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거래
“몸은 괜찮냐?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좀 생겼어.”
“일이라니 어떤 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정민석은 생각보다 훨씬 늦게 들어온 이문후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너무 밝아 보였다.
“걱정한 것 치고는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뭔 개소리야!”
“평소에 네 표정이 아니잖아.”
“내가 평소에는 어땠는데?”
“똥 씹은 표정?”
“지랄!”
“무슨 일이야? 로또라도 맞았냐?”
“아, 약속 있어.”
“약속?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하지 말고.”
“진짜라고! 여자 만나러 가.”
뜬금없는 정민석의 말이 권형태의 제안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보이스 피싱 같은 거냐?”
“뭔 소리야!”
“어떤 정신 없는 여자가… 설마, 임성효 씨냐?”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정민석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하지만 너무나 뻔했다.
“네 주변에 여자가 어디 있어. 그 사람밖에 없겠지.”
“사돈 남 말하네.”
“흐음. 결국 너한테 접근을 하는 거네.”
“접근이라니? 무슨 꽃뱀인 것처럼 말한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 됐다. 그냥 준비나 해라.”
계속 말을 해봐야 더 피곤해질 것 같았다.
이문후는 별다른 말 없이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뒤늦게 그걸 발견한 정민석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너 정말 괜찮은 거지?”
“괜찮다니까.”
일회성 던전에서는 많아야 서너 개 정도의 재료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문후가 가지고 온 양은 그가 평소에 얻은 것보다 세 배는 넘을 것 같았다.
“도끼에 가죽에 단검에. 이건 뭐야? 먹어도 되는 거냐?”
“미친놈아! 먹지 마!”
“먹을 것 가지고 치사하게! 이게 뭔데?”
“아직 확인도 안 된 거야. 먹을 것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건 아직도 안 고쳤냐?”
“…….”
정민석은 멋쩍어하며 손을 털었다.
막상 많은 물건을 가지고 왔지만, 이것들로 뭘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이거 천들은 엄마 가져다 드려?”
“어. 그게 좋겠네.”
“가죽옷은? 너무 허접하지 않냐? 이건 좀 어떻게 해야할 것 같은데? 이 구멍들은 뭐야? 생각보다 싸움이 격했던 거냐?”
“고블린들이랑 싸웠었어. 아, 그리고 너 성효 씨 만나면 내가 정규 던전으로 갔다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바보냐?”
“던전에서 나오다가 걸려서 조사받고 왔어.”
“미친! 걸렸다고? 어떻게 됐어?”
“그게…”
이문후는 정민석에게 거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을 들은 정민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이문후를 바라봤다.
“당연히 수락해야 하는 거 아니냐? 조건이 엄청 좋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약속이나 가라.”
“… 그럼 데이트가 아니잖아.”
임성효와 약속을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민석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우선 입단속을 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지만,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일이 꼬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실수로라도 내 이야기는 하지 마.”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근데, 나는 어떡하지?”
“너? 뭘?”
“나한테도 그런 제안이 오면…”
“빨리 나가라. 나는 잠 좀 잘 테니까.”
그는 정민석의 말을 일축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민석은 차라리 임성효와 같이 일을 하는 게 괜찮아 보였다.
‘그 사람들하고 움직이면 나랑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 안전하기는 할 것 같은데.’
앞으로는 정규 던전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곳에서는 정민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동료들과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지만, 선택은 정민석의 몫이었다.
***
잠깐 눈을 붙이고, 나한신공으로 운공을 마치자 피로가 날아갔다. 짧은 시간 휴식을 취한 것이 전부였지만,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것이다.
‘확실히 사기라니까.’
가지고 있는 능력 하나하나가 엄청난 힘이었다.
플레이어로 각성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일회성 던전을 찾는 건 어려울 것 같고. 정규 던전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결국에는 권형태의 제안을 수락할 것 같았다.
아니면 던전에서 얻게 되는 물건이나 전리품을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순간이동을 이용하면 몸에 걸치고 있는 일부를 제외하면 같이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차라리 순간이동 레벨을 올려볼까?”
레벨이 올라갈수록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의 양이 늘어났다.
하지만 겨우 1, 2레벨 올린다고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민이 됐지만, 지금은 경험치 구슬을 얻는 게 먼저였다.
다시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준비를 마쳐야 했다.
‘잘하면 이것도 통할 것 같은데.’
그는 던전에서 가지고 나왔던 마비초를 확인했다.
다수와의 싸움에서는 그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이용해야만 했다.
고블린을 통해서 마비독의 위력을 확인한 만큼 빨리 움직여서 놈들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위이이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번호였다.
되도록 이런 번호는 피했지만, 권형태와 나눈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통화를 이어갔다.
“여보세요?”
[이문후 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 누구시죠?”
[DS기업 비서실입니다.]
“DS기업이요?”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DS는 이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들 중에 하나였다.
“거기에서 저한테 왜?”
[회장님께서 뵙고 싶어하십니다.]
“…….”
당연히 다른 곳에서도 접촉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S기업의 총수.
김영환과의 만남이 이렇게 성사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지간한 정치인도 쉽게 만나지 못할 정도로 입지적인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건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은 언제?”
[가능하신 시간을 말씀해주시면 저희 쪽에서 조율을 해보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내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거겠지?’
대기업 총수가 이렇게 직접 연락을 주고, 시간까지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후부터는 괜찮을 것 같네요.”
[금일 오후 말씀이십니까?]
“예. 그 다음 일정은 확실하지 않아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급한 것 같았다.
이렇게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댁으로 차를 보내겠습니다.]
“예? 예.”
[그럼 오후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봤다.
‘뭐지? 왜 당한 것 같지?’
분명히 칼자루는 이문후가 쥐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곤란한 시간을 말해 본 거지만, 상대방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 느낌이었다.
마치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 예상한 것 같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권형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기업과의 거래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작은 이익에도 민감한 곳일 수밖에 없었다.
권형태의 제안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이 달릴지도 몰랐기 때문에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제는 대기업 총수까지 직접 보는 건가?”
평소에 만나고 연락이 오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정민석이나 정민영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 측 고위 관료나 DS그룹을 이끄는 총수와의 만남이 가능했다.
“확실히 힘이 있어야 하네.”
하루아침에 신분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이런 변화가 좋은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
DS그룹.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여러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곳으로, 그들은 고급 세단을 보내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요. 편하게 왔습니다.”
“다행이군요. 저는 비서실에 있는 김민우라고 합니다.”
“아, 통화했던 분이신가요?”
“예. 오전에 연락을 드렸었죠.”
목소리가 익숙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맞이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웠지만, 정작 상대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곧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넓은 복도가 나왔다.
정장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사이사이를 지키고 있었다.
‘일부러 사람들을 모아놓은 건가?’
평소에 이런 사람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것에 흔들릴 이문후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이문후는 김민우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커다란 방의 맨 끝에 앉아있는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저 사람이… 김영환?’
멀리서 마주한 김영환의 첫인상.
뉴스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라서 얼굴이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알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보스몹이었나?’
일회성 던전에서 봤던 거대한 자이언트 랫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김영환에게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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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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