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예정보다 늦된, 단순한 저녁 자리였다. 그저 이 여자와 함께 있어서 단순히 행복하고 단순히 설렌 저녁 식사 말이다. 그런데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 말이.
“죽여 달라는 여자. 누구인데.”
도통 그가 해 준 것은 먹지를 않아 기분이 상해 있던 차였다. 깜찍하게도 전의를 불태우는 그녀에게 오늘이야말로 그의 절절한 이 마음을 고백할 참이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깔아 둔 배경도 있었고. 어쩌면 마음씨 좋은 그녀라면 그를 버리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을까.
어쩌면 납치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있어 주지 않을까. 그녀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를 이야기였으나 그는 서로의 해피 엔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안 하는 짓도 하고, 안 하던 말도 하면서.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 보면 놀라서 기절할 만큼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기대도 못 한 수확이었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선홍빛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무딘 칼보다 더 무뎠던 여자가. 히아신은 한순간 충만해지는 감정을 느끼며 몸을 느슨히 풀었다.
전신에 열상을 입는 것처럼 감정이 그를 태웠다. 과연 살갗을 벗기는 듯한 마음의 화상은 그녀밖에 줄 수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이건 질투였다.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는 저 얼굴 아래에 물결치는 감정은 필시 질투였다. 몹시 억제된 질투였으나 히아신의 눈에는 기대치 않았던 그녀의 보답이었다. 그 감격이 워낙 대단하여 그의 입술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질투 하나에 경망 떨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 하지만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이 일을 망치려 들었다. 히아신은 손으로 다급하게 제 입술을 가렸다.
“난, 흐, 네가, 왜 그 여자를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왜 그 여자를 궁금해하면 안 되는데?”
아, 참기 힘들었다. 찡그리는 그녀의 얼굴은 이 지긋한 갈망을 어느 정도 잦아들게 했다. 히아신은 싫어하는 것을 머릿속에 나열하며 차분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표정이 그녀에게는 다르게 읽힌 모양이었다.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이윽고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표정이 차가워진 나디사는 먹던 빵까지 내려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굶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히아신은 진심으로 웃음을 거둘 수 있었다.
“먹던 건 마저 먹어야 얘기를 해 줄 수 있는데?”
“먹기 싫어.”
“먹여 줄게.”
“장난하지 마.”
일부러 돈을 들여 마련한 이 식사가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는 며칠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벌써 뺨이 조금 파인 것처럼 보여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더 살이 빠진다면 아마 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히아신은 버려진 빵을 그녀의 입가 근처로 가져갔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였으나 이 또한 무의미한 힘겨루기였다. 그는 빵을 으스러트리지 않기 위해 손의 힘을 덜었다. 나디사는 제 입술에 눌린 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팽 고개를 돌렸다.
“먹고 싶지 않아. 내려놔.”
“한 입만 하자.”
“싫어.”
“나디사. 공주님…….”
“그렇게 부르지 마.”
탁, 그가 손에 든 빵을 매섭게 쳐 냈다. 그 덕분에 손이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진 히아신은 그녀의 더없이 또렷한 분노를 시선으로 핥았다. 왜 그녀가 오두막에서 도망을 치며 쌀쌀맞게 대했는지 완전히 이해해 버렸다.
아, 이럴 수가. 남자라는 생물에 대해 요만큼도 모르던 여자가 어느새 기특한 마음을 품은 모양이었다.
히아신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떴다. 서로에게 나쁠 것 없는 길이 트였다. 고민하던 것보다 결말은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만의 왕국에서 손을 잡고 오순도순하게 사는 결말이.
“너는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구나.”
저런 뜻 모를 소리를 하는 것조차 끔찍하게 그의 마음에 들었다. 이제 히아신은 제 웃는 얼굴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확신을 얻고 풀어지는 입가를 내보였다. 나디사는 그게 모욕적이라고 느낀 얼굴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나디사는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몸을 틀었다. 행복을 만끽하느라 한발 늦었다. 히아신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그녀와 문 사이로 끼어들었다.
문고리를 아슬아슬하게 잡지 못한 나디사는 그를 피해서 몸을 반대로 돌리려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등 뒤에서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히아신은 자꾸 포옹을 거절하듯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더욱더 세게 압박했다.
“놔.”
정말로 어쩌면 좋을까. 심장이 거꾸로 매달려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토하고 토하다 보면 심장 조각을 뱉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열한 웃음소리를 흘린 그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싶었다. 어쭙잖은 동료가 아닌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조금 더 확실한 것. 원할 때마다 꺼내어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증거를.
“나디사아.”
“…….”
“그 여자는 말이지. 눈이 아주 예뻐. 볼 때마다 톡 꺼내서 내 입에 넣고 다니고 싶다니까?”
“…… 뭐?”
