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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7화 (97/210)

97화

사랑. 그것은 히아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감정은 그에게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든, 증오하든, 경멸하든 그의 길은 하나로 정해진 셈이니 말이다.

쌍방이 아니라 일방. 그것이 그의 운명이자 정답인 길이었다. 하여 앞으로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줄 세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숨어서 일을 처리할 때부터 무언가 달라져 갔지만.

그랬다. 원하는 건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나디사 마로닌의 따스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원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니 그건 사랑이었다.

쪽, 쪽, 그는 자신을 할퀴려 드는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노려보는 그녀의 눈동자 근처에도 입맞춤을. 그 모든 동작 중에 사랑이 아닌 게 없었다.

그는 수많은 입맞춤을 내리며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그녀와 꿈꾸고 있는 모든 건 사랑을 기반으로 했다. 그가 갖고 싶은 결말 중 어디에도 서로를 증오하거나 죽이고 싶어 하는 끝은 없었다.

그를 개자식 중의 개자식으로 보고 있는 그녀가 듣는다면 코웃음 칠 말이겠다만. 그는 역대 해벗 종족 중 누구보다 신을 존중하고 사랑했다. 나디사 마로닌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좋았다.

“너를 사랑하냐고?”

이런 대답을 들으면 과연 존중과 사랑이 답이냐는 생각이 잠시 들긴 하지만.

“아닐 거야.”

그러나 히아신은 성난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댔다. 이건 그녀가 저를 사랑해서 저지른 심술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요하거나 흥분하여 일을 망쳐선 안 된다.

“심술쟁이.”

그사이 그의 완벽한 나디사는 감정 정리를 끝낸 것처럼 고요해졌다. 아마 그와 헤어져도 그녀는 이전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이 그런 그녀를 보며 흉측한 계획을 세우고 있겠지. 그럴수록 행복한 결말은 꿈도 못 꾸겠지만, 어차피 마지막 순간엔 그녀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다. 착한 공주님은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저질이 될 테니까.

“히아신.”

그런데 그렇게 참고 말 줄 알았던 그녀가 물어 왔다. 기대조차 않던 대화의 기회가 찾아와 히아신은 눈을 빛냈다.

“응, 왜.”

“너야말로……. 나한테 가진 감정이 뭐야.”

곧이곧대로 말해 주었다간 멀리멀리 도망칠지도 모르는데. 히아신은 그녀의 애타 하는 입술을 손끝으로 눌렀다.

“아마도 사랑?”

“아마도.”

나디사의 눈에 있던 희망의 불씨가 꺼져 갔다. 아마도라는 말은 실수였다. 이렇게 꺼진 눈빛을 바라진 않았다. 그녀가 애타게 사랑을 갈구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아예 미쳐 버리면 더 좋고.

히아신은 그녀의 관심을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길게 핥았다. 제 아래에 부풀고 있는 삿된 욕망을 그녀의 허벅지에 슬몃슬몃 문질렀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눈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분노의 불씨였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꺼지지만 않으면, 저 불씨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개자식이 될 수도 있었다.

“네가 바라는 건 내 몸뿐이구나.”

이런 오해를 사는 것도 감수해야 할 일이고 말이다.

“흐, 나디사, 하아, 사랑해.”

사랑의 증거로 이만한 것도 없다. 몸만을 바라냐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이러다가 사랑을 안겨 주면 환하고 맑게 웃어 주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기쁜 나머지 히아신의 뇌는 둔해지고 말았다. 거지 같은 운명을 이겨 낼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그가 보태지 않아도 무너져 가고 있던 마음이었다. 나디사의 마음 벽 틈새로 신뢰가 흘러나왔다. 그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내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달콤한 둘만의 앞날을 그리느라 바쁜 몸이었다. 히아신은 그녀의 귓가에 감추고 있던 진실을 고백했다.

“그 여자는, 나디사.”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이 말을 고백할 때쯤 저나 그녀나 제정신이 아닐 줄 알았다. 그런데 사지가 멀쩡할뿐더러 자신을 사랑하기까지 한다니.

