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불편한 어조, 그보다 더 불편한 공기. 나디사는 약을 받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천막을 잡은 그리사가 문제였다. 낮게 고개를 기울인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병명이 뭡니까.”
“…….”
“뭐냐고요.”
공동묘지처럼 조용한 천막들을 배경으로 선 그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약병을 쥔 그의 손이 잔잔하게 떨렸다.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설령 동료라고 하더라도 저를 배신한 사람은 냉정하게 버릴 거였다. 히아신의 몸을 안 봤을지도 모른단 희망은 부질없었다. 그리사는 그저 기다렸을 뿐이었다. 동료가 진실을 이야기할 때까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될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지만 냉철한 보라색의 눈과 마주하자마자 무력해졌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처럼 높은 벽 앞에서 말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땀이 눈으로 들어가 눈물로 나왔다.
“어떡하지, 그리사.”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눈물을 보고 흔들린 그리사는 급하게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누구에도 말하지 못하고 숨겨 두었던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늘 그랬다. 히아신 아스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작은 샤포드가 전부였던 그녀가 풀기엔 너무도 거대한 문제였다. 자신보다 어리고 현명한 그리사에게 기대서라도 그 문제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만한 나이였고, 현명하다고는 하나 그의 세상은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넓지 않았다.
그리사는 천막을 걷던 손으로 나디사의 어깨를 쥐었다. 바쁘게 눈을 굴린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히아신의 몸에서 이상한 문양을 봤어요. 그게 내가 아는 그런 거라면…….”
“일주일 뒤에 떠나기로 했어.”
일주일이었나. 이제 여섯 밤이 남은 건가. 날은 중요하지 않았다. 히아신은 반드시 떠날 것이므로. 약속은 없었지만 협박은 있었다. 하물며 그리사까지 알게 된 눈치였다. 히아신이 서 있을 곳은 배신과 적군이 도사리는 사막이었다. 그리사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다가 제 입을 막았다.
“약부터 줘.”
“지금 약이…….”
긴 말 할 것 없이 나디사는 그의 손에 있는 약병을 휙 뺏어갔다. 그리사의 떨리는 시선이 그녀에게로 왔다.
“히아신이 떠난다는 건. 여기 있으면 좋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거겠죠.”
“……그래서.”
“나디사…….”
이건 아주 큰 문제예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그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다. 당연하게도 이건 큰 문제였고 재앙이었다. 여기에 히아신이 품은 마음까지 말한다면 그리사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거였다.
“그 일주일은…….”
그 일주일 중 삼 일은 그를 잊는 데에 필요한 것이고 나머지 삼 일은 그를 미워하는 데에. 마지막 하루는 그를 남자로, 동료로, 지금껏 알고 있었던 히아신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는 그와 철저한 남이 되고 싶었다.
잊어야 하는 날 그는 잔꾀를 부리는 것처럼 아팠다. 나디사는 깨질까 무서운 사람처럼 약병을 조심스레 쥐었다.
“내가 약속한 거야. 나를 비난하고 싶어?”
저런 걸 숨겨 주었다는 비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비난. 어떤 것도 감수할 생각이었으나 그리사는 그런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당신을 비난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건 나를 비난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리사는 눈을 내리떠 그녀가 소중하게 쥐고 있는 약병을 바라봤다.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에 쥐여 출렁이고 있는 녹색의 물병이 히아신의 눈과도 같았다. 그를 좋아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지만, 그리사는 배신을 목격하기 전까지 그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겨울, 봄, 여름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나는 못 본 걸로 하죠. 지금도 일주일 뒤에도.”
겨울의 히아신은 무례했고 봄의 히아신은 개구졌으며 여름의 히아신은 동료라고 믿고픈 남자가 됐다. 나디사가 하는 고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사는 잡고 있던 천막을 놓았다. 나디사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강한 그녀는 아마 잘 이겨 낼 것이었다.
“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그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났다.
“그래.”
대답 없이 사라지는 그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음의 짐을 나누면 가벼워진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보다. 그녀는 혼자서 짐을 끌어안고 있던 그 시간이 그리워졌다.
