리며 제라니아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 저기 던져두면 다른 인간들이랑 부대끼기 싫다며 진절머리를 낼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그라시아 공작은 덤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공작 앞에서 ‘차마 공작 각하를 닮은 거겠죠.’라고 말할 수는 없었는지라, 제라니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기사들이 싸우거나 수련하는 걸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축제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이는 기사들 간의 기마전이라든가, 리암이나 크리스가 제 아버지와 대련하는 것을 구경했던 정도였는데 두 공작은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휴스타인 공작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엄격하다면 그라시아 공작은 아들을 약 올리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마치 이것도 못 때리냐며 놀리는 듯한 검놀림에 리암이 발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쪽 훈련장은 평소에 안 쓰지 않나요?”

    이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면 꼼짝없이 저 근처를 지나가야 했다. 아까 지나갈 때도 사람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때의 배는 많았다.

    “원래 쓰던 장소를 보수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녀 중 한 명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라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지붕에 닿은 햇빛이 그 아래로 검은 팔을 쭉 뻗었다.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제라니아의 발이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차근히 밟았다.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에도 그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걷기에 집중하던 제라니아에게 시선 몇 개가 따라붙었다.

    통로를 다 지나 궁에 다가선 제라니아의 뒤에서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시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라니아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킬킬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갑옷 입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오, 역시나. 비전하가 아니십니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제라니아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내고 그를 마주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갈색 눈을 가진 남자는 서른쯤 되어 보였고, 그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근육이 붙은 팔다리와 날카로운 눈매, 커다란 덩치와 어우러져 위협적으로 보였다.

    훈련을 하고 있었던 건지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열기 때문인지 체취가 짙었다.

    제 뒤에 서 있는 시녀들에게서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제라니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우선, 제 어깨에 올려져 있는 손을 붙잡아 아래로 꾹 눌러 내렸다. 그러고 난 뒤에야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윌터 경.”

    윌터 케라온. 케라온 공작의 적장자이자 차기 공작.

    왕실에서 열었던 사냥대회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제라니아는 그 후로 사냥대회에 가지 않았다. 제게 이상할 정도로 흥미를 보이던 그의 태도가 영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이 사람도 유베르그 기사단 소속이었던 건가.

    윌터의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벌레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만 같은 감각에도 제라니아는 꿋꿋이 표정을 유지했다. 느물거리며 웃는 남자는 4년 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거칠고 무례하고,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럼.”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서려던 제라니아에게 남자가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제라니아의 턱을 붙잡고 제 쪽으로 고정했다.

    제라니아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냈지만 남자의 커다란 손은 꿈쩍도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시녀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무례하십니다!”

    연약한 먹잇감을 쳐다보는 맹수처럼 그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쳐 보일지 알았기에 제라니아는 곧 죽어도 동요하는 티만은 내지 않기 위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붙잡힌 턱이 아프고 위협적인 기세에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들려고 했지만, 겨우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신분에 맞게 행동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자가 공작가의 후계자라 하나 아직은 공작이 아니고, 자신은 지금 왕족이었다. 그래도 사냥대회 때보다는 명분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분명 같은 공작가의 자식인데도, 어째서 이렇게.

    “이런, 실례했습니다. 수련에만 집중해서 그런지, 왕궁의 법도를 잘 몰라서 말입니다. 부디 용서를.”

    윌터가 잡았던 턱을 놓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 무뢰배처럼 뻔뻔스레 웃는 윌터를 보며 제라니아는 기가 찼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참 아깝습니다. 여러모로.”

    “…….”

    “좋은 인연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사냥대회 이후, 윌터 케라온은 제라니아의 앞으로 혼담을 보냈다. 편지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린 아이작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들였을 때, 제라니아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혼담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호의라는 게 존재하긴 했던가. 초식동물을 괴롭히는 육식동물처럼 제 팔을 붙잡고, 집요할 정도로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남자의 태도는 흥미로운 물건을 대하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가요? 저는 충분히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은데요.”

    지금 자신은 왕족이 되었으니까.

    싱긋 웃으며 맞받아치자 윌터의 한쪽 눈썹이 실룩거렸다. 제라니아는 그것을 못 본 척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제게 왜 이리 관심이 많으신지는 모르겠지만, 격의 없이 행동하시는 건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니까요.”

    단호한 말투로 선을 긋자, 윌터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왕세자 전하가 걱정됩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제라니아의 표정에 윌터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고로 강한 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법 아니겠습니까.”

    “불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뭉텅이진 실타래를 칼로 싹둑 잘라내는 것만치 서늘한 말투였다. 늘 온화하고 다정하던 상전의 변화에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들을 살폈다.

    설마 남자가 법도를 어기고 손을 댈까 싶으면서도, 너무도 거침없는 그의 태도가 두려움을 자아냈다. 저 냄비뚜껑 같은 손으로 한 대만 맞아도 큰일 날 것 같은데.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왕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텐데요.”

    윌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으면서도 책잡힐 소리는 교묘하게 피해간다. 하긴 케라온 공작이 아들을 그냥 풀어서 키우지는 않았을 터였다. 원래는 왕국을 계승받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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