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어수선하던 바깥도 달이 차오르는 밤이 되자 안정을 찾아갔다. 성난 기세로 천막을 치던 이들 덕분인지 그 넓던 성의 공터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혹시 몰라 이쪽으로 넘어온 인원수보다 더 많이 세웠다고 들었다.
나디사는 배정받은 천막 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침묵이 되려 독이었다. 머릿속은 이때다 싶은지 보고 들은 것을 쉼 없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리사는 아트리스가 신전의 끄나풀이 아니냐며 의심했었다. 왕자를 고집하는 아트리스가 평소와 달라 보였지만 그렇게까지 동료를 매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 또 란에게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침상에 누운 나디사는 잠도 자지 않고 멍하니 붉은 천막만 바라보았다. 시끄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운 밤이었다.
“저기.”
“아, 네.”
“불을 좀 꺼도 될까요?”
“네.”
같은 막을 쓰게 된 여인은 미안하다며 등불을 껐다. 그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챙겨 온 도구들로 미루어 봤을 때 약사나 그 비슷한 것일 거다. 천막 안에 은은히 진동하는 약초의 냄새가 심신을 편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수더분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인 듯 동작이 매우 느리고 조용했다. 좁은 천막을 나누어 쓰는 일이니 이만한 파트너가 걸린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나디사는 불이 꺼지고 찾아온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왕자 측으로 건너간 동료들과 만나는 건 요원한 일이겠다. 아트리스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 어떠한 의심도 하지 말 것. 그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의리였다.
‘나디사.’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옆자리 여인 또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고 바깥을 살폈다. 천막 바깥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한 나디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요?’
다름 아닌 그리사의 목소리였다. 그는 히아신과 한 천막을 쓰도록 록이 배려를 해 주었다. 그리사는 그건 배려가 아니라고 성질을 부렸지만. 그리사와는 잠시 만나 인사를 한 뒤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었다. 이렇게 밤늦게 찾아온 것을 보니 그리사의 성격상 중요한 할 말이 있을 거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잠에 들 준비를 하던 여인은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나디사는 허둥지둥 일어나 겉옷 하나만을 챙겨 들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등불 하나 없이 이곳까지 온 그리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싱그러운 땀 냄새가 공기 중에 흐르듯이 떠다녔다.
겉옷을 입으며 나디사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야.”
“히아신이 이상해서요.”
주위를 둘러본 그리사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의사를 부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그리사의 말이 길어질수록 나디사는 깊고 긴 수렁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바닥 모를 구덩이에 들어와 앉은 그녀는 말소리와 멀어져 갔다. 움직이고 있는 그리사의 입술 모양은 잘 보이지만 그 말의 소리는 머리 위로 지나갔다.
“나디사.”
“응?”
“어떡하냐고요. 당신은 히아신하고 친하잖아요.”
용케 마지막 말은 알아들었다. 나디사는 속이 말이 아님에도 제정신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사는 현명했다. 그래도 동료라고, 보통 일이 아닌 듯싶자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를 먼저 찾아온 걸 보면.
“일단 가 보자.”
“……네.”
그리사는 어딘가 미심쩍은 듯이 대답이 느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복잡한 천막 사이를 지나는 그리사의 뒤를 놓칠까 싶어 악착같이 쫓아갔다. 두 천막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달빛에 의지하여 나아가고 있던 나디사는 집중하느라 부릅뜬 눈을 비볐다.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천막 하나를 발견한 순간에는 무더운 날임에도 오한이 들었다.
불길한 느낌을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나디사는 다급히 천막으로 들어가려는 그리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요.”
“잠시만. 나 먼저 들어가도 될까?”
“……나디사는 뭔가 알고 있죠?”
“그런 것 같아.”
떨리는 입술과 자신 없는 눈빛. 보나 마나 거짓말이라는 걸 들켰을 터였다. 달빛이 밝혀 준 그리사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사는 의문이 분명한 표정을 짓고서 한발 물러나 주었다. 그 한발은 동료를 위한 마지막 믿음이자 배려일 것이다.
“고마워.”
천막 안은 여름밤보다 더한 무더움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원인은 침상에 누워 있는 저 남자였다. 멀리서 보아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히아신은 뺨과 이마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뜨끈한 숨이 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탓에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모양이었다.
