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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21화 (121/210)

121화

아침이 오면 깨어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리사의 상태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웃돈을 주고 불러온 의사는 그를 진단하는 내내 표정이 밝지 않았다.

풋잠 들 새도 없이 그의 곁을 지켰던 나디사는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가지런히 놓인 꽃병을 닦아 댔다.

“저기.”

맨손으로 닦은 꽃병이 번질번질해질 즈음 젊은 의사는 진료를 마친 듯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진료가 끝났는데 이 남자분과는 어떤 사이이신지.”

“동료입니다. 상태가 많이 나쁜가요?”

점심시간을 모조리 진료 시간으로 할애한 의사는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회복할 겁니다. 젊어서 그런지 회복세가 빠르군요.”

“정말입니까.”

“네. 깨어나면 먹는 것만 조심해 주세요.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은 것으로 주시고.”

이대로 아픈 그리사를 대책 없이 여관에 둘 수는 없었다. 여관 비둘기를 빌려서 살인 사건을 비롯한 현 상황을 우선 가장 높은 신관인 록에게 전달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답장은 아직이었다. 아무래도 이처럼 중요한 이야기는 얼굴을 보고 올려야 될 듯싶었다.

“하…….”

정답고 따스한 정오를 물리칠 듯한 한숨 소리에 의사는 조금 웃었다.

“여기는 제가 돌보고 있을 테니 잠시 나가 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잠시라도 눈을 뗐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돼서요.”

이렇게 만든 범인도 이 마을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텐데.

“이런 작은 마을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요? 걱정 마세요.”

이 마을 출신이라는 의사의 말이 거짓은 아닐 거다. 겨울을 대비하는 개미처럼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종일 창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아는 사이인 양 눈만 마주치면 인사와 포옹을 나누느라 그것만도 하루 반나절이 가게 생겼다.

이런 평화 속에서 자라난 의사는 피투성이가 된 그리사를 보고도 계단에서 심하게 넘어진 거냐고 생각했다. 파란 멍이 올라온 그리사의 얼굴이 안쓰러워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꼴사납게 울고 있기만 할 순 없었다.

“그럼 잠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오, 걱정 마세요. 저녁 전에만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고요.”

그리사가 의식이 돌아오기 전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들었기 때문에 들어 옮기는 건 포기했다. 발톱 모양의 배지를 침대맡에 놔둔 나디사는 잠든 그리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금방 올게. 저…… 그럼.”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의사와 짧은 인사 시간을 가졌다. 벽걸이에 걸어 둔 망토를 챙겨 든 나디사는 마지막 일정을 위해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관 주인이 일어나고 얼마 안 돼 방을 하나 더 빌렸다. 키가 큰 히아신이 의자에 구기듯이 앉아 쪽잠을 자는 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방을 받은 히아신은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방을 쓰는 듯했지만.

“히아신.”

가볍게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기척이 없었다.

“히아신.”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기 중이던 그녀의 눈빛이 은연중에 변하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다 못해 쓰러진 건 아닐까 싶어 문고리를 당기려던 차였다. 하마터면 머리가 끼일 만큼 확 열리는 문에 밀려나고 말았다.

“왔어?”

“뭐 하느라…….”

민망한 자태로 맞이한 히아신은 웃통을 벗고 있었다. 아래라고 꼼꼼히 가려 둔 것은 아니었지만.

박하 같은 비누 향기가 은근하게 흘렀다. 근육으로 각져 있는 그의 몸에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이 흘렀다. 치골이 보일락 말락 하게 가린 천은 손짓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쉬고 싶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씻고 온 히아신은 그녀가 들어올 수 있게 한 걸음 비켜 줬다.

“들어와.”

“왜 씻었어.”

“항상 대비를 해 둬야지.”

“무슨 대비.”

“부끄럽게. 다 알면서.”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되면 여기가 여관이고, 그리사가 다쳤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겠다. 혼자라도 성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가 그걸 기억하고는 있는지 의문이었다.

“어…… 저녁 전에는 돌아올게. 혹시 그전에 그리사가 깨어나면 설명 잘해 주고.”

“알았어.”

“…… 정말?”

“응.”

기름처럼 매끈한 대답이 수상쩍어 나디사는 눈을 갸름하게 떴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이 문을 잡고 서 있던 히아신은 그 뜻을 읽었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누구 지나가는 사람이 없나 싶은 눈짓으로 복도를 확인한 히아신이 빠르게 움직였다.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딱 잡는다. 어젯밤 한 약속이 기억난 나디사는 순간적으로 발가락이 굽었다.

‘그럼 특별한 나를 위한 아름다운 약속 같은 것도 있겠지.’

‘어떤 약속.’

‘볼 때마다 입을 맞춰서 감동시켜 주기. 특별한 사람한테 그 정도는 당연한 거잖아?’

한 시간 동안 생각한 거라며 조르는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하필 이런 때에 히아신은 약속을 상기시키듯이 눈을 감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디사는 그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 발끝을 들었다.

