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상황파악은 진즉에 다 했다. 히아신은 그녀를 보기 좋게 속여 넘긴 것이다. 키스한 순간 히아신이 입술로 달콤한 액체를 넘기고, 빈 유리병을 보여 줄 때부터 그의 태도가 미심쩍다 싶었다. 강제로 한 입맞춤을 후회하지도 않는지 웃고만 있는 그를 보며 이젠 배신감도 사치라 여겨졌다. 유일하게 허락된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이러려고 그렇게 잘해 줬던 거구나.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데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자고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 거구나. 그리도 아픈 눈빛, 행동, 포옹, 입맞춤도 가능한 거구나. 사랑을 택하지 않은 건 그녀였지만 사랑을 믿고는 있었나 보다. 그의 배신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최후의 순간에 찾은 건 본인의 아버지였다. 언제부터 거짓으로 사랑을 맹세했었는지 가늠해 보는 것조차 까마득했다. 그와 우연히 만남을 가졌고, 우연이 겹쳐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그 우연도 거짓 같다.
긴 시간에 걸쳐 사랑을 배웠으나 마음이 떠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가 실수였다고 말한다면 기꺼이 안아 줄 것 같은 자신의 어리석은 사랑이 가장 미울 뿐이었다. 동료들은 죽어 가고 라드들은 잃어버렸다. 다 죽게 생겼는데도 그를 사랑한다면 이건 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병이라는 진단을 받아야 마땅했다.
“히아신…….”
“달콤하지?”
“달콤하냐고?”
“네가 자는 동안 내가 만든 거야. 맛은 어때?”
사람이 정신이 하도 멍해지면 저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진다. 마치 히아신은 꿀을 탄 물이라도 먹인 사람 같지, 하룻밤 사이 그녀를 배신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론 정체 모를 물약을 먹이고, 그 끔찍하다던 아버지를 찾았으면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서.
“히아신, 도대체…….”
작은 미련을 안고 혹시 당신도 모르고 당한 것 아니냐 물어볼 새도 없이 닫혀 있던 신전의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 없이 열린 문으로는 불청객 같은 눈바람이 들어왔다. 눈도 못 뜨게끔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강력한지 사람의 몸을 밀었다. 일어서 있던 나디사도 두 팔로 바람을 막아 보려다가 뒤로 무참히 밀려나 쓰러졌다.
하필 쓰러진 장소도 란의 옆자리였다. 바람 덕에 란의 이마가 훤히 드러나 멍 자국이 더 잘 보였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이 베이는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아!”
꽤 심하게 베였다. 바람 속에 칼날이 섞여 있었는지 일자로 그인 상처가 흉했다. 피를 흘리기 시작한 상처를 지혈해 보려는 때에 히아신의 손에도 같은 상처가 생기는 걸 보았다.
“히아신, 문!”
아무래도 바람이 문제인 것 같아 일어서려고 해봤지만 억누르는 바람의 힘이 거세 간단한 손동작 하나조차 제 마음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
“……피가 움직이고 있어.”
몸에서 떨어져 나간 피는 의지를 얻은 것처럼 스스로 그릇에 들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미소로 상황을 지켜보는 히아신의 앞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새빨간 피도 먹이 나르는 개미처럼 기어가 그릇으로 들어갔다. 세 개의 그릇. 세 사람의 피.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게 바로 히아신이 배신한 이유일 거다.
세 사람의 피를 얻은 그릇은 눈에 띄게 붉은색을 가졌다. 피를 먹고서 색이 변한 그릇도 끔찍스러운데, 그 그릇이 진흙처럼 무너져 뭉치기 시작할 때엔 구역질이 났다. 몸이라도 일으켜 보려고 낑낑거리는 그녀를 비웃듯이 바람은 그 세기를 더해 갔다.
라드의 힘이 없으면 나는 이리도 무력한 여인이구나.
할 수 있는 만큼 고개를 돌려 히아신을 노려보았다. 원망을 잔뜩 실었는데 그는 여름날 강가처럼 고요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분노와 무력감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가 싫다는 말론 부족했다.
그에게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헌신적인 사랑이 다시 보였다.
