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내친김에 저지른 말들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가장 바라는 결과는 히아신이 나쁜 짓을 포기해 주는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 히아신은 온 관절이 부러진 양 얼어 있었다. 그건 그녀가 바라던 결말 중 무엇도 아니었다.
화를 내거나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해서 되려 그녀를 민망하게 하거나 지면을 박차고 일어나 떠날 줄 알았지.
나쁜 말은 눈 감고도 받아칠 줄 알면서 왜 조금이라도 좋은 소리를 하면 칼에 찔린 표정을 지을까. 묻지 않고 관심 있게 지켜만 보고 있었더니 상태가 날로 불량해졌다. 입술이 나오고 미간은 일그러트리고 박자를 타듯이 고개는 까닥인다. 불편한 자리에서 보이는 증상을 빠짐없이 하고 나서 히아신은 불현듯 눈을 떴다.
“그거 알아?”
알고도 모른다고 하고픈 나디사는 치미는 감정을 참고서 어른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너는 가끔 보면 나보다 더 약았어. 아주 못됐다는 소리지.”
“하.”
그러면 그렇지. 히아신은 진지한 대화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버릇이 있었다. 진실을 피하고 싶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기에 내친김에 불러온 진심을 이만 내치려던 차였다.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뜯고 있던 손을 그가 낚아챈 것은 동시였다.
“이것 봐.”
“아…….”
“다른 남자 때문에 이렇게 손 뜯고 있으면서. 역시 나 같은 놈은 너에게 거쳐 가는 남자 중에 하나가 아니겠어?”
지금껏 이런 식의 비꼬는 말을 해 본 적 없던 히아신이 다소 삐딱한 자세로 앉아 그녀를 몰아붙였다. 어쩌다 보니 몸을 돌려 그와 마주 앉게 된 나디사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막아 냈다.
“나한테 그런 재능은 없어. 제대로 된 남자도…….”
남자가 너 하나뿐이었다는 말은 서로에게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자기 안에 이런 비굴한 자존심이 살아 있는 줄 몰랐던 나디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 너 재능 있어, 나디사.”
그만 끝내고 싶은 주제인데 히아신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의 꼬리를 늘였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도 아파.”
상대를 공격하는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마치 물이 고인 물도랑 같았다. 침실에 내리비추는 달빛이 반사되어 눈물처럼 보이는 듯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뱉던 히아신은 억센 손길로 그녀의 손등을 잡아 올렸다.
“나는 피가 안 난다고 이제 다 나은 줄 아나 봐. 나도 엄청 아픈데.”
벌로 서운함이 담긴 손등 키스가 내려졌다. 입술이 닿는 부위가 간지러워 나디사는 손을 감추고만 싶었다. 잡힌 손을 빼 가지 못하도록 악력을 쓰는 히아신에게 차분히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 그리고 어디가 얼마나 아픈데.”
죽어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꽉 잡고 있던 손이 차츰 힘을 뺐다. 떨어트릴 수 있을 만큼 손힘이 약해지자 이제는 마음이 말썽이었다. 나디사는 그 손이 자신을 잡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숨 막히게 잡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의 손바닥이 자신 만큼이나 거칠었다. 얼굴은 뽀얗고 아름다운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손은 저 혼자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보다 못했다. 손을 아기 살결처럼 보드랍게 해 주는 크림을 사 줄까 싶던 나디사는 문득 조용해진 앞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언뜻 이름 모를 못에 핀 들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를 사람의 발길이 끊긴 물녘에 던져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의 눈으로 만든 숲과 강이 온몸을 에워싸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아파도 이렇게 해 줄 거야?”
“그…….”
“그렇다고 대답하지 마.”
“그러면.”
그녀의 얕은 지식으로는 그를 만족시켜 줄 수 없을 터였다. 남녀관계에 대해서 그녀는 무지하고 순진했다. 어쩌다 그가 미운 다섯 살처럼 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오늘의 히아신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손등을 감싸고 있지만 오히려 붙잡는 힘은 그녀가 더 강했다. 그는 그 손을 아주 조금씩 움직여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들키지 않고 싶은 것처럼 조심스레.
“나를 특별하게 대해.”