내뱉은 말은 지키겠다는 뜻이었으나 손과 발이 떨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 봤자 그의 맨 가슴만 보일 뿐이었다.

입맞춤을 기다리는 그의 눈이 어느덧 음탕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윽한 눈빛을 받고 떨어지는 자신감처럼 발끝이 내려가는 차였다. 사나워진 그의 손이 다가와 얄쌍한 허리를 감았다.

문을 지탱하던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음과 동시에 혀를 놀렸다. 정중한 구애를 하듯이 입술을 핥으며 기다렸다. 그를 못 이겨 입을 벌린 순간 혀가 쳐들어왔다. 그제야 눈을 감은 히아신의 손이 그녀의 허리부터 둔부까지 음험하게 쓸어내렸다. 조급하고 거친 손길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자 억눌린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이성을 챙긴 그녀가 먼저 거리를 벌리고 단정한 몸짓으로 물러났다. 아쉬움 남은 입술을 혀로 핥은 그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다음은 언제 해 줄 거야?”

“하, 다녀와서, 얘기하…….”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러면 그리사는 누가 지켜.”

“자기 스스로?

다 된 분위기를 또 제 손으로 망치고 있었다. 힐긋 쳐다보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정한 손 키스를 날렸다.

“약속을 잘 지켜야 나디사가 나한테도 약속을 지켜 주겠지. 오늘 저녁은 기대해도 되지? 설마, 만약에, 또 나한테 경비병 노릇 시킬 생각은 아니잖아.”

“…… 늦지 않게 올게.”

“응. 사랑…….”

달콤한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히아신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저를 보는 바람에 말도 걸음도 묶여 버렸다.

“이러니까 꼭 부부 같아. 아침에 헤어지고 저녁에 보는.”

히아신은 특별한 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잘하고 하찮은 일상에도 그는 아이같이 좋아하고, 쑥스러워했다. 그가 바라는 특별함이라는 건 알고 보면 지루하고 시들한 것들이지 않을까.

일이 끝난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평범한 하루 같은 것 말이다. 나디사는 그가 그 역할에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올게.”

그래서 그녀도 어색하게나마 그 평범한 일상에 동참해 주고 싶었다.

“빨리 와야 해.”

“응.”

오후에 이르기까지 흙에 녹아든 빗물 냄새가 남아 있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부디 오늘은 그가 원하는 평범한 저녁을 함께 맞이했으면 했다.

* * *

공주와의 회담이 목젖을 치기 직전까지 다가오자 신관 쪽의 재촉과 간섭이 도를 넘었다. 대열을 웅장하게 하라는 둥, 등장 시에 날개를 펴 상대의 기를 죽이라는 둥. 극성 보모 같은 신관의 책임자가 된 라넌은 그들의 요구 사항에 넌덜머리가 났다.

“이러다가 정말로 전쟁이라도 나면 어떡합니까.”

“나면 나는 거지. 군인이 전쟁을 두려워하면 어떡해. 그때가 되면 네가 맨 앞에 서게 될 텐데.”

어린 부관의 걱정을 받아 줄 여력이 없던 라넌은 걸어오는 이들을 보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발톱의 배지를 차고 있는 청년들이 그녀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짧은 눈 맞춤으로 인사를 받아 준 그녀는 그만 지나가려는 발톱 부대를 불러세웠다.

“잠시.”

갈색 머리의 잘생긴 청년을 필두로 걸어가던 이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인원수도 적은 부대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지만 가을이 되면 재편성하기로 했으니 그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개죽보다 더러운 그녀의 기분이었다.

“수장은 나와 얘기 좀 하지.”

“대열을 다시 수정하라는 명 때문에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어떤 명을 받았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그것도 결국 내가 내린 거 아닐까? 내가 네 체면을 지켜 주고 있을 때 잔말 말고 따라오는 게 좋을걸.”

본색을 드러낸 건지 모르겠다만 요즘 들어 더 삐딱하게 나오는 듯했다. 제 동료들을 보내고 아트리스는 그녀를 따라서 빈 막사로 들어갔다. 공주 측이 성 앞에 막사를 쳤다고 들은 이후로 이쪽도 서둘러 치는 모양새였지만 그쪽은 인원이 성에 비해 적어 그런 것 아닌가. 이쪽은 왕성과 대신전을 손에 넣은 마당인데 그럴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결국 불필요한 구색 맞추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들은 보고 내용으로는 저쪽 공주 측으로 간 다른 이들도 데려오게 해 달라고 요청을 넣은 모양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진한 동료애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을 알고 난 지금은 아니었다.

아트리스 메놈이 증거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동안 그녀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자신이 왜 불려 왔는지 모르는 그 가증스러운 황금색 눈동자는 기운이 쪽 빠져 있었다. 첩자 노릇을 하며 양쪽을 오가느라 힘이라도 부친 건지 뭔지.

“아트리스 메놈.”

“네.”

꼴에 군인이라고 절도 있는 그의 태도가 더 싫었다. 가구 하나 없이 빈 막사를 둘러보던 라넌은 싸늘하게 말문을 텄다.

“신관이 되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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