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상황만 돌아보자면 록은 란을 꾸짖고 있었다. 나디사는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의 이유를 몰라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들인 란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바래다주러 온 것일까. 신전이 지금껏 자신을 감시했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괜찮을 리 없었다. 그리고 현 신전의 수장은 록, 그였다.
신관이 가진 사생아. 그게 자신의 목에 걸린 팻말이었다면 그가 모를 리 없을 터. 수장이 된 그는 자신의 정체, 친모의 정체, 친부의 정체까지도 알고 있을 거다. 친부가 누구인지는 알 듯하지만 확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을 어떻게든 미루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들어온 록은 그녀에게 선뜻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을지라도 이거 하난 알겠다. 록의 눈빛이 그녀에게 묻고 있다는 걸. 내가 누구인지 정녕 모르겠냐고.
몸을 가만둘 수 없던 나디사는 발밑에 놓인 상자를 들었다. 친모를 찾아다니게 되면, 결국 친부를 만나게 된다는 것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니. 그렇지 않아도 이처럼 자상하고, 사내답고,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했다.
나를 버린 이유를 나쁜 아버지에게서 찾고 싶지, 좋은 사람에게서 찾고 싶진 않았다. 생각은 안 해도 될 곳까지 가길 좋아하다 보니, 훗날 자신이 버려진 자신을 탓하게 될까 봐. 양부모에게 사랑받으면서 컸어도 채워지지 않는 한 자리를 그가 채워 주게 될까 봐. 나디사는 저를 버린 그에게 고마움, 사랑, 그런 것을 가져다주고 싶지 않았다.
“떠난다고 들었어.”
“네, 갑자기…….”
“나디사.”
나디사는 다가오는 그를 멀리하듯이 뒤돌아 한발 멀어졌다. 거부당한 록의 목소리는 울음기를 머금었다.
“첫 번째 신관 랍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해서.”
그렇다고 들었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관은 죄를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으며 신전이 노년에도 살 만한 집, 돈을 마련해 준다고 들었으니까. 그는 불신하는 나디사의 표정을 읽고선 서툴게 미소 지었다.
“그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스스로 떠났단다.”
“……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십니까.”
바닥만 어지러이 훑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어마어마한 진실을 밝히기 직전인 그의 표정은 묘한 기대감과 걱정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긴장감이 그녀의 어깨를 조여 왔다.
지난 스무날 동안 찾아오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곳을 떠나 눈 내리는 산맥으로 간다는 소식도 당혹스러운 이 마당에 무얼 바라는 걸까.
“출발을 미루는 것이 좋겠어. 이 상황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그가 물러나 내가 최고 신관이 됐으니 너를 도울 수 있다는 소리를 하는 거니까.”
“저를 돕다니요.”
눈앞이 빨개질 만큼 섬뜩한 분노가 가슴에 뭉쳤다. 제 것인지조차 당황스러운 분노였다. 그가 기대하고, 그녀가 기대한 부녀 상봉은 이런 게 아닌데도 나디사는 발끈하는 마음을 쉽사리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녀의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공기에 당황한 건 록뿐만이 아니었다.
“호기심 생긴 란이 찾을 수 있다고 공주님을 자극한 거야. 공주님의 반응도 무언가 탐탁지 않아. 비정상적으로 이것에 집착하는 건 동생을 위해서가…….”
“지금 공주님을 비방하시는 겁니까? 제 앞에서?”
“비방이 아니라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겠다는 거야. ”
“란 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리 없죠. 어차피 명이 내려왔으니 저는 따를 뿐입니다.”
나디사는 제 걱정을 해 주는 듯한 록의 말들을, 할 수만 있다면 갈가리 찢고 싶었다. 새로이 생긴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 분노만 택하는 걸지도 모르지. 한번 터지면 주워 담을 수 없을 것 같아 사력을 다해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디사는 제가 낸 상처를 묵묵히 받는 록의 모습에 안심이 됐다. 챙길 생각 없던 상자만 들고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열렬하게 란을 변호할 생각은 없었거늘. 란이 공주에게 말해 보물을 찾게 만드는 상황이 거북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란의 목적은 너무나 뚜렷했다. 공주가 찾는 그 보물을 제 신전에 쓸 생각이겠지. 그 마음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지금 그녀의 최선은 자신을 걱정하는 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하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저 자신이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으며.
