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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15화 (115/210)

115화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의심 때문에 미련을 떠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 사람이라서 기억이 명확해지는 건지. 아니라고 단정 짓기엔 책 속에 쓰인 환영쟁이의 인성이나 분위기가 그 남자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주의 부름에 맞추어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오로지 히아신 아스 생각뿐이었다. 신전에서 하던 습관이 남아 있어 늦잠을 잤다. 그는 공주 측으로 가든 왕자 측으로 가든 큰 불만이 없었다. 아버지인 록이 공주에게로 가려 하기에 그도 이쪽을 택했을 뿐이었다.

“어서요.”

“알았으니까 귀찮게 일일이 간섭하지 마.”

그러니 그를 수발드는 신관의 재촉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공주와의 면담 시간에 늦겠다고 머리를 빗기고 삶아 둔 옷을 다려 입히고, 생각해 보면 처소 크기만 달라졌지 이곳에서의 삶도 따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 비가 와서…….”

“비가 내려?”

“네. 잠시 머무는 가랑비 같지만요.”

“이래서 여름이 싫어, 나는.”

“우산을 준비하라고 일렀어요.”

그 남자 말이다. 정말 파르난의 사람이라면 지금쯤 맥도 못 추고 있을 텐데. 그걸 확인할 아침 시간을 놓치고 만 게 못내 아쉬웠다.

“란 님, 머리가…….”

“얼른 가.”

그보다 빠르게 움직인 신관은 준비해 둔 우산을 폈다. 사람 몸보다도 큰 우산 하나를 삐쩍 마른 신관 둘이 들었다. 상황이 이럴 줄 모르고 지난 가을걷이에 비축해 둔 곡식이 없어, 가져온 식량으론 이번 겨울을 못 버틴다고 들었다. 이런 형편에 눈치 없이 호화 생활을 하는 저를 보면서 참도 좋은 소리가 나오겠다.

“치워.”

“그래도 란 님.”

“아버지는.”

“이미 공주님과 만나고 계시죠.”

“그래?”

모르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신관의 정신을 다른 데로 빼돌리려고 했을 뿐. 란은 말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이 가득 찬 길로 들어섰다. 말과 수레와 사람이 빈틈없이 뒤엉켜 한 길을 걸었다. 우산이 무거워 기우뚱하는 신관들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란 님! 천천히…….”

이게 뭐람. 비가 온다더니 기분 나쁘게 얼굴만 적시고 있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람들 틈에 끼었다. 휩쓸려 떠다니다 보니 신관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거리까지 왔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란은 어저께 봐둔 천막으로 가뿐히 걸음했다.

“오, 란 님.”

“아.”

그를 알아보는 이들의 인사를 받아 주면서 눈은 딴 곳을 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런지 평상시보다 인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업무다 싶은 마음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던 란은 때마침 천막에서 나오는 이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처럼 매사 운이 좋았다. 나디사 마로닌과 그녀의 동료들이었다. 당연한 말이다만 히아신 아스도 같이 있었다. 규정보다 느슨하게 군복을 입은 그가 뒷짐 지고 서서 무어라 속닥거리니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있었다. 나디사만 따로 놓고 보자면 서먹한 상황이었지만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사이좋은 연인 같았다.

“란 님?”

“조용히 좀 해 봐요.”

“네?”

황당해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려 줄 정신은 없었다. 란의 집중력은 위기 상황일수록 예리해졌다. 전에는 몰랐는데 저 남자가 나디사 마로닌을 짝사랑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나무 밑동처럼 딱딱한 여자가 뭐가 좋냐 싶지만. 이번에 대화를 나누어 보니 기억에 오래 남는 여자이긴 했다.

그러니까 나디사 마로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러 올 정도로 정도 깊은 거군. 모든 정황은 저 뺀질거리는 놈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의 목은 깨끗했다. 기대하던 병색도 없고 말이다.

찬찬히 뜯어 보던 란은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찔했다. 그날 느낀 그 사특한 기운이 근처에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굴리는데 우연의 일치처럼 히아신과 눈이 마주쳤다.

안 본 새에 의도적으로 나디사를 가리고 선 그는 인사하듯 고개를 까닥였다. 지금까지 그가 받아 왔던 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건방지고 짧은 인사였다.

“란 님!”

“진짜 늦으셨어요!”

찰거머리들이 오기 전에 묻고 보아야 할 게 많았는데. 란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 버린 자신의 무지함을 탓하며 혀를 쯧 찼다.

“비도 다 맞으시고!”

저 무거운 우산을 버리지 않고 온 이들의 집념도 인정해 주어야 했다.

“가자.”

파르난의 마혼과 수비교의 신은 상극이라고 배웠다. 란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저린 손을 주물렀다. 그를 시험하고자 몰래 신력을 불어넣었을 때부터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지만 불에 덴 양 욱신욱신 쑤셔 왔다.

란은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나디사와의 대화의 집중하고 있는 히아신은 나무랄 데 없는 라드군처럼 보였다.

