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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96화 (196/210)

196화

당신의 웃음, 친절은 다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냐고 물으면 히아신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 같았다. 다친 히아신이 천천히 진흙을 만든 검을 향해 가는 그 시간이 너무도 길고, 지루하고, 그리고 끝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못된 아버지의 원을 들어주어 나를 가지는 것이 과연 너의 행복일지 잘 생각해 봐. 해 줄 말은 그뿐이었지만 검은 안개에 사로잡힌 그의 귀는 담아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나디사.”

하지만 그녀가 체념을 받아들인 그 순간에 히아신은 엉뚱한 느낌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만든 설탕물은 어땠어?”

“설탕물?”

-설탕물?

나디사는 장난기와 다정함으로 채워진 그의 눈을 쏘아보듯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손, 발이 자유롭지 않던가. 그녀의 손 떨림은 미지의 존재를 향한 공포 때문이지 어떤 약물 때문이 아니었다.

히아신이 한 행위에만 비난을 던지고 그 이후 일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늦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입 다물고 지켜 보고 있던 암흑 또한 의문을 품었다.

- 이게 무슨 소리지?

“아버지.”

히아신은 다 된 걸음을 물렸다. 검 앞에서 빙글 돌아선 히아신은 연극배우처럼 팔을 들었다. 그가 검에서 멀어질수록 만감이 교차하던 검은 안개는 말수가 없어졌다. 대신 번개가 쳤다. 그 살기 넘치는 푸른 빛에 압도당한 나디사는 숨을 느리게 쉬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물약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지 뭐예요. 혹시 몰라 작은 쥐에게 먹여 봤는데 그 쥐가 조금 뒤에 하늘나라로 갈 줄 알았다면 치즈라도 먹여 주는 건데요.”

히아신은 자신이 만들어 낸 조잡한 이야기에 침묵하는 아버지를 보고 확신을 굳혔다. 그리고 한쪽 눈으로 나디사에게는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 그리고 물약에 대해 설명하며 주의를 끄는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네?”

늦게라도 눈치를 차린 나디사는 살금살금 기어 갔다. 일평생 기다리던 순간을 망친 아들 때문에 이성 잃은 검은 안개가 눈이 어두워진 동안.

- 사람에게 먹이면 달랐겠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파르난의 세상이 오면…….

“파르난의 세상이 오면 나를 가장 먼저 죽이겠죠. 이 세상에 하나 더 없는 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니까.”

-……잠깐.

히아신의 화려한 언변에 놀아나던 검은 안개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진흙 검을 잡을 만큼 기어간 나디사를 발견한 검은 안개는 손을 뻗었다. 손이라고는 해도 안개가 조금 더 길어진 것이지만.

- 아니야, 안돼!

간절한 그의 비명을 들은 나디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명확히 알았다. 안개가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고 다가왔지만 팔꿈치가 닳도록 기어가 검의 손잡이 부분 근처까지 손가락을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조금만 더. 저 안개에 잡히기 전까지만 힘을 낸다면.

- 비켜!

퍽, 그때 나디사를 잡을 뻔한 안개가 무언가에 부딪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나디사는 손을 쭈욱 뻗으며 고개만 흘긋 돌렸다. 등이 보였다. 자신을 지켜주고 서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말해 무엇 할까. 히아신은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온몸으로 그 안개를 막아 서고 있었다. 그것에 감사할 시간도 없었다. 자신을 잡으려고 네 갈래로 뻗쳐 오는 안개가 히아신의 목을 졸랐다. 시간의 여유는 없다.

어금니를 아득아득 갈면서 뻗은 손이 드디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핏물에 젖은 검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손잡이 부분은 물컹거리며 단단한 질감이 아니었다. 안개가 검을 쟁취하기 전에 나디사는 손잡이를 당기며 뒤로 누웠다.

- 이 배신자 자식!

거지꼴을 한 나디사의 성공이었다. 검을 뽑는 데에 실패하자마자 신전을 집어삼킬 정도로 부풀어진 안개가 하나로 모여 송곳니의 형상을 띄었다. 그 모습으로 달려들어 저를 막아선 히아신을 처단하고자 했다.

