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68화 (168/210)
  • 168화

    목적을 달성한 어린 신관은 꽤나 발랄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인도했다. 화려한 나팔 소리와 조잡한 카펫을 깔아 둔 길로 나디사를 데려간 것이었다. 그녀는 장갑을 끼라고 할 때부터 짐작한 장소인 성 내부로 들어오게 됐다.

    “나디사 경. 괜찮으신가요.”

    왕실 분위기가 어려운 나디사는 살짝 기가 질려 있었다.

    “예.”

    간단히 답을 하는 그녀에게 어린 신관은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주었다. 긴장을 덜어 주기 위한 노력이라는 걸 느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말을 안 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공주는 왕실에서도 대우가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장자 우대 성향이 있는 왕실에서 다음 후계자를 공표한 상태였고 쌍둥이, 거기에 여성인 공주는 작은 영지와 성을 받아 생계를 어렵게 꾸려 나가고 있다고. 그런데 그런 공주의 성조차 벽걸이 장식과 홀의 커튼은 계절이 지날 때마다 새로 단다며 어린 신관이 설명했다. 왕실의 사치는 일반인과 견줄 것이 아닌 것이, 쓰지도 않는 의자에 덧댄 천도 평민은 구경할 수 없는 최상위 품질의 것이었다.

    공주의 시녀로 발탁된 이들의 외모와 의복도 출중하여 나디사는 빨지 않은 장갑을 은근슬쩍 등 뒤로 감추었다. 공주의 방으로 이어지는 빨간 카펫을 밟는 내내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그녀의 태도를 꼬집는 듯했다. 이내 벽과도 같이 높게 선 문 앞으로 오게 된 나디사는 무심코 장갑 끝을 만지작거렸다.

    “나디사 경.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그나마 의지하는 기분이 들던 어린 신관도 저 안까지는 함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젊은 왕실군 둘이서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서 기시감이 느껴지나 했더니 왕세자의 파티에 초대됐을 때도 이와 같았다.

    경직된 자세의 나디사는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걷지도 않아 그녀는 강제적으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침대가 내부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오로지 그 거대한 침실을 위한 방인 듯이 주변에 볼 거라고는 시녀들뿐이다. 혼자 그 무지막지한 침대를 쓰기에는 작은 체구의 여자가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공주라는 소개를 받는 동안 둘러싼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의복과 얼굴을 평가했다. 파리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공주는 그 무례한 시선에 익숙한 듯 보였다.

    “자네가 나디사 경인가.”

    공주의 말 한마디에 눈알들이 파도처럼 철썩이며 이쪽, 저쪽 옮겨 다녔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 나를 구했다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편히 출세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죽은 라넌 샤스를 떠올리면 그 말에 긍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라넌 경의 덕분입니다. 공주님을 찾으라고 죽기 전까지 지시하셨습니다.”

    기대하던 답변이었는지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올렸는데도 공주의 앞에서 하니 그 무게가 달랐다. 후계가 정해진 공주에게 눈도장 박으려고 온 인사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샤스 가문과 또, 그, 성이 뭐였지.”

    “……마로닌입니다.”

    “그래! 저 마로닌 가문에게도요. 그 파르난의 구렁텅이에서 공주님을 구해 오고.”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희의 하나뿐인 공주님을 데려오는 공을 세웠으며…….”

    찾지 못한 왕자는 죽었다고 단정하는 투였다. 그 소란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공주의 눈썹 끝이 왕자 얘기가 나오자 살며시 들렸다. 옆에서 꿈쩍 않고 서 있던 시녀장은 공주의 뜻을 읽고 배에 힘을 주었다.

    “공주님께서 회복이 덜 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하시고 나가 보시죠.”

    속말을 다하지 못한 귀족들은 아쉬운 마음에 헛기침을 흘렸지만 공주의 보모 격인 시녀장의 권력에 도전할 멍청이는 없었다.

    나디사만 빼고 모두 미적거리며 그 침실을 벗어나는 찰나 미약한 목소리가 상황을 바꿨다.