두 사람을 위한 마지막 차례가 남았다. 질투인 걸 알고 나서 흥분이 과하긴 했다. 아직 정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그 단계를 손에 넣었다고 봐도 충분할 듯싶었다. 히아신은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바로 너야. 나의 공주님.”

어떤 반응이 올까. 울까. 아니면 웃을까. 그럴 줄 알았다며 그의 목을 끌어안을까. 그러게 왜 애를 태우냐며 화를 낼까.

꿈으로 부풀어 있던 그의 기대는 얼마 안 가 헛짓거리로 판명 났다. 진실을 밝혔음에도 나디사는 기뻐하거나 감격하기는커녕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었다. 양심 없이 진한 포옹을 기대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없던 인내심이 녹아 갔다.

“왜? 너무 기뻐? 나는 이제 죽는 날까지 너뿐이야.”

“…….”

“나디사? 싫어서 그래? 아니면, 기뻐서? 나는 너무 좋은데.”

“정말이야?”

그 조그마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믿겠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속에서 무언가 우득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왜 내가 준비한 걸 망쳐 버렸어. 너를 갖는 그날 모든 걸 아름답게 밝히려고 했는데. 내가 만들어 준 아침도 거부해서 이 사단을 만든 건 너잖아. 네 사랑을 못 믿긴 나도 매한가지야. 그러나 히아신은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내가 그걸 거짓말로 할 만한 사람으로 보였어? 나한테 지금껏 여자가 너밖에 더 있겠어, 나디사. 내가 너한테 치대는 이유, 너한테만 더 미친놈처럼 구는 이유.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인정하기 싫어서?”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나디사의 눈에 내린 의심이 걷혔다. 죽일 듯 노려보던 눈빛은 엊그제 그랬던 것처럼 덤덤해지고 있었다.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 그녀가 히아신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수위까지는 도달하려면 멀고 멀었다. 히아신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허벅다리를 쓸어 만지며 야무지게 묶은 속옷 끈까지 올라갔다. 흠칫한 나디사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방금의 그 싸늘함은 많이 가신 손길이었다. 히아신은 제대로 올라타면서 그녀를 제 그림자 안에 가뒀다.

까만 그늘에 덮인 나디사는 잡히지 않은 한 손을 들었다. 뺨이라도 때리려나 싶었다. 히아신은 기꺼이 맞아 줄 마음으로 뺨을 내었다. 그러나 착하디착한 나디사는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만졌다. 엄지로, 손바닥으로.

나를 가지고 논 거냐면서 때려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이런 다정함은 그를 세상에 둘도 없는 불한당으로 만들었다. 이럴수록 욕심쟁이의 마음 주머니는 끝을 모르고 늘어 갔다.

“그러면. 나를 죽이고 싶어?”

다정한 손길과 그렇지 못한 말들. 그를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신이 될 줄 알았다면 그따위 말들은 떠벌리는 게 아니었다. 나디사의 눈에 낀 두려움과 원망은 가지지 않아도 됐던 것들인데. 히아신은 제 뺨을 쓰다듬고 있는 손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그 손은 망설이다가 그를 떠났다.

“그랬다면 스튜에 독을 넣었겠지? 이 빵에도, 내 입술에도. 그런데 너를 어떻게 죽여.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될 거고, 너는 나의 길의 끝에 서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응, 그런데?”

“안 믿겨.”

“믿어지게 할게.”

히아신은 믿기지 않는다는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하다못해 입꼬리까지도. 평온하다고 믿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떠는 건 그녀였어야 했다. 나디사에게만은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디사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줄 테지만 그거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쉽거나 약하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됐다. 그걸 구실로 자신을 버릴지 알게 무언가.

턱에 힘을 주고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히아신은 해맑은 소년처럼 웃었다. 본인이 제일 잘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해 주면, 나디사. 내일 아침이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야. 장담해.”

우리의 밝은 사랑, 밝은 앞날. 그 어떤 고난과 위험이 닥쳐도 히아신은 그날을 위해서 달릴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올라탄 부드러운 손이 입술을 건드렸다. 그녀의 눈에 특별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히아신은 더 이상 떨지 않을 수 있었다.

최후의 해벗 종족. 그의 행복이 시작될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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