그는 얕은 강물에 사는 그녀에게 주문했다. 깊은 바다에서 사는 이들만이 아는 것을 가지고 오라고. 어리석은 그녀를 잡아 와 바다로 이르는 길목에 풀어 두었다. 저도 그게 무언지 모르는 그는 슬픈 눈을 한 어부였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해 봤어, 나디사.”
“어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원래의 계획대로 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자꾸 네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하니까 든 생각이야.”
그의 뻔뻔한 얼굴 말고 다른 데서 긴장된 티가 났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와 맞닿은 손이 태풍을 만난 나비처럼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네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가게 하려면 거쳐 가는 남자 중에 하나여서는 곤란하지 않겠어?”
“……그럼?”
“누구보다 특별하게. 너만의 단 한 사람으로.”
그렇게 말한 히아신은 갈증이 나는지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몽롱한 눈길로 단념하지 못한 소망을 이야기했다.
“그런 남은 날들을 줘. 그러면 생각해 볼 거야.”
아슬아슬하게 이성은 붙들었으나 나디사는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은 듯이 뛰는 심장을 느꼈다. 특별한 단 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다니. 이 망아지 같은 남자는 그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말을 안 들을 가능성이 컸다. 이럴 게 아니라 그를 고발한다면 간단히 풀릴 문제였지만 어디 세상일이 쉬운 게 있나. 과음한 것처럼 상기된 그의 소망을 들은 순간부터 간단한 건 없었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어리석긴 마찬가지인 그의 뺨이 빨갰다. 그렇게 기대도 안 했다는 얼굴을 하면 반칙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는 바다로 나아가 보겠다는 물고기가 신기한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해 주게?”
“그렇게 해 줘야 된다며.”
“아, 나도, 나도 모르는데. 잠깐만. 알아볼 시간을 줘. 오늘 밤만, 아니, 한 시간만.”
흥분하여 목소리가 쉰 히아신은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웃었다. 약간의 떨림이 있는 그의 손을 잡고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안에 사는 양심이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다. 특별함을 바라는 그가 사랑스러워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탐이 나는 그 특별함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마저.
짧게 붙고 떨어지려는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서투른 몸짓으로 그의 입술을 머금자마자 마음을 달리 먹었다. 숨을 참는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먼저 키스해 본 건 처음이었나. 사랑, 호의, 친절을 믿지 못하는 그는 이런 키스도 싫어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히아신은 무얼 잘못 먹은 사람인 양 과격해졌다. 대뜸 그녀의 허리를 안아서 제 무릎 위에 데리고 왔다. 환자인 그리사를 두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그녀만이 하고 있었다. 그의 목을 안지 못하고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은 히아신은 콧날로 그녀의 뺨을 쓸고 다녔다.
쪽, 하고 떨어지는 순간 히아신은 신음을 흘리며 더한 것을 바랐다.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취한 그의 눈과 입술은 관능적이었다. 혀가 풀린 목소리로 히아신은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아니, 얼굴을 숨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음, 생각해 봤는데……. 특별한 사람한테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아?”
자기도 확신이 없으면서 그는 바라던 것을 말하고 본다. 높이 던진 공이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시험하기 직전의 얼굴.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을 하고서 도박을 건다. 못나고 불행한 그를 나디사는 조용히 감싸 안았다.
이런 특별함이라면 굳이 바다에 나가 보지 않아도, 멍청한 물고기인 그녀라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그럴걸.”
히아신도 바다에 나가 본 적 없는 어부였다. 그녀는 그에게 따듯하고 다정한 기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는 특별한 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얕은 강에 사는 어부와 물고기는 가 본 적 없는 바다를 꿈꿨다. 태어난 곳도, 자라 온 곳도 다르지만 나디사는 그의 외로움만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허락된 것이 맞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 자신이 대단한 거라도 주는 듯하지만.
“좋아, 나디사. 정말 좋아…….”
그를 비난하고 경멸하는 사람일지라도 지금 그의 표정을 본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줄 터였다. 단 며칠만이라도 이렇게, 나디사는 그를 데리고 딱 한 번만 깊은 바다에 휩쓸려 보기로 했다. 특별한, 단 한 사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