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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84화 (184/210)

184화

히아신의 세상은 너무도 쉽게 누군가에 의해 부서지고 다시 세워지는 일을 반복해서 겪었다. 태어나길 원치 않았으나 낳아 준 어머니가 버리며 세상이 부서지고, 자라난 고아원에서 가족을 가질 수 있단 희망으로 회복시켰으나 또다시 버림받음으로써 부서지고, 아버지의 뜻대로 빛을 보려고 했으나 다시금 욕망에 휘둘려 조종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럭저럭 그 삶에 적응해 보려고 했을 때 나타난 나디사 마로닌은 마치 그의 삶을 구제해 줄 것처럼 달콤한 사탕과 안락한 잠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것을 잊었다. 없어진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날도 없었다.

때가 된 듯이 다른 사내와 히히덕거리며 그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고, 그와 같은 파르난의 동족들을 죽이며 명예까지 그녀의 차지가 됐다.

히아신의 잔혹함은 그녀에게 댈 것도 아니었다. 혹여나 그녀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이곳의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는 반면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파르난의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내며 영웅이 됐다.

자신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위세가 대단했다. 그녀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나쁜 경험을 주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증오해서, 누군가는 자신이 필요해서, 누군가는 자신에게 무관심해서 그의 세상을 망가뜨리고 부쉈지만 그녀는 다정하게 그의 세상 속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시한다. 모른 척한다. 아예 그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며 그의 세상을 부정했다. 그건 망치고 부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의 세상을 망치면 재건할 수 있지만 그의 세상을 부정하는 건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가 재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약간의 벌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해서 그에게 필요한 가장 완벽한 약물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약을 볼 때면 네가 약을 쓰지 않고는 배길 것 같냐고 비웃는 듯했고, 실제로 그는 그 약물을 쓸 작정이었다.

“히아신…….”

이 아름다운 잠꼬대를 듣기 전까지는. 눈이 멀었던 사람이 앞을 보기 시작한 것처럼 그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그동안 그를 가리고 있던 질투와 원망이 거두어지고 귀를 가리고 있던 자신의 욕망이 떨어져 나갔다. 보이고, 듣기 시작하자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도, 자신의 한심하고 초라한 세상을 위해 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슬프다고 목 놓아 우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감정을 뱃속에 삼켰다.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그녀의 다정함을 사랑했었던 것 아니었나. 그녀가 목 놓아 슬퍼하지 않는다고 왜 배신하려 했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 손에 들린 약병이었다. 아무리 부추겼다고 해도 이걸 들고, 먹이고, 그리고 가지려 했던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달밤에 추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들켰다. 그녀는 그의 앞날을 격려했다. 이 길에서 자유롭길 바랐으나 그 역시 종족의 남자였을 뿐인 것이었다.

“거기 누구지.”

잠든 그녀의 머리를 편하게 고쳐 주려고 했다. 어둠 속의 숲에서도 보이는 금발 머리의 외침은 히아신의 손을 숨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 저치와 싸울 순 없었다.

그녀를 계속 쫓고 있었단 사실을 이렇듯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히아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살며시 그녀의 머리끝을 밀었다. 그 감촉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집착에서 그를 놓아주려는 듯했다.

아주 잠시, 잠깐이지만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느낌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다. 그날 밤의 자신이 가졌던 추악한 욕망도.

* * *

잠깐 졸았을 뿐인데 난리가 났다. 특히 란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잠이 덜 깬 나디사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있었다.

“파르난의 기운이 지척에 있었다고!”

“알겠어요. 아까 잤으니 제가 보초를…….”

“보초가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것 같아?”

목표인 산맥은 그 근방의 사람들에게 호르스의 폭풍이라고 불리었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그곳으로 진입하기 직전 모닥불을 피우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물 떠오는 임무를 맡았으나 중간에 잠이 든 나디사는 할 말이 없었다. 지도도 그녀가 갖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목적지를 알기에 중요한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 두었지만 이 지도를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면 안 될 일이었다.

“지도는 태우자.”

“혹시 모르니 갖고 있는 게 낫습니다.”

“아니면 나한테 주든가!”

란의 말에 모두 침묵했다. 그리사는 조용히 저녁으로 구운 토끼 구이의 잔해를 치웠고 아트리스는 불씨를 키우려고 장작을 더 넣었다. 나디사는 가만히 짐 정리하는 척 그의 눈빛을 피했다.

표면상으로 공주의 명을 받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으나 그 속내는 무척이나 달랐다. 보물의 흔적을 찾아 공주에게 고해바치는 것이 라드군의 임무였지만 란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신전의 부흥과 안녕에 있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신관 랍 때문에 수비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현재, 그의 과도한 관심은 불온하게 느껴졌다. 동행은 하되 협력은 최소한으로. 란이 없는 자리에서 라드군인 셋이서 동의한 사항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란은 조용히 밤을 준비하는 라드군을 보며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나를 무시하네?”

하지만 밤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라면 파르난의 사람이 여기까지 쫓아왔단 소리였다. 소리 지르고 시선을 끌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거다.

“나한테 넘겨. 아침 되면.”

“주무십쇼, 일단.”

아트리스, 그리사는 잠들고 그녀가 보초를 서기로 했다. 가만히 팔을 베고 눕는 두 남자를 보며 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몸 상태, 쟤들한텐 말했어?”

자고 있는 제 동료들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치고 조용한 이 밤을 그는 더 차갑게 얼리고 있었다. 나디사는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란은 걱정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너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왜 록 님이 저한테 잘해 주시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녀에겐 많은 약점이 있었다. 소수 종족 출신에, 가려진 친부와 친모의 비밀, 파르난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히아신과의 사랑도 떳떳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핏줄과 진심을 감추고 숨겨야 되는 생을 살아왔기에 남을 모르는 척하는 데에는 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을 공격하는 방법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녀가 빈 만큼 다른 사람들도 약점으로 삼을 만큼 빈 곳이 많았다. 그리고 란의 빈 곳은 바로 아버지 자리였다.

“이 임무만 무사히 끝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짜 뭐가 있긴 한 거야?”

“궁금하지 않으면 됐고요.”

“…….”

“말씀 드리지 말까요?”

“쳇…… 뭐 없기만 해 봐.”

그의 약점은 예상대로 록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의 관심과 칭찬을 간절히 원한다. 그녀 자신만 몰랐다 뿐이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란 것은 다 그런가. 그러니 그 남자는, 록은, 아버지로 추정되는 그 사람은 또 다른 자식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전하려던 말을 막기를 잘했다. 어떤 말을 들었든 간에 지금 이 실망감을 지울 순 없었을 거다.

모두가 잠든 늦저녁까지 기다린 나디사는 조용히 짐 가방을 들었다. 그 안에 챙겨 온 것은 갈아입을 셔츠 한 벌, 비상약, 그러나 나머지는 편지들이었다. 실소가 나왔다. 이건 살아남을 생각이 없는 사람의 짐이 아니던가.

나디사는 조심히 편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보내지도 못할 거, 문법이고 감정이고 엉망진창으로 쓴 이 편지들을 쓰일 곳이 생각났다. 살고 싶지 않은데 살아남아야 되니 자꾸 약속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이 편지들은 버려야만 된다. 쓰지 말아야 했지만, 그것에 실패했으니. 가져오지 말아야 했지만, 그것에 실패했으니.

편지 한 장, 한 장을 새빨간 불길에 던졌다. 진즉에 없어져야 했던 것들이 불로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가슴이 아려 왔다.

나디사.

웃는 얼굴의 그가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의 삶이 이것보다는 낫기를 바란다. 부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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