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35화 (36/171)
  • 제35화. 유일한 것

    뭉텅이로 된 결재안을 받아 부하들에게 손수 배분한 뒤, 벨루인은 별실로 프란츠를 안내했다. 넓은 소파에 앉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프란츠의 맞은편에 앉은 벨루인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겁니까?”

    인사치레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프란츠는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 서류를 처리해 줬으면 합니다.”

    그것을 받아 면밀히 살피는 남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서류의 내용은 평범했다. 조만간 있을 외부 시찰에 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나마 특이할 점이 있다면,

    “평소보다 예산이 꽤 많군요. 특히 기사단에 편달되는 예산이 예년에 비해 높은 것 같은데요. 보아하니 기사의 수가 작년 결재안보다 훨씬 많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 봤습니다.”

    “예?”

    깜짝 놀라 반문하는 벨루인에게 프란츠는 차분하게 말했다.

    “시찰을 하러 가는 김에 확인할 것이 있어서 말이죠.”

    “그게 무엇입니까.”

    “극비리에 진행할 일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곤란합니다. 역모에 관한 문제라고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날카롭게 변한 갈색의 눈동자가 프란츠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리바이가 필요하시다는 건가요.”

    시찰을 가는 것을 핑계로 기사 몇을 빼돌려 무언가 임무를 맡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왕족의 안위를 생각하면 호위하는 기사의 수를 이 이상 줄일 수는 없으니 표면적인 숫자가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제게 따로 부탁을 하는 건, 자신이 이런 변경사항을 그냥 넘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기록으로 남는 것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가급적 외부에 숨길 필요가 있는 일일수록.

    프란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벨루인은 더없이 무거운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쓸데없는 예산을 늘리지 않는 것이 재정부의 기조입니다. 전하의 말씀은 이해했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씀하신 부분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형식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나, 그렇다 치더라도 이유 없이 예산을 증원할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의 대답에 프란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정부에 부담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들어온 세금이 전년도에 비해 다소 부족하다는 보고 역시 들었습니다.”

    “아시는 분이 그런 부탁을 하십니까?”

    “그래서 이걸 준비했습니다.”

    프란츠가 내민 또 다른 서류를 의아한 얼굴로 받아 든 벨루인이 내용을 확인했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이건.”

    “영지들의 세금 누락 정황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벌금을 꽤 비싸게 매길 수 있을 것 같다더군요.”

    프란츠가 내민 서류는 커다란 영토를 지닌 몇몇 영지의 보고서였다. 영토의 크기와 더불어 영토에서 나오는 생산물들의 종류들과 그것들을 각각 산출해 합산한 식이 적혀 있었다. 비교할 자료가 없기는 했으나 아마 맞을 것이다.

    “보나 마나, 빈즈가 검수한 일이겠군요.”

    재정부에서 다루는 자료들을 모조리 기억하는 괴물이 그의 옆에 붙어 있지 않은가.

    이렌스 빈즈. 그는 대다수가 중립을 고수하는 재정부 내에서도 유일하게 정치적 노선을 탄 인재였다.

    그 문제로 불러다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렌스는 ‘개판을 정리할 사람을 따르는 것뿐입니다.’라는 직설적인 말로 벨루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도대체 언제 이걸 알아 온 건지. 필요한 예산을 이걸로 메꾸라는, 상상치도 못한 발상에 벨루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전하께서는 참 통이 크신 것 같습니다.”

    벌금만이 아니라 누락된 세금들까지 회수하면 아마 상당한 금액이 나올 터였다. 매끈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왕세자를 벨루인은 퍽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론적으로는 지금의 왕세자처럼 국가에 신고하는 것이 맞았으나 현실이 어디 그렇게 굴러가던가. 보통의 왕족이었다면 정보를 쥔 순간,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과 거래를 해 제 이익을 챙겼을 텐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시겠지만, 분명 반발이 있을 텐데요.”

    딱 봐도 영향력이 있는 귀족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개중 왕비의 친가인 보데로아와 관련된 귀족들이 간간이 보이는 건 과연 우연일까.

    “그런 걸 두려워하는 겁니까?”

    “설마요.”

    모든 건 법대로 가는 거라고 대꾸하는 벨루인의 눈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왕실의 이름으로 거행될 일이니, 나가기 전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이만하면 예산 증원에 쓸 만한 명분 아니냐며, 태연자약한 말투로 덧붙이는 왕세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벨루인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를 마친 그가 고개를 들어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이거 참.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그가 차분한 손길로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챙겼다. 승낙의 표시에 프란츠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고, 닫혀 있는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딱 10분이군.

    * * *

    “시찰이요?”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한 뒤, 다과회가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제라니아를 맞이한 건 침대에 앉아 있는 프란츠였다. 그가 자신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는지라 제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총총 제 앞으로 걸어온 제라니아의 손을 프란츠가 가볍게 붙잡았다. 그 상태로 제라니아를 올려다보던 그가 꺼낸 말에 제라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보름 뒤입니다.”