    “나디사 경.”

    귀족들이 나갈 수 있게 비켜 서 있던 나디사는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네, 공주님.”

    “자네는 남게.”

    우르르 밖으로 나가던 걸음들이 한곳에 멈추어 서서 웅성거렸지만 그 소란이 길지는 않았다. 공주 직속의 왕실군들이 들어와 귀족들의 안내를 맡았다. 정갈하고 단호한 그들의 손짓에 이끌려 나간 귀족들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이윽고 침실 문이 닫히고 찾아온 평화는 달콤하기까지 했다.

    “가까이 오게.”

    나디사는 티 나지 않게 헛웃음을 지었다. 공주가 지척에 있는데 하는 생각이라곤 오로지 앞서 본 그 남자뿐이었다. 직접 가서 말을 걸어 보면 무언가 와닿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걸음은 끌려가는 사람처럼 더뎠다.

    “나가 봐.”

    본인을 보살피는 시녀장마저 내쫓는 공주를 보며 장갑 끝을 쥐었다. 갑갑해서 벗어 던지고픈 기분이 드는 터였다. 무표정한 얼굴의 시녀장은 단정한 걸음으로 침실 옆에 딸린 옷방으로 들어갔다.

    공주의 정원에서 키우는 작고 예쁜 새들의 노랫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전투로 인해 불타 없어진 건물과 천막이 수두룩한데 이곳은 내부 단장이 잘 되어 있어 바깥의 참사와는 관계없는 곳 같았다.

    “긴장하지 마라. 꾸짖고자 남긴 게 아니야.”

    단둘이 남게 되자 긴장한 기색이 돈 나디사를 공주가 몰라볼 리 없었다. 기다란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긴 공주는 베개 무더기에 기대앉았다.

    “사람이 많아져 곤하다. 저 늙은이들 속셈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네.”

    “말수가 없는 편이구나?”

    “네.”

    “그래. 나는 말을 아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자네는 적임자구나 싶어.”

    나디사는 말의 흐름을 읽을 수 없어 귀만 열고 있었다. 얌전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믿는 수밖에. 청초한 공주의 속눈썹 끝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살가운 손짓을 했다.

    “나디사 경.”

    “네, 공주님.”

    “자네를 믿어도 될까?”

    어떤 의미에서 믿고 싶다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어 침묵했다. 공주는 가느다란 제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침실에 들어오기 전 그녀가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저 늙은이들은 믿을 수 없어. 당장이라도 왕세자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면 나를 버리겠지. 물론 그럴 확률은 낮다만.”

    복잡한 정치 이야기는 나디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하고 배움이 짧은 그녀는 명령을 받고 이행하는 군인 자리에 맞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난감한 기색의 나디사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공주는 말없이 웃었다. 힘이 빠져 보이는 그 미소가 청초한 얼굴과 그림처럼 맞아떨어졌다.

    “그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

    “어떤 제안 말씀이십니까.”

    “록에게 들었다. 신관인 록은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지. 그 사람이 보증한 자네이니까…… 거기다 내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도 했고.”

    그 말에 대해서 정정하고픈 나디사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이불 밑에 있던 손을 빼낸 공주가 그녀 쪽으로 어깨를 틀었다. 손 하나를 내민 그녀는 창으로 드는 햇살이 버거운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나와 맹세할 수 있겠는가.”

    나디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빛에 공주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비밀을 지켜라. 그리고 평생 성에 갇혀 있어야 될 나를 대신해 눈과 날개가 되어 줘.”

    록의 말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애초에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조심스레 공주의 손을 잡은 나디사는 책에서 보고 읽은 그대로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살짝 내렸다가 떼었다.

    “……라드군인 저는 그런 맹세 없이도 공주님의 것입니다.”

    “속에 없는 말은 못 하는구나. 내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그녀가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비밀을 지키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이나 공주는 의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 맹세까지 부탁한 거야.”

    나디사는 지그시 입 안쪽 살을 물었다. 부탁이라는 단어가 좋은 적은 없었다.

    “동생이 살아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