* * *
무섭게 끓던 열은 새벽이 오자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새겨진 글들도 날뛰지 않고 잠잠하여 다행이다 싶지만. 전처럼 사라지지 않는 게 영 불안했다.
그리사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보기보다 마음씨 착한 그는 아마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터였다. 제 억지를 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에게는 미안할 뿐이었다.
물수건을 짜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나디사는 추를 단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천막은 바람이 불 때마다 끝이 뒤집어질 듯 들렸다. 덕분에 하늘이 보여 몇 시쯤인지 대략 짐작이 가능했다. 오늘의 새벽하늘은 맑고 청초했다. 이러다가 깨지 못하고 아침이 오면 어떡하지 싶다.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 오늘부터는 라드군인 그들도 짐을 나르고 힘을 써야 한다고 들었다. 이곳에 라드군이 얼마나 왔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말이다. 할 일이 산더미라 이렇게 누워 있는 그를 돌볼 시간도 없을 터였다.
그의 목까지 올라온 검은 문자들은 나 잡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도 뒤도 막힌 물길에서 살아 보겠다고 물장구치는 기분이었다. 물수건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나디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디사?”
어렵게 그의 입에 흘려 넣은 약이 도움이 됐나 보다. 나디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누워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눈은 비록 혼탁하지만 정신이 들어 있는 눈이었다. 나디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이마부터 짚었다. 열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목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수건을 그릇에 놓아둔 나디사는 먹이다 만 약을 다시 가져왔다.
“이거 더 먹어.”
열이 다 낫지 않은 것인지 뭔지. 히아신은 사람 간 떨어지게 씩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걱정이 들었다. 샤포드에서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바보가 된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한 죄로 부모가 죽을 때까지 끼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비웃듯 히아신은 점점 아는 얼굴로 돌아왔다. 장난기 많고, 어떤 비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나디사가 나를 돌봐 준 거야? 영광이야…….”
“장난칠 때가 아니야. 너 몸 봐 봐.”
히아신은 제 상태가 어떤지 훤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은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게 들키면 나디사는 더 좋잖아. 나를 더 빨리 내쫓을 수 있는데?”
“……너를 감추고 있는 게 나라는 걸 잊은 거야? 들키면 나도 위험해.”
“정말 그 이유가 다야?”
열기가 남은 히아신의 뜨거운 손이 손목을 감아 왔다. 별것 아닌 온기에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프고 나니 어딘가 안쓰러웠다. 이렇게 나아서 수작 거는 것만 해도 고맙게 느껴졌다. 나디사의 입술에 조금 떫은 미소가 걸렸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곤 하는 이들이 이해가 안 갔던 시절이 있긴 했던가. 그들처럼 나라를 팔아먹지는 않아도 그 비슷한 무언가는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나디사는 끓는 속과 달리 냉정하게 약병을 내밀었다.
“먹어. 먹어야 나아.”
“먹여 줘.”
“얼른 먹어. 그 문장들도 어떻게 하고.”
옷을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히아신은 게으름 피우듯이 천천히 그녀가 내민 약병을 받았다. 단숨에 쭉 입으로 약을 넘긴 그가 엄살 피우듯 혀를 굴렸다.
“우아, 진짜 맛없어. 혀 잘라 내고 싶어.”
저런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살아나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늘어날수록 나디사의 미소도 늘어났다. 그가 이름 모를 타지에서 죽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어제저녁에 뭘 먹어서 탈이 난 거야?”
“먹어서 탈이 난 게 아니야.”
히아신은 뻗친 회색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말하는 중에도 눈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면 다 나은 것은 아닌 듯했다. 그의 병명을 알고 싶었다.
별안간 히아신은 손바닥을 펴서 그녀에게 내보였다. 그의 손에 새까맣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옆에서 내내 간호하고 있던 그녀도 모르고 있던 자국이었다. 나디사는 놀라서 그의 손바닥을 잡아 올렸다.
“왜 탄 자국이 있어.”
“그 신관.”
신관이라고 하자마자 감이 왔다. 란이 그와 악수를 나눴었다.
“나를 시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