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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16화 (116/210)
  • 116화

    노루가 옆으로 쓰러지자마자 히아신은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노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뜨는데 그냥 가지 않고 나디사의 손목을 잡고서 걸었다. 그는 진흙 웅덩이를 그녀가 밟지 못하게끔 때때로 멈추거나 방향을 바꿨다. 나디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가는 노루와 만날 수 있었다. 까맣고 영롱한 눈은 죽음을 예감한 듯이 빛을 잃어 갔다. 그걸 눈 뜨고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이는데 노루의 어깨에 꽂힌 단검을 히아신이 쑥 뽑아 버렸다. 사냥이 이런 거였구나. 숨이 꺼져 가는 노루를 지켜보는 것도 이리 고통스러운데 사람이 죽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두드렸다. 단순하던 것들이 실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생각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느라 고통스러울 때. 그때 사람이 성장한다고 누군가 그랬지만 이런 식의 성장은 원하지 않았다.

    “자.”

    히아신은 피가 묻은 단검을 그녀에게 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하자 손목을 잡아 와 쥐여 주기까지 했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끝내 승리한 건 히아신이었다.

    “이걸로.”

    히아신은 노루의 목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여기를 찔러.”

    녹색의 눈동자는 마음이 넘어갈 만큼 다정하나 그 목소리와 행동은 더없이 비정했다. 그가 자신을 놀리려 하거나 괴롭히려고 이러는 게 아님은 알고 있었다. 히아신은 그저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사냥을, 무엇을 죽인다는 것을.

    “이럴수록 얘 고통만 심해져.”

    “알겠어.”

    식량은 식량.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서라도 그녀 또한 잔인해져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복수라도 하듯이 노루는 그녀에게 잔인해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상처가 워낙 깊어 단검을 꽂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만 터였다. 노루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사라진 숲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안타깝다. 약한 놈이었나 보네. 다른 애로 해 볼래?”

    “나한테 왜 이런 걸 가르치려고 해?”

    “언젠간 필요한 것들이잖아. 나는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 나디사가 다치게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걱정되잖아.”

    그가 자라난 곳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말 몇 마디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연민도 슬픔도 없는 히아신은 제 할 일 하듯이 어깨에 죽은 노루를 들쳐업었다.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는 그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나가려면 지금이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기 전에 일을 다 해 놓아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히아신은 죽은 노루 두 마리를 챙겨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길을 잃기 딱 좋은 숲이었다. 속마음도 앞으로의 계획도 알 수 없는 남자의 뒤를 따르는 것이 슬슬 불안해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숲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려는 것처럼 히아신이 멈추어 섰다. 그의 앞에는 노루를 짚 더미처럼 쌓아 둔 수레가 있었다. 못해도 일곱 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거기에 지금 들어 매고 온 두 마리가 추가됐다.

    “나디사 몫까지 내가 잡았어. 잘했지?”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왔다. 한 마리씩 업어 나르다 보니 그의 하얀 군복이 노루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나디사는 꿋꿋이 삼켜 낸 뒤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이라도 닦아.”

    “닦아 줘.”

    절대 자기가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듯 그는 뒷짐 져 손을 숨겼다. 뻔뻔스레 허리를 숙이고 제 얼굴을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손수건만 전해 주려던 나디사는 퍽 난감해지고 말았다.

    “네가 할 수 있잖아.”

    “해 줄 때까지 밤새 이러고 있을 거야.”

    그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가 뱉은 말을 지킬 것이었다. 눈을 감고 버티는 히아신의 뺨 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닦아 냈다. 핏물은 쉬이 닦였지만 자국은 남았다. 이건 물로 씻어야 될 듯싶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물병으로 손수건 끝부분을 적셨다. 그것으로 마저 닦아 주려는데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손수건을 든 상태로 멈춘 나디사는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모으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나한테 왜 이렇게 친절해?”

    저가 닦아 달라고 졸라서 그대로 해 준 것밖에 없었는데. 히아신은 자기한테 친절하고 잘해 주려고 할 때마다 며칠 굶은 개처럼 짖어 댔다. 이런 대화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나디사는 친절해지기를 포기했다.

    “너는 내가 친절한 게 싫니?”

    “왜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해?”

    “표정이 굳잖아. 지금처럼.”

    그에 히아신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깊어진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같이 있을 날이 얼마 없으니 그런 것에 집착하는 걸지도 모른다.

    열려고 애쓰면 아예 문을 닫아 두는 히아신의 성격을 안다. 나디사는 방법을 바꿨다.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열게 하면 된다. 노루가 쌓인 수레를 그의 도움 없이 옮기려고 들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히아신이 걸어와 수레를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내가 할게. 아니다. 아예 나디사도 타 볼래?”