아니라면 그것참 미안하다만. 맞다면 그 가면을 아주 잘 골라 써야 할 것이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개망신당하기는 싫을 테니. 떠나는 란은 통증이 심해지는 손을 소매 속에 숨겼다. 이것도 다 한때의 고통일 것이었다.

* * *

라드군은 모자란 식량을 채우기 위해 근방의 숲으로 가 사냥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공주의 땅에 있는 숲은 워낙 넓은지라 셋이서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정해진 시간에 모이기로 했다만 나디사는 혼자 있는 게 싫었다.

‘그리사. 잠은 어디서 잤어.’

‘빈 천막이 있었어요.’

정오에 만난 그리사는 잠을 설친 얼굴로 서 있었다. 히아신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으나 티 나도록 차갑게 대하진 않았다. 그리사는 잘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마음은 간혹가다가 비명을 질렀다.

‘히아신. 너 땀이 나.’

‘날이 더워 그런가 보다.’

회복이 더딘 히아신은 남들 앞에선 멀쩡한 척 있었다. 그의 손이 떨린다는 건 나디사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잘 연기하다가도 골이 아픈지 어금니를 꽉 물곤 했다. 나라를 망하게 한다던 사람이 이리 허약해도 되는 걸까. 생각해 보니 쥐가 저게 고양이라는 걸 잊고 걱정을 다한다 싶다.

‘라드군이십니까?’

천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심부름꾼의 전언이 있었다. 보급 담당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와서 신상을 물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으로 알아낸 정보를 작은 양피지에 적어뒀다.

‘라드군은 몇 명이 있는지 물어도 됩니까? 아직 저희가 파악이 덜 돼서요.’

그게 뭐라고 긴장이 됐다. 보병이나 왕실군 같은 이들은 꽤 봤어도 라드군으로 보이는 이는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날카로운 그리사의 질문에 난감한 기색을 표하던 보급 담당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며칠 더 기한을 두겠지만 아직까지는 열셋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에 저도 놀랐는데 어린 그리사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었다. 분위기상 일이 결딴나기 전까진 저쪽으로 건너갈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또 간다고 받아 줄지도 미지수였고.

나디사는 히아신이 떠나는 날까지 웬만하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데 열셋이라니. 여기에 있는 세 명을 빼면 열 명 정도라는 소리였다. 합동 훈련이 주를 이루는 라드군 특성상 머릿수 많은 왕자 측이 유리할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 숲이었다. 검, 활, 창 등 여러 무기가 있었지만 무기를 처음 골라 본 나디사는 긴 끈을 택했다.

이걸로 어떻게 사냥하는지 몰라 두 시간째 숲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노루 한 마리를 숲에서 보긴 했어도 너무 빨라서 근처도 못 가봤다.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네.”

사방으로 쏘다니는 것도 지겨워질 즈음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뺨을 맞았다. 어깨는 축축해졌지만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걷는 건 그만두었다. 나뭇잎이 가리지 않는 자리에 서서 정신없이 비를 맞고 있던 찰나였다.

“한 마리도 못 잡았네?”

저를 생각하는 걸 어찌 알았는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가 나타났다. 뒤를 밟아 쫓아온 사람처럼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한 마리 잡았네.”

나디사는 그의 어깨에 걸친 노루 한 마리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하다.”

“이거 나디사 줄게.”

저리 말하니 먹잇감을 구해 오는 늑대 같았다. 칭찬에 신이 난 히아신은 엎어 매고 있던 노루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푹 젖은 남자가 내려놓은 노루의 목에는 단검 두 자루가 꽂혀 있었다. 일말의 주저함 없이 그는 노루의 몸통을 발로 밟고서 그 단검을 홱 뽑았다.

상처 난 자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비릿한 냄새가 속을 뒤집어놓았다. 흙으로 스며드는 붉은 피를 보며 나디사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회담이 잘 마무리되면 좋겠다.”

어떤 회담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히아신은 칼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재잘재잘 잘 대답하던 히아신이 그녀의 눈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럴 거라고 말도 안 해 주는구나.”

새삼 그가 반대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모호한 시선을 보내던 히아신은 제 푸른 망토로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칼이 무디지만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 뭐가 돼?”

“이렇게 쥐어 봐.”

어미 곰이 죽기 전에 새끼 곰에게 생선 잡는 기술을 가르치듯. 갑자기 진지해진 히아신이 그녀의 뒤로 왔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정말로 그녀의 손에 단검을 쥐게 했다.

“어깨가 좀 삐뚤어졌어, 나디사.”

그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건너편에 가만히 풀을 뜯고 있는 작은 노루 하나가 보였다. 히아신은 단검을 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위로 들었다.

“카드 던져 본 적 있어?”

“없어.”

“그럼 뭐를 던져 본 적 있어?”

“…… 뭐를 던지고 살았어야 돼?”

엉뚱한 그녀의 대답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때가 아니라는 듯이 손에 든 단검을 가져갔다.

“네가 막을 수 있는 걸 걱정해, 나디사. 막을 수 없는 것 말고.”

시범을 보여 주듯 그는 조용하고 날렵하게 단검을 날렸다. 화살처럼 날아간 단검은 정확히 노루의 어깨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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