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화
악연의 끝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나명진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한쪽에 모여 있는 일본인들을 바라봤다.
“먼저 도망을 갔다고?”
“… 예.”
“이래서 쪽바리 새끼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
뒤늦게 나온 사람을 통해서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전해 들었다. 나명진은 앞에 있는 야쿠자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을 나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정작 그들을 돕기 위해서 움직인 나선의 각성자들만 희생된 꼴이었다.
무엇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문후였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놈은 멀쩡했다. 오히려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쓰러뜨리면서 나선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씨발! 그 새끼는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각성을 한 것 같았지만, 이문후는 몇 단계를 앞서가고 있었다.
“빨리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피해? 내가?”
“밖으로 나오면 막는 게 쉽지는 않을… 크윽!”
물러나기를 권유하던 남자는 나명진의 발길질에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안전을 위해서 나은 방향을 제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질타뿐이었다.
“혼자 도망 온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여기에 모인 각성자들이 몇 명인지 알아?”
그들 주변에는 많은 각성자들이 있었다.
그동안 준비했던 나선 건설의 50%가 넘는 전력이었다.
이문후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두를 집합시킨 것이다. 거기에 아직 멀쩡한 야쿠자들도 남아 있었다.
그들도 면목이 없었는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치가 있는 새끼들이라면 이번에는 싸우겠지.”
나명진은 그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각성자만 20명이 넘어갔다.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배치까지 완벽히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문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습을 받았다고 했지?”
“예. 다짜고짜 공격을…”
“그럼 밖에 싸우면 되잖아? 안 그래?”
“사용하는 무기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실력도…”
“나, 나왔다!”
대화를 하는 와중에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란 봉을 든 채로 밖으로 나온 사람은 이문후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흥분한 나명진은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죽여! 공격해!”
나명진의 외침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각성자들이 공격을 날렸다.
쐐에엑!
콰과광! 콰광!
시뻘건 화염과 새하얀 얼음이 쏟아졌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공격으로는 과하다 싶었지만, 이미 이문후의 실력을 알고 있는 만큼 힘을 아끼지 않았다.
콰과과광!
강력한 공격에 그가 있던 공간이 흔들렸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공격을 받아내고 버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주, 죽었지?”
“저런 공격이라면 무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최소한 중상정도는…”
“중상은 무슨! 뼈도 못 추리겠고만!”
뿌옇게 일어난 먼지에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문후의 상태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그가 죽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들의 확신이 깨졌다.
“끄아악!”
“뭐, 뭐야?”
“그놈입니다!”
“미친! 저게 말이 돼?”
조금 전까지 던전 입구 앞에 있던 이문후가 그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원거리에서 공격을 할 수 있는 각성자들을 모아둔 곳이었다.
“끄악!”
“아악! 내 다리!”
그는 기다란 봉을 휘두르며 각성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무식한 공격이었다. 단단한 봉에 내공을 담으며 휘두르자,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서져 나갔다.
“뭐해! 잡아!”
“예? 예!”
언제 저기로 몸을 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각성자들이 모두 쓰러지기 전에 이문후를 잡아야만 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저 새끼를 꼭 죽여!”
“예? 제가요?”
“또 도망가려고?”
“아, 아닙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제가…”
“나는 지원군을 불러올 거야.”
“… 예?”
“혹시 모르니까 사람을 더 불러올 거라고! 무슨 말인지 몰라?”
“아, 아닙니다.”
이 와중에 도망을 가려는 나명진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혀왔다. 그렇다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도 수하들을 버리고 도망을 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나대? 죽어!”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그들은 곧바로 대응을 이어나갔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각성자는 이문후를 노리며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우선 작은 타격이라도 가할 생각이었다.
앞에 있는 놈도 사람이었다. 조금씩 피해를 남기면 지치기 마련이다.
피해는 크겠지만,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쐐에엑!
이문후는 자신을 노리며 날아오는 공격을 눈치챘다.
몇 번 경험한 마법이라 막아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봉을 찌르며 손목을 비틀었다.
투욱! 콰아앙!
“끄아악!”
가벼운 손짓에 날아오던 매직 미사일의 궤적이 바뀌었다.
유능제강을 응용하면 이렇게 공격의 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저게 말이 돼?”
“마, 막아!”
오히려 아군을 공격하자, 다른 마법을 준비하던 자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대신해서 흉기를 든 자들이 뛰어들었다.