    “이 노루들 죽은 위에? 그건 싫어.”

    “치워 버릴까?”

    “농담 말고.”

    수레를 옮기니 마니 하며 아웅다웅할 시간이 없었다. 숲을 나가서 그리사와 합류해야 했다. 수레를 끄는 건 포기하고 히아신의 옆에 서서 같이 걸었다. 어찌저찌 저도 밀어 보려고 하면 히아신이 멈추어 섰기 때문에 걷는 속도나 맞추었다.

    히아신은 힘도 들지 않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수레를 옮겼다. 아까 무겁게 분위기 잡던 남자와 같은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나디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아신.”

    “응?”

    “아까 기분이 왜 안 좋았어.”

    달그락거리던 수레 소리가 멈추어지자 숲은 간사할 만큼 조용해졌다.

    “그게 궁금해?”

    “궁금해.”

    “음…….”

    말끝을 늘이던 히아신은 죽은 노루를 세어 보는 척하며 그녀의 눈을 피했다. 늘 이기적이고 앞뒤 없던 그가 웬일로 조심스럽게 굴고 있었다.

    “누가 나한테 친절하면 그 다음에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 친절한 나디사가 나한테 해로운 짓을 할 것 같아. 웃으면서 다정하게 대해 주고 그 다음엔 더 못된 짓을 하겠지?”

    “……누가 너한테 그랬어?”

    “모두가 그랬어. 대가 없는 친절은 없어. 특히 나디사처럼 나한테 친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은 더 그래.”

    히아신은 그 말을 마치고 그녀의 진심을 떠보듯 쳐다보았다. 친절한 어른들이 없었다는 말.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때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외로울까 싶다. 그런 외로운 삶을 가진 남자가 하필 외지고 어려운 길만 골라 다니는 것 같아 나디사는 웃을 수 없었다.

    “너는 참 바보 같아, 히아신.”

    멈추어 있는 히아신 대신 수레를 끌었다. 갑자기 욕을 얻어먹은 히아신은 멍하니 있다가 저 없이도 잘 굴러가는 수레를 다시 훔쳐 가려 했다.

    “내가 왜 바보야?”

    “나라를 망하게 한다며. 그러니 바보지.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너를 미워하게 만든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나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뭐 그런 거를 신경 써.”

    “신경 안 써?”

    “응.”

    거짓말이었다. 아니,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세상에 미움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날 적부터 감정이 없는 사람뿐이다. 그는 아니었다.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잖아. 잘 지내고 싶고. 결과가 어떨지 알면서도 안 좋은 길로 이끄는 사람들은 너를 다치게 할 거야. 왜 네가 그런 사람들을 택하는 건지 모르겠어.”

    “하하.”

    수레를 끄는 히아신과 눈에 익은 숲길로 들어왔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웃은 히아신은 아까보단 천천히 수레를 끌었다.

    “나한테는 그런 사람밖에 없어. 나를 아프게 하고, 써먹으려 하고. 그런데 나는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않나 싶어. 이제는 배곯지 않고, 아프지 않아.”

    “배곯지 않고, 아프지 않고. 그게 다야?”

    “그게 다야. 너 안 굶어 봤구나, 나디사. 부러워. 너희 집은 매일이 겨울 같은 곳에 있는데도 따듯하고 아늑해 보이던데. 그런 곳으로 구걸을 다닐걸 그랬지 뭐야.”

    건조하게 흘러나온 구걸이라는 단어가 나디사의 발을 묶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어린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풍족하진 않았으나 따듯한 마로닌 부부 밑에서 안 굶고 살았다. 그녀가 바깥세상을 모르고 자라는 동안 그의 삶은 샤포드의 설산보다도 더 추웠을 것이다.

    그런 추운 나날들이 모이고 뭉쳐져 히아신은 그보다 더 외롭고 차가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추위를 모르는 그녀가 말해 봤자 그의 마음은 녹지 않을 것이다.

    “동정하지 마, 나디사. 나는 나름 잘 살아. 이건 너한테만 알려 주는 건데, 파르난에서는 나를 왕자라고 부른다? 좋겠지.”

    걱정보다는 존경, 연민보다는 사랑을 받고 싶은 그였다. 그의 이런 허세를 중간에 막을 수 없었다.

    “왜 왕자인데?”

    “그게 말이야. 아버지가 만든 지위인데…….”

    제가 아는 좋은 것을 과시하듯 얘기하는 그의 마음에 한 조각의 따듯함을 심어 두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가 진실로 해맑고 따듯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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