달려가 그의 이마에 손부터 얹었다. 차가운 손이 닿자 히아신이 살짝 눈을 떠 보았지만 오래 뜨진 못했다. 어렵사리 그녀인 것만 알아본 눈이었다. 색이 죽은 연녹색 눈이 그녀를 보고서 껌뻑껌뻑 감겼다 뜨였다.
몸이 불덩이 같아 나디사는 그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치웠다. 돌도 씹어 먹을 듯이 건장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였다. 뱀에라도 물렸다든가. 저녁에 무얼 잘못 먹었다든가.
“……미치겠네.”
그리고 나디사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히아신의 젖을 대로 젖어 투명하게 보이는 셔츠 뒤로 새까만 문양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의식 잃은 히아신의 배와 가슴 위에서 날뛰고 있었다. 목까지 덮었다가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내려가고.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했으나 이걸 어떻게 돌봐야 할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아는 게 많은 그리사라면 이걸 보고 히아신의 정체를 눈치챘겠다.
‘나디사.’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가 떨렸다. 나디사는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리사. 혹시……. 히아신의 몸을 봤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천막 밖에 있는 그림자는 천년 묵은 나무처럼 꼿꼿했다. 이윽고 침묵을 끝낸 그리사의 그림자가 뒤로 빠졌다.
‘못 봤어요. 상태가 심각해요?’
나쁜 사람을 숨겨 주다가 저도 나빠졌나 보다. 그리사가 보지 못했다고 하자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뚫리는 듯했다. 침상에 털썩 주저앉은 나디사는 주르륵 흐른 식은땀을 닦아 냈다.
“아는 병이야. 그런데 너는 옮을 수 있으니까 들어오면 안 돼, 그리사.”
전염되는 것치고 본인은 당당히 들어와 있다만. 그리사는 많은 것을 묻지 않고 한 걸음 더 천막에서 떨어져 섰다.
‘그럼 저는 열을 내리는 약을 좀 얻어 올게요.’
약초 냄새가 나는 그녀의 천막이 기억 속에서 퍼뜩 떠올랐다.
“내 천막을 같이 쓰는 분이 약사인 듯해. 정 돌아다니다가 못 찾으면 죄송하지만 부탁해 봐.”
끄덕거리는 그리사의 그림자는 시간이 촉박한 양 걸음을 서둘렀다. 내내 불편하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디사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히아신의 셔츠는 전부 벗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찬 물로 몸을 닦아서 열을 내려 주어야 한다. 셔츠 단추를 푸는 동안 히아신이 정신 차릴 수 있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유도 본인 말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히아신.”
“…….”
“히아신. 정신 차려.”
그가 파르난의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안 좋은 의도로 여기에 숨어 있다면, 여기는 그의 적진 한가운데였다. 어리석은 그녀만이 그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하더라도 살아서 나갈 가망 같은 건 없다고 봐야 한다. 나디사는 그가 무엇이든 간에 그저 살았으면 했다. 나쁘고, 죽일 놈인 것은 아는데도 그렇다. 차라리 그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그녀의 눈앞에서 멀리멀리 도망쳐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안타까운 몰골로 쓰러져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디사는 그리사가 두고 간 물수건을 들었다. 그를 괴롭히는 듯한 까만 글자들을 그 수건으로 최대한 가렸다. 추측에 불과하다만 이 요란한 글자를 멎게 한다면 히아신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물수건이 금세 뜨끈해졌다. 얼른 찬물에 수건을 담그고 그의 가슴 언저리를 정성스레 닦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의해서 반라가 되었으나 큰 차도는 없었다. 몇 분째 찡그린 채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천막 앞에 발소리가 지나다닐 때마다 나디사의 가슴은 땅과 같이 밟히고 있었다. 히아신이 만들어 내는 열기에 졌는지 그녀 또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몇십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새 물을 따른 때에 마침 그리사의 발소리가 도착했다.
‘나디사. 약 구해 왔어요.’
약이라는 소리에 나디사는 하던 것도 제쳐 두고 천막 앞으로 달려갔다. 천막을 거두기 직전 본인이 한 말이 생각나 손목으로 입을 꾹 막았다. 전염병이라고 했으니 이 정도는 해야 될 듯싶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천막을 나서자 아까보다 해쓱해진 그리사가 있었다. 이 시간에 약을 구해 오느라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터였다. 나디사는 그의 손에 들린 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어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던 그리사의 눈빛이 차가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나디사. 궁금한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