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디사의 처량한 도주극은 시가지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마차 삯은 마벤에게 빌려 온 돈으로 간신히 치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히아신은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 그 기나긴 숲길을 지나는 동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잘된 일이었다. 나디사는 마차에 머리를 대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여자를 죽여 달라는 말에 달아나지 않았던 건지.
결론은 빨랐다. 그 결정에 마음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안위와 돈, 그리고 닥쳐올 암담한 현실뿐이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간다 해서 선택이 달라지려나. 예나 지금이나 가진 건 젊은 몸뚱이뿐이고, 당시 형편으론 라드군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구입할 수 없었다. 라드군에 치를 떠는 마로닌 부부가 그걸 사 줄 리도 만무했고.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아도 그날 그녀는 돈을 마련하여 뛸 듯이 기뻤다. 그가 말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금방 잊힌 주제였다.
축제 날 사정을 듣고서도 그의 과거를 동정했지, 그 신의 등장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건 순전히 제 마음의 문제였다. 히아신을 좋아하는 제 마음이 내렸다 그쳤다 했다. 미움이 내렸다가 애정으로 그쳤다. 한번 싫은 건 죽어도 싫은 남자가 그 여자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 흑백으로 명확히 나뉘지 않았다. 미워하는 마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덧칠해졌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디사는 마른손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은 나오지 않는데 마음은 이미 눈물바다였다. 그저, 그 모든 게 슬펐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울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모세스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갈 때는 차분한 표정을 꾸며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가는 비가 내렸다. 그리고 하필 모세스 가문의 가주가 자리를 비웠다. 군복이 없어 저택 정문을 통과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신분을 증명할 짐이며 배지며 전부 별관에 있는 터였다.
다행히 얼굴을 아는 하녀가 신분을 대신 보증해 주어서 하루 반나절까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별관으로 돌아온 차였다.
“떠났다고요?”
“네. 이른 새벽에요.”
나쁜 소식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찾아왔다.
발톱 부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별관 손님방에 우두커니 선 나디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히아신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다.
“더 올 분은 없는 것이죠?”
문을 열어 준 하녀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아뇨. 한 사람 더.”
그 말에 하녀는 난감해했다. 집주인도 없는데 들락날락하는 게 불편한가 싶었다.
“그럼, 나디사 경이 누구신지.”
짐 가방 자물쇠를 잠근 나디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별관 담당이던 하녀의 손에 작은 편지가 들려 있었다. 곧장 그녀에게 대답했다.
“접니다.”
“아, 여기. 오늘 새벽에 떠나실 때 저에게 주고 가셨어요. 혹시 이쪽에 짐을 챙기러 들르면 전해 달라고.”
나디사는 조용히 그 편지를 받았다. 마벤의 필체로 쓰인 그것을 얼른 펼쳤다. 비처럼 쭉 내리기만 하던 마음이 편지의 첫 줄을 읽자마자 개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 나디사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즈음엔 우리는 수도 근처에 있는 랭보라는 마을에 도착해 있을 거야. 실은 너희들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고 싶었는데 갑작스럽게 전보가 왔어.
히아신 놈은 어디 있는지 말을 하지 않았어. 네 몸이 좋지 않아 조금 더 늦게 간다는 말만 전하더라고. 사실이 아니지? 다 같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모세스 가문의 가주도 왕궁으로 불려 가는 눈치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복귀하라는 날짜가 시간이 있으니 얼른 랭보로 오도록 해.
그리고 이건 사심을 덧붙인 말이니까 흘려들어도 좋아.
나는 네가 히아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내가 창피해서 말을 안 한 게 있어. 걔랑 껄끄러워지고 믿지 못하게 된 일이 하나 있거든.
나중에 네가 히아신과 틀어지면 제일 먼저 이야기해 줄게.
자꾸 아트리스가 빨리 떠나자고 성화야. 너하고 히아신이 없어서 엄청 예민해져 있거든. 그러니까 빨리 랭보로 와. 우리도 다음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너희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겨 볼 테니까.
랭보에서 가장 큰 여관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와.
그럼 안녕!
빨리 만나길 고대하는 마벤이.]
랭보. 새로운 임무가 생겨서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은 한시가 급해졌다. 노디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마지막까지 친절을 잃지 않은 하녀는 마구간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 줬다.
뒷문을 열고 빠져나와 쉼 없이 달렸다. 마구간에 2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나디사는 너무 놀라 짐 가방을 놓칠 뻔했다.
