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리사아! 시네라아!”
“부끄러워.”
면회 허락 시간이 되자 치료소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간 마벤의 목청이 갈렸다. 이 비명이 제 동료의 것임을 알아차린 그리사의 시선은 입구 반대편을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본 치료소의 환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건 당연했다. 볕에 말린 약초 냄새가 나는 이곳은 웃음소리가 나올 일이 얼마 없었다.
“야!”
마벤은 저를 부끄러워하는 그리사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그에게 달려갔다. 시네라, 아트리스와는 같이 있었지만 그리사는 진정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전쟁에서 다쳤다고 했기에 잠을 설치도록 걱정했는데 저 재수 없는 표정은 여전하여 마벤을 안심시켰다.
“아!”
착, 그렇다고 등판을 때리는 일까지 멈추지는 않았지만.
“걱정해서 달려온 사람한테!”
“하아…….”
헤어진 기간은 생각나지도 않게 친밀한 대화였다. 마벤이나 그리사나 달라진 것이 없는 상대방이 좋은 듯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트리스와 나디사는 시선을 교환하며 환히 웃었다.
“저, 마벤. 나도 있는데…….”
“그러게! 맞다. 너 내가 다치면 더 다치게 해 준다고 그랬지.”
“하하…….”
고사이 그런 깜찍한 약속까지 했는 줄은 몰랐다. 동작이 멈춰 있던 나디사는 얼굴을 잊을 지경인 시네라의 침상에 먼저 방문했다.
“시네라.”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 감추고 있던 선물을 그에게 보였다.
“와, 이, 이게 뭐야, 나디사.”
“시네라가 고기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서. 내 몫으로 받아 놓은 걸 따로 빼 뒀어.”
“고, 고마워.”
스튜에 넣을 수 있는 고기 뭉치를 받은 시네라는 말 더듬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왼팔이 부러졌지만 치료사 말로는 수일이면 증상이 낫는다고 했다. 다리가 절단된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화살에 어깨를 맞은 그리사도 내일이 퇴원 날짜이고. 오히려 두 사람은 치료소에 있는 게 부담인 얼굴이었다. 라드군이라 특별 대우를 해 준 모양인데 동료로서는 이러한 대우가 반갑기만 했다.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어요.”
감성적인 아트리스는 계절을 느끼라고 꽃을 꺾어 왔다. 신관들이 가져다준 화병에 꽃을 꽂아 넣던 아트리스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다고 해, 그리사.”
“… 잘 지낸 것 같아 보이는데요.”
마지막에 헤어질 때 얼굴을 붉히며 싸웠던 두 사람이었으니 만남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벤과 시네라는 말을 하다 마는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이유가 전쟁이긴 하지만 옛날처럼 한 동료로 뭉치게 됐다. 까지고 다친 서로의 얼굴이 못났니 마니 하며 노는 발톱 부대의 안색이 화사해졌다.
“아, 나디사. 히아신은?”
부드러운 말씨로 지난 시간을 묻던 분위기가 서먹해지는 이름이었다. 히아신의 실종을 모르는 시네라, 마벤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도 몰라.
그게 나디사의 머릿속에 거침없이 써진 말이었지만 대신 아트리스가 나서서 대답을 해 주었다.
“히아신 얘기는 나중에 해.”
“응?”
“듣는 귀가 많으니까, 나중에.”
단호한 아트리스의 말에 마벤의 궁금증은 어물쩍거리며 감추어졌다. 아트리스는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나디사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녀와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뜻의 눈길일 거다. 시네라의 물시중을 들던 나디사는 어렴풋이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밀로 해 줄 수 있겠어.’
상대를 끌어안고 운 탓에 얼굴이 엉망이 됐지만 둘 중 누구도 웃지는 않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아트리스가 포기한 듯 엷은 미소를 보였다.
‘파르난의 사람이라고 해도 최악의 짓을 하지 않았으니 네가 기억하는 거겠지.’
‘…….’
‘히아신의 일을 알면 안 그래도 심란한 사람들이 더 우울해질 거야. 문제가 생기기 전까진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어.’
입으로 상황을 정리한 아트리스는 그녀에게 다정히 인사를 한 후 그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묘비가 세워지는 그 날까지 가져가려고 생각했던 비밀이 꽤 쉽게 밝혀졌다. 히아신과 가장 껄끄럽던 관계인 아트리스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다행이었다. 그건 아트리스도 떳떳하진 않은 입장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짊어지던 비밀을 둘로 쪼개어 나누니 적당하게 살 만했다. 그리사도 히아신의 비밀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아트리스와는 상황이나 성격이 달랐다. 그리사는 예상이 가능했으나 이쪽은 아예 말할 생각도 없던 대상이었으니.
“또 둘만 알고 있는 거지?”
눈치 빠른 마벤은 손가락으로 나란히 선 아트리스와 나디사를 가리켰다.
“이랬는데 나중에 엄청 크게 다쳤다거나 이러면 가만 안 둬.”
그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으나 나디사의 미소는 무력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우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 힘들었다. 팔짱을 낀 마벤은 그리사가 도맡아 대화하고 있던 차였다. 치료소 천막을 거두고 나타나 두리번거리던 신관 하나가 헐레벌떡 나디사를 불렀다.
“나디사 경.”
“아, 네.”
“지금, 나가 보셔야겠는데요.”
불이라도 났나 싶어 발톱 부대원 전원이 바라보자 어린 신관은 뺨을 살짝 붉혔다. 관심과 시선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동료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으나 어린 신관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의 재촉을 잇는 신관의 안내에 따라 나간 나디사는 천막을 거둬 주는 그의 행동에 낯을 굳혔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어서 나오세요.”
부담을 갖고 치료소 천막 밖으로 나온 나디사는 장갑을 끼라는 요구에 주머니 속 장갑을 꺼냈다.
어린 신관은 손을 모으고 서서 그녀가 복장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생각하며 장갑을 손에 끼워 넣던 나디사는 문득 어깨가 떨렸다.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눈, 코, 입은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녀가 아는 사람 같았다. 부드러운 천으로 손가락을 감싸지는 감촉을 느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게 즐거운 듯이 싱긋 웃었다. 저 웃음,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나디사 경?”
“네?”
저를 찾는 목소리에 시선이 돌아왔다. 얼이 빠진 나디사의 모습이 걱정됐는지 어린 신관이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어린 신관 특유의 단발머리가 그녀의 마음처럼 흔들렸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아닙니다.”
그런데 한 번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나디사는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치료소 앞에 있는 남자에게 굳이 시선을 주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자세나 저 능글거리는 미소 같은 게 너무나 그 남자와 닮아 있었다.
드디어 미쳤나.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에게서조차 그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빤히 바라보며 웃는 느낌이 닮은 건 그녀보고 어떡하라는 건가. 꽃잎에 앉는 나비마저 그가 보내는 것 같은데.
“경.”
“……갑니다.”
그러나 어린 신관을 설득할 말이 없었다. 저 남자가 내가 아는 남자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어린 신관의 표정이 상상이 갔다. 나디사는 긴 말을 하지 않고 어린 신관의 뒤를 따랐다. 장갑을 겨우 다 낀 그녀는 흔들리는 단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저를 끌어당기는 그쪽으로 다시 눈이 돌아갈 것 같아서.
그런데 정말 아닐까.
입고 있는 옷은 왕실군 같았다. 정교하지 않은 사복 차림이지만 왕실군의 특색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돌아본 나디사는 제자리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그녀에게 인사하듯이 또 웃는다.
히아신만큼이나 이상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