    약 2주 동안, 각 영지에 자리한 사병들을 사열하기 위해 전국을 도는 행사였다. 국왕이 나가기엔 너무 번거롭고 그렇다고 직책이 아주 낮으면 애매하니 결국 만만한 게 왕세자였다.

    “원칙대로라면 당신이 함께 동행해야 하겠지만, 의무는 아닙니다.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프란츠를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선뜻 대답했다.

    “갈게요.”

    가끔씩 파티에 나가는 걸 제외하면 몇 달간을 궁에서만 생활했던 만큼 아무래도 꽤 심심했다. 일을 하러 가는 거라지만 간만에 바깥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동선을 그대로 공개해서 말입니다. 저번 여행과 같은 사태가 날 수도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프란츠가 간단히 제 상황을 설명했다. 외부 시찰을 나갈 때마다 세 번에 한 번 꼴로 습격이 터지고, 창문가에 오래 앉아 있으면 화살이 날아오며 가끔씩 식사에 독이 섞이기도 한다고.

    물론 발견할 때마다 전부 잡아 족치기는 했으나 끝이 없었다. 습격이 있으면 단서라도 남아야 하거늘, 대다수가 조무래기들이거나 전처럼 낙인을 가진 살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제라니아와 여행했을 당시에 잡아 왔던 놈들은 감옥에 가둬뒀으나 일주일 뒤쯤 감옥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예상한 결과이므로 놀라지는 않았다.

    꼬맹이는 멀쩡히 살아 있으니 죽음의 원인에서 낙인은 제외된다. 당시 감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를 붙잡아 정보를 캐냈으나, 중간쯤에 또다시 추적이 끊겼다. 꼬리 자르는 솜씨가 참 일품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제라니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건가요?”

    습격에 익숙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이유로 일부러 늦게 들어왔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기가 막힌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

    제라니아는 물끄러미 그를 노려보았다. 매서운 시선에도 프란츠의 낯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내 곁이 위험하다는 소리입니다.”

    그 말과 함께 제라니아를 붙잡은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내키지 않아 보이는 프란츠의 얼굴을 보면서도 제라니아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만, 두려워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프란츠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는 제라니아에게 그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죽음은 두렵지만, 자유롭지 못한 게 더 두려워요.”

    제라니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제가 위험을 직감하면 궁에만 머무르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자신은 그렇게만 살 수 없었다. 안락한 속박과 다소 위험을 감수하는 자유를 고르라면 차라리 후자를 고를 것이다.

    “전하야말로, 그런 일들을 겪으시면서도 왕권을 포기하지 않으시잖아요. 왜 저는 그러면 안 되나요?”

    “…맞는 말이군요.”

    한참을 침묵한 끝에 프란츠의 입이 열리고,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라니아의 손을 붙들고 있던 커다란 손에서 살며시 힘이 풀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과 무뚝뚝하지만 확실한 대답. 그럼에도 뭔가 이상했다.

    묘한 위화감이 제라니아의 가슴 한편을 깔짝거렸으나,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하기엔 더없이 미미했다.

    “그리고 동선을 공개한다지만, 공식 행사잖아요. 그때와 달리 호위병의 수도 상당할 테고, 신전에서 신관들도 함께 동행하지 않나요.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앞일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더라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는 법이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프란츠의 얼굴과 떨어져 나간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양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놀랐는지 미동도 없이 굳어 있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을 거예요.”

    그게 무엇이든.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무사히 지냈잖아요. 저도 괜찮을 거고, 전하도 분명 괜찮을 거예요.”

    다독이는 것처럼 제 머리를 토닥거리는 손길에 프란츠는 입을 벙긋거렸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몰라도 감정에 대한 건 언제나 늘 어려웠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이성만큼이나 직감을 믿었다. 눈앞의 상대는 그런 의미에서 어려웠다. 직감은 명쾌했으나 이성은 복잡했다. 이성은 그를 선택해서는 안 되는 수많은 이유를 제시했다. 직감은 그 모든 이유를 얼기설기 끼워 맞춰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한테 의지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전 한 번 정한 건 쉽게 안 바꾸니까.’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과 백으로 나뉜 것처럼 명확하기만 했던 내 세계에서, 어째서 당신만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걸까.

    “전하?”

    프란츠는 고개를 들어 제라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아한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빛났다. 자신이 흑백이라면 이 사람에게는 분명히 색채가 있겠지.

    그러니까, 너무 가까워져서는 안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겉은 그럴듯하나 그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껍데기. 그게 자신의 본질이었다.

    한 번 욕심내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갈구하겠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들지도 모른다. 허무에는 바닥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아깝지 않은가. 당신은 고작 이깟 허무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내가 가진 불행이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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