나디사는 되받아 물으며 뒤로 어깨를 틀었다. 제정신이 아닌 그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그 얼굴에 오른 감정은 분명 질투와 괴로움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감정을 모조리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저 마음에 손을 집어넣어 그 밑바닥까지 긁어낼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황홀할 텐데.
“손가락은 조각 같고 피부는 달빛 같아. 입술은 말이야…….”
“비켜.”
“아직 안 끝났는데 왜? 알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 여자에 대해.”
“도대체 넌…….”
다급히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나오는 말을 단속했다. 히아신은 그 끔찍할 정도로 좋은 인내심에 화염병이라도 던지고픈 심정이었다. 그녀의 인내를 활활 태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달콤한 진심을 얻어 내고 싶었다. 히아신은 조금 초조해진 기분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손에 붙잡힌 나디사는 얼굴을 빼내기 위해 가소로운 저항을 시작했다. 뺨이 짓눌린 얼굴은 그야말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히아신은 도망가기 바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입맞춤을 내렸다.
“오, 이런.”
그때 그녀의 뺨에 흐르는 가는 물줄기가 그의 입술로 들어왔다. 이 급조된 여름밤처럼 더운 눈물이었다. 눈가가 빨개진 나디사는 이제 완연한 분노를 담아서 그를 바라봤다.
눈물이라 인식할 새도 없이 그는 제 입가를 핥았다. 처음 맛본 그녀의 슬픈 눈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씁쓸했다. 맛으로 따지자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흘리는 눈물이 더 나았다. 히아신은 그 눈물 한 방울이 목으로 타고 들어와 심장에 도착했을 즈음 깨달았다. 그녀의 슬픈 눈물은 심장을 한 번 더 고장 낸다는 걸. 불과 한 방울에 심장이 백기를 들었다.
“너는 이 모든 게 재밌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지했어. 그날도, 오늘도. 그런데 고민하고 힘든 건 나뿐인 것 같다.”
히아신은 헛생각하느라 그녀의 말을 반 이상 날려 버린 것에 환멸이 일었다. 이처럼 감미로운 고통은 처음이라서 반응이 늦었다. 저 혼자 멀리 가 버린 그녀를 쫓아가기 위해 히아신의 입술이 바빠졌다.
“다시 말해 줄래? 잘 못 들어서.”
“하.”
이런 순간까지 장난을 치다니, 라는 뜻의 한숨이겠다. 나디사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온 힘을 다해서 치워 버리려 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의 말을 다시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전해야 할 듯싶었다.
이왕 얻어 낸 귀한 마음을 썩히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간직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잘만 쓴다면 그가 정해 둔 결말에 한 발짝 다가서지 않을까. 그녀의 동의 없는 해피 엔딩과 그녀의 동의가 있는 해피 엔딩. 그 차이는 여름과 겨울처럼 분명했다.
히아신은 정신없이 버둥거리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가는 길에 뺨을 얻어맞고, 눈도 두 차례 가격당했으나 상관없었다. 나디사에게 말하면 기절하겠지만 말이다. 그녀에게 종일 얻어맞고 있어도 딱히 화나지 않는다. 때리는 그녀가 아프고 지치지 않는다면야.
그렇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까지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힘이 빠진 그녀가 씩씩거릴 때마다 입술로 응원해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향긋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부채처럼 머리칼이 펼쳐진 그녀는 아름답고 숭고했다. 감히 손대면 안 될 분위기가 흘렀다만, 이미 그녀와 이런저런 것 다 해 본 입장에선 가만히 바라만 볼 수 없는 자세기도 했다.
하지만 히아신은 그녀의 위로 올라타 순수하게 입만 맞추려고 했다. 정말로, 맹세코.
“아야.”
제 아래에 깔려 키스를 받던 그녀가 돌연 그의 입 안을 콱 깨물었다. 어려움 없이 피가 나기 시작하는 입 안을 혀로 살짝 눌러 주었다. 히아신은 더욱 화사한 얼굴로 그녀의 목에 코를 비비적거렸다.
“음, 좋아.”
“네가 싫어.”
결국 그 말을 듣는구나. 제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유쾌하진 않았다. 히아신은 꿋꿋하게 웃으며 그녀의 짜증을 받아 주었다.
“왜 그래, 나디사. 나를 좋아하던 거 아니었어?”
“그런 적 없어.”
“정말?”
“비켜. 비키라고.”
힘에서 밀리는 게 분한 듯이 얼굴이 빨개져 있다. 저 눈빛으로 보나 몸짓으로 보나 그녀는 그가 주는 걸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히아신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그녀의 분노, 기쁨, 슬픔, 전부 다 그에게는 행복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가 부정적인 감정을 건넬 때마다 행복은커녕 눈앞이 까매졌다.
그녀가 분노하면 그도 분노하고, 그녀가 슬프면 그도 슬펐다. 이건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베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는 원래의 계획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나디사. 나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