원망이 사랑을 이기고 있을 찰나에 빛이 그녀를 덮쳤다. 성스러움으로 가득 찬 빛은 신이 불렀다고 생각될 만큼 어둡고 낡은 신전 안을 밝혔다. 나디사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 빛 앞에서 가만히 앉아 따스함을 느꼈다. 향긋한 봄꽃의 내음을 머금은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증오하는구나.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인데도. 질투가 나서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지. 무려 수만 명을.>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디사는 그 신비로운 음성에 매료되어 증오스럽게만 여기던 히아신의 손을 무심코 잡았다. 그사이 야멸찬 바람이 멎고 문이 닫혔다. 신전에는 목소리의 주인이 내는 빛만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 안타까운 죽음들을 대신해서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 너는 태양이 내리쬐는 땅에 오래 머물 수 없겠지. 오로지 너를 위한 감옥 같은 땅에서만 숨 쉴 수 있다. 누구도 너를 만질 수 없고, 누구도 너는 만질 수 없단다. 끝까지, 최후의 그 날까지 외로울 거다.>
저주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은근하고 끈덕진 목소리가 조화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예견한 두렵고 끔찍한 일은 다음 차례에 일어났다.
히아신.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나 아름다운 빛을 찢어발기는 어두운 안개가 그 음성을 잠재웠다. 빈 공간만 남은 어두움이 그 빛을 조각으로 바꿀 때까지 나디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지의 존재를 맞닥뜨린 공포가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 아들아. 약속은 지키겠다. 내가 이 세상을 갖는 그 날 너희 둘만은 놓아주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히아신은 배신의 대가를 받기로 약조 받은 모양이었다. 협박을 받았든, 약속을 받았든, 제 몸을 지키자고 이런 짓을 벌였든, 히아신이 도움을 줬다는 거 하나만은 명확하게 알겠다. 그게 사랑을 저버릴 만치 실망스럽다는 사실도. 그가 배신한 이유에 사랑이 더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기만하고서 뒤늦게 붙이는 사랑의 이름은 힘이 없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목적을 이룬 히아신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의 얼굴을 이때 볼 줄은 몰랐지. 방금 빛의 음성을 들려준 이는 그의 아버지 같았다. 신의 저주를 받아 저렇게 몸도 없이 검은 안개처럼 떠다니는 걸까. 만약 그 저주가 실현된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 그가 간절히 바라는 건 무엇일까.
- 세 개의 힘을 가진 피. 신관, 라드를 다루는 자, 그리고 파르난의 힘. 그리고 스스로 산맥을 오르기를 선택한 자들.
말을 하면서도 감격에 겨운 것처럼 안개는 천장 높이까지 몸을 키웠다. 그가 말한 조건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건 두말할 것 없었다. 나디사는 황급히 돌아서 변형되고 있는 진흙을 바라보았다. 피를 먹여 빨간 진흙은 어느덧 땅에 박혀 하나의 대를 세웠다.
나의 손이 되어라, 아들아.
그 진흙이 검의 형태로 변해 갈 때 나디사는 이유 없이 소름이 돋았다. 주인을 기다리듯이 선 그 검은 매력적이라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 파르난의 힘을 가진 네가 뽑기만 하면, 그렇다면, 세상도 저 여자도 네 것이야.
피가 빠져 조금 창백해진 히아신도 말없이 그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그의 눈은 슬프게만 보였다.
- 부디, 부디 나의 손이 되어 검을 휘둘러 다오
그간 허공을 더듬는 것만 같던 목소리에 진한 감정이 실렸다. 어둠 속을 걷던 사람이 처음으로 빛을 만나게 되며 떨리는 그 목소리. 악의 없는 간절함이 느껴져 하마터면 나디사조차 속아 넘어갈 뻔했다.
무표정한 히아신은 아버지에게 답을 주는 대신 나디사를 바라봤다. 그녀의 증오에 답하지 않고 그는 안심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얄밉게 찡긋했다. 수많은 증거, 수많은 상황이 그를 가리켜 배신자라고 하지만 저 미소는 달랐다.
“예, 아버지. 분부대로 따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