그녀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엔 정신을 보호할 방어막도 없을뿐더러 연약했다. 보기 싫은 그 지루한 감정을 받아들이면, 샤포드에 살고 있는 한 상냥한 부부의 마음에도 가시가 자라나니까. 그러니까 이 감정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록의 앞에 있으면 어려웠다.
그 두 사람이 가여워서라도 자신은 이 감정을 인정하면 안 된다. 오래 떨어져 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절대 없었다. 그녀가 갖고 싶은 건 진실, 오직 그 하나였다. 그 뒤에 가려진 감정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 *
“그럼 반대편으로 돌아서 날아가는 건 어떨까.”
“어차피 파르난의 놈들은 이 지도가 목적이라 우리를 따라올 거니까?”
“그래. 그럼 저들이 우리에게 속아 넘어가도록 연기하자고.”
틀렸다.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그쪽은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자갈길이었다. 히아신이 생각하기에 나디사같이 여린 몸으로는 한 걸음도 못 가 쓰러지고 만다.
“그게 나을 것 같아. 자리를 잡고 쉰 다음 해가 뜨면 출발하자.”
오답을 고르며 저희끼리 좋아하고 있다니. 심기가 불편한 히아신은 훔쳐 온 라드의 턱을 거칠게 긁었다.
“그럼 정해진 거지? 여기에 자리를 펴. 나는 물을 떠 올게.”
“괜찮겠어? 안색이…….”
“괜찮아.”
히아신은 제 체취와 시선을 능숙히 숨길 줄 알았다. 핏덩이 같은 신관과 애송이 둘에게 들킬 경력이 아니란 말씀이었다. 하지만 저 아트리스 메놈이 그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히아신은 내가 여기 있노라고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니 그 손길을, 눈빛을 그따위로 허락하지 말라면서 역정 낼 수만 있다면.
그렇지만 나디사가 제 말을 들어줄 리 없다는 생각에 주머니로 손이 갔다. 그 주머니 속에 든 약물을 한 방울만 탄다면 그녀는 그의 차지가 된다.
물을 뜨기 위해서 저 혼자 숲으로 떠난 나디사의 뒤를 따라간 것에 일말의 욕심이 없었을까. 히아신은 훔쳐 온 라드가 따라오지 않게 잠을 재우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한 방울만 섞으면.
어차피 저곳에 가서 살아남을 것 같지도 않아. 저 멍청한 남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히아신은 수풀을 밟아 건너, 얇은 물줄기가 흐르는 시냇물에 당도할 때까지만 해도 욕망의 편에 서 있었다. 공주의 명으로 저 아까운 나디사의 몸이 상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잠복만 며칠을 하느라 제법 수척해진 히아신은 소리 없이 접근했다. 밑돌이 보이는 맑은 물가로 가 그녀의 흔적을 추적할 무렵. 집요한 방황 끝에 그는 잠든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걱정이 번져 양심을 눌렀다. 앙증맞은 돌에 몸을 기대어 누워 있는 그녀가 땀을 흘리며 잔다. 늦저녁에 출발해 해가 뜨지도 않은 이 새벽. 날아오고, 걷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는 여자가 열심히도 여기까지 왔다.
그 안타까운 여자를 끊어 내 데려가는 것이 자신의 도리이지 않을까. 아버지는 빈말은 안 한다. 그와 그녀는 당신이 계획한 새장에서 놓아줄지도 모른다. 관심 없는 세상은 아버지에게 주고, 그는 그녀만을 가져가면 될 일이다. 그 유혹이 너무나 그럴듯해 보여 거절할 마음도 없다. 히아신은 주저를 끝내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리 가까이 앉아 있으니 향기, 숨소리, 살결이 느껴져 좋았다. 이걸 눈치 보지 않고 가지려면 사랑의 약이 답이었다. 고민하는 척하던 히아신은 조심스레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가 꿈꾸는 앞날처럼 달콤한 약물의 냄새가 응원을 전했다.
“……히아신.”
그의 세상이 오려던 순간에 들린 가냘픈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