로마와 디디가 마구간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히아신이 먹이를 주며 노는 중이었다. 주는 대로 냉큼 받아먹고 있던 로마가 그녀를 알아보았는지 목을 위로 쳐들었다. 그 반가워하는 몸짓을 읽은 히아신이 빗속의 그녀를 찾아냈다.
나디사는 비를 가려 주고 있던 짐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분명 자신보다 늦게 출발한 그가 무슨 작당을 부렸기에 여기 있단 말인가.
“놀란 거야? 알잖아. 나는 항상 너보다 빠르다는 거. 너를 향한 마음도, 우리의 다음에 대한 준비도.”
굳이 비를 피하지 않는 히아신의 상체는 셔츠가 다 달라붙어 있었다. 촉촉이 젖은 그의 맨 살갗이 눈에 들어왔다. 갈팡질팡하다가 멀리 서서 로마를 손으로 불렀다.
“로마.”
그런데 로마의 머리를 그가 가지 못하게 손으로 짓눌렀다. 히아신은 뭔가 알아차린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는 내리고 나는 대답도 못 들었고. 기분은 안 좋은데 얘는 마침 내 손에 있네?”
“로마한테 그러지 마.”
그 말을 듣고 더욱 자극받은 듯 그의 손 핏줄이 섰다. 나디사는 어쩔 수 없이 달려가 직접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그는 오히려 이번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다. 끌려가 그의 앞에 서게 됐다. 나디사는 빗물에 그간 쓰고 있던 가면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마차에서, 길에서, 호수에서. 부피를 줄이려고 애써도 안 되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배신감.
신을 모실 거였으면 평범한 여자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다정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남들하고 다르게 대한 이유가 그거는 아니었어야 했다.
결국 신에 대해 세세히 설명할 필요 없는 저에게 잘해 준 것밖에 더 되나. 갚지도 못할 빚을 지게 해 두고 잘 조련한 것밖에 더 되나.
수많은 감정, 수많은 말, 그를 향한 날카로운 것들이 목 언저리까지 왔다. 그러나 나디사는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그것을 꿀꺽 삼켰다.
친모에 대한 호기심도 마로닌 부부가 불편해하니까 삼켰다. 고된 세탁소 일도 돈이 되니까 견뎠다. 그 두 가지에 비하면 이깟 감정을 삼키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밀린 돈도 아니고, 애틋한 가족도 아니고. 그의 사탕발림에 휘말려 혼자 가지게 된 감정이었다. 그게 자리를 크게 잡았다는 것만, 어쩌다 보니 그것만 몰랐다. 알게 모르게 저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한 번, 두 번, 눈에 담다가 마음까지 담았나 보다.
선물한 금색 시계는 여전히 그의 가슴 포켓에 들어가 있었다. 그게 보기 싫어 나디사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내려가는 그녀의 턱을 단숨에 잡아 올리는 손이 있었다.
“나디사가 이상하다.”
“뭐가.”
“이쯤이면 나를 용서해 주던데. 화가 덜 풀렸어?”
“아니야, 그런 거.”
나디사는 주머니에 있는 편지를 꺼내려다가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편지를 줘도 이 망아지 같은 남자는 안 읽겠구나 싶다.
“랭보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나 봐. 새벽에 그래서 급히 출발한 거고. 원래라면 우리를 기다렸을 거래. 얼른 가자.”
그러나 손톱 밑으로 그녀의 턱을 은근히 더듬는 손길은 떠나지 않았다. 비를 맞고 있는 두 마리의 라드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그의 젖은 손이 싫지 않았다. 이대로 그에게 신을 잊어 보는 건 어떠냐고, 너도 그 비참한 길을 가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참는 건 잘해서 다행이라며 자조하는 사이 그가 고개를 숙였다. 빗물 맛이 나는 입술이 닿았다. 제 욕심보다 간소한 입맞춤을 나눈 히아신은 자연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큰 팔로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춥겠다. 우리 공주님.”
“랭보로 가야 돼.”
그 뒤로도 나디사는 앵무새처럼 랭보로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이 아닌 다른 말은 할 수 없는 것처럼. 분위기가 풀어지면 또 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무서웠다. 저도 모르게 히아신의 옷 끄트머리를 살며시 쥐었다.
그걸 히아신의 눈이 훔쳐보았다. 들킨 걸 알아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미웠다가, 좋았다가, 슬펐다가. 이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은 주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랭보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내가 모시고 갈게. 그건 허락하지?”
허락한다고 끄덕였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나디사는 이 포옹의 끝이 제 마음의 끝이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