비교적 근접전에 유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상대를 묶고,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돕는다면 앞에 있는 괴물 같은 놈을 잡을 수 있었다.
“하압!”
상당히 큰 방패를 든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는 다른 무기 없이 방패를 앞세우며 돌진했다.
어떻게든 이문후를 압박하려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날카로운 날붙이를 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걸로 봐서 우선 앞에 있는 사람을 떨쳐내는 게 먼저였다.
“흐읍!”
이문후는 곧바로 봉을 찔러 넣었다.
방패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가진 힘이라면 충분히 튕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쩌정!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방패가 움푹 패였다.
그리고 달려든 사내는 이문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미친! 상문이가 밀린다고?”
“말도 안 돼!”
조직 내에서 가장 힘이 강한 놈이었다.
덩치도 큰 만큼 방패를 들고 압박하면 누구도 쉽게 당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힘없이 튕겨져 나간 것이다.
쐐에엑!
잠깐 드러난 틈을 노리며 검은빛이 쏟아졌다.
이번에 날아온 마법은 던전에서 네크로맨서가 사용했던 다크 스피어였다.
파앙! 파앙!
이문후는 가벼운 손짓으로 마법을 터뜨렸다.
네크로맨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만큼 공격을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새끼 뭐야? 이게 무슨 레이드냐고!”
“피, 피해! 여기로 온다!”
부우웅! 콰앙!
달려든 이문후가 봉을 휘두르자, 앞에 있던 사람들이 튕겨져 나갔다.
길게 늘어난 봉은 순식간에 그들의 전열을 무너뜨렸다.
가까이라도 붙으면 무기라도 휘두르겠지만, 이문후는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끄으윽!”
쓰러진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작정하고 휘두른 봉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마치 트럭이나 중장비에 치인 느낌이었다.
콰앙! 콰앙!
이문후는 멈추지 않았다.
수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이들의 수를 줄여야만 했다.
‘후우. 내공이 부족하겠는데?’
남아 있는 내공을 가늠한 그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붙잡았다. 조금 전에 그가 휘두른 봉에 맞고 쓰러진 사람이었다.
“아아악! 자, 잠깐!”
우악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그는 발버둥치며 이문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는 기운이 빠져나갔다.
파츠츠츠.
곧바로 마나 드레인으로 상대의 힘을 흡수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문후의 손에 잡힌 놈이 발버둥치다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눈이 풀린 것이 뭔가에 당한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겁이 났다.
“뭐, 뭐 하고 있어? 빨리 공격해!”
나명진의 명령을 받은 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던전 안에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인 이문후를 봤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 뒤에 있던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새끼들. 또 튀잖아?”
“저런 쪽바리… 어? 사, 사장님도?”
“뭐, 뭐해! 빨리 저놈을 공격하라고!”
그들은 빠져나가는 차량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독려를 하며 사기를 끌어올려도 모자랄 판에 사장이라고 부르는 놈이 이곳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씨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우리가 무슨 고기 방패냐고!”
“개 같은 새끼. 돈 좀 있다고 막 나가네!”
나명진의 행동에 그들은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아무리 나선이라는 조직에 속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사람이었다.
노예 같은 취급에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명령을 내리던 사내는 동료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때, 이문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켜!”
“…….”
“뒤지기 싫으면 비키라고!”
살기 가득한 외침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급하게 옆으로 물러났다. 나명진이 도망간 상황에서 앞에 있는 괴물과 부딪쳐서 좋을 건 없었다.
지금 빠져나가는 차에 나명진이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문후는 곧바로 뒤를 쫓았다.
타다닥!
나한보를 펼치며 빠져나간 차를 뒤쫓았지만,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흐읍!”
그는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봉을 바닥에 찍으며 그대로 끌어올린 내공을 쏟아부었다.
터엉!
바닥에 꽂힌 봉이 길게 늘어났다.
마치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것처럼 봉의 힘을 이용한 그의 몸이 높이 떠올랐다.
“저, 저게 뭐야?”
“사람 맞아?”
봉을 밀어낸 이문후의 몸이 높이 떠올랐다.
주변에 늘어져 있는 건물의 옥상 정도로 뛰어오른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차를 노리며 그대로 봉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도로를 내달리던 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씨발, 저런 괴물하고 싸우려고 했다고?”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먼 거리를 쫓아가서 차를 부순 이문후의 행동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이문후는 그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이 도망갔지만, 이문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차에 타고 있는 나명진을 찾는 게 중요했다.
“후우우.”
그는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처박힌 차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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