죽어!

“아…….”

안개 송곳니가 히아신의 배를 뚫었다. 검을 쥔 나디사가 달려가 봤자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히아신의 몸을 받기엔 역부족이었다.

“히아신!”

죽지는 않은 듯하나 대답은 없었다. 나디사는 좌절하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안개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핏물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눈을 하고서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분리했다. 뽑혀 나오는 검은 진흙의 껍질을 벗으며 철과 빛으로 빚은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

떨어지는 진흙 덩이 속에 감추어진 검은 천사의 날개로 빚은 것처럼 가벼워 피범벅에다가 깡마른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그녀를 허락한다는 뜻으로 작은 종소리를 냈다. 분노밖에 남지 않은 나디사는 히아신에게 쏟아지려는 송곳니를 칼날로 막아섰다.

- 이 은혜를 모르는 천한 고아가…….

무게감 없는 안개를 벨 수 있을까.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종소리를 멈추지 않는 검은 신성한 결혼식을 연상케 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서 허례 가득한 의식을 끝내고, 손을 잡고선 히아신과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며 이마를 맞대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를 받고, 그리고 마침내 흘러나오는 종소리에 맞춰 하얀 계단을 내려가고.

검이 보여 준 것인지, 자신의 가슴속에 숨겨 둔 욕망인지 모르겠으나 나디사는 분명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검을 든다. 그 맑고 가벼운 종소리가 불러온 환영이 나디사를 격려했다. 그 검을 들고 내려치도록.

- 이 무슨……!

히아신을 죽이려고 사력을 다하던 안개는 제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느낌에 감탄 섞인 숨을 흘렸다. 수천 년간 이루려던 소망은 타인의 몸과 숨결에 닿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서 지겨우리만치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 그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은 창백하고 마른 여인이었다. 그는 검이 닿는 그 잠깐의 감격스러운 감촉을 느꼈다. 차라리 죽기를, 차라리 소멸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검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그의 몸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다. 우연히 해방될 수 있단 단서를 찾아 수천 년을 헤맨 것도, 하필 꿈이 이루어지기 직전 자신이 베인 것도, 그런데도 원망은커녕 해방됐다는 생각에 황홀하기만 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한 과정과 세월이 자신의 벌이었구나. 이로써 구원을 받았다. 환영 속에서 사람이던 시절의 자신의 손, 발을 본 안개가 흩어져 간다.

“히아신!”

검을 놓친 나디사는 쓰러진 히아신을 안아 들었다. 부디 멀쩡하길 바라며 그의 뺨을 미친 듯이 쓸어 만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빗물처럼 떨어져 그의 뺨을 타고 미끄러지는 눈물이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를 잠깐이나마 오해하고 증오한 것이,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남자라고 비하한 것이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 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그와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한 자신의 어리석음까지 사랑해 주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에 그는 답을 하듯이 긴 숨을 내뱉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만으로도 나디사는 신에게 감사했다. 그의 숨이 떠나갈까 봐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몸에서 따듯한 부위를 갖다 대면 그가 정신을 차리리라는 헛된 기대 때문이었다.

“나디사…….”

“아, 세상에. 히아신. 정신이 들어? 몸은 어때? 응?”

“좋은 냄새가 나…….”

그의 말에 자연히 시선이 제 몰골을 확인하는 쪽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도 머리는 새집에, 손발은 피투성이에, 망토와 안에 받쳐 입은 옷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못 할 꼴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히아신은 기어코 그녀를 웃기고서야 제 몫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내가 벴어. 저 검으로.”

“그래?”

그는 어딘가 아쉬운 듯이 눈을 감았다. 그가 몹시 피곤하다는 걸 알지만 이기적인 자신은 살아 있다는 증거를 끝없이 보여 주길 바랐다. 부드럽게 눈을 뜨고, 내일도 그럴 것처럼 말을 걸어 주기를. 나디사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누르고자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

그런데 입술은 그의 이마에 닿지 못하고 통과해 버렸다. 마침 히아신의 몸에 있는 파르난의 문양이 더욱 짙어지며 검이 부른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본 나디사는 발광하고 있는 검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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