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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3화 (93/210)

93화

아주 많은 순간 히아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간 면전에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다.

오만하고, 눈치 없고, 제맛에 사는 놈. 그럴 때마다 나디사는 겉모습만 그렇지 사람 자체는 선하다고, 그렇게 그를 변호했다.

허술하고 어설펐지만 사랑을 이야기한 첫 남자였다. 그만큼 잘 보이고 싶었다. 낯선 밤을 허락했고, 저만 아는 그의 표정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 태도는 낯설었다. 몸을 가졌으니 이제는 본색을 보여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나디사는 부딪혀 오는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거부를 읽었음에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화났어?”

“애들이 우리를 버리고 갔을 리 없어.”

“내가 사정이 생겨서 너랑 같이 돌아간다고 했거든. 어제 편지했어. 너 공주님처럼 자고 있을 때. 그래서 갔을 거야. 걔들이 정한 출발 날짜가 오늘이기도 했고.”

히아신은 그녀를 숨 막히게 껴안은 다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같이 느긋하게 아침 먹고 출발하고 싶어서. 꼭 떼로 몰려다닐 필요는 없…….”

나디사는 그의 팔을 밀어 내고 옆으로 비켜섰다. 몸과 마음이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천천히 침실 쪽으로 걸어가 햇살이 드는 천장 밑에 섰다.

밤에 보는 것과 느낌이 달랐다. 별과 촛불이 가득한 밤은 떠난 지 오래였다. 햇살이 앉은 손끝을 보고 정신이 들었다.

네가 반한 게 누구인지 보라는 듯이 그 햇빛은 참 따가웠다.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나디사의 뒤로 걸어온 그는 뜨거운 차를 들고 왔다. 남의 속이 타는 것도 모르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건넸다.

“빈속은 안 좋아요, 공주님.”

“왜 그런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거야?”

그늘 한 점 없는 히아신의 얼굴은 순결하게만 보였다.

“아직 안 끝났구나. 글쎄? 그냥 나랑 아침 먹고 느긋하게 출발해 주면 되잖아. 나 저거 준비하느라 책도 샀는데. 스튜를 맛있게 끓이는 50가지 방법.”

“히아신!”

이렇게까지 생각이 짧은 사람인 줄 몰랐다. 나디사의 고함을 들은 히아신은 알았다는 듯이 두 개의 잔을 협탁에 올렸다. 갈피 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봤다. 곧 달래 주려는 듯 다정한 그의 손길이 뺨에 닿았다.

“그만 화내. 그거 나한테는 사랑 고백 같은 거야.”

“하…….”

히아신의 눈빛이 달라져, 그래도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날아오르던 기대는 실망감에 그치고 말았다. 단단하고 질긴 손은 치워지지도 않는다. 수차례 떼어 내려고 한 손이 그녀의 뺨을 소중한 듯 쓸어 만졌다.

“나한테 화낼 때는 이런 얼굴이구나. 이것도 되게 괜찮다.”

그에 대한 실망감은 당연했다. 예전보다 히아신의 감정과 생각이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다. 멀쩡한 구두를 망가트리는 행위가 저를 위한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히아신의 결정은 늘 흥미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작은 세상에는 저 말곤 없었다. 동료라는 말은, 책임이라는 말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거겠지. 그러니 실망감 또한 섣불렀다. 그의 세상을 그보단 넓게 본 그녀의 탓이었다.

히아신은 그녀의 눈두덩에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입맞춤을 택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노려보는 거 말고 이제 다른 거. 아침 만들어 줘서 고마워, 하면서 눈웃음치는 거 보여 줘.”

“너는 나한테 조금도 미안하지 않구나. 내가 화내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디사는 가슴 포켓 위로 빠져나온 시곗줄을 가만히 응시했다.

“놀랍게도 이해하는 중이야.”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아. 우리끼리 복귀한다고 했다고? 그 말을 듣고 떠났을 리 없어.”

나디사는 그의 손을 뿌리친 뒤 문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손등으로 닦아 누르며 감정을 식혔다.

“갔으면?”

안 그래도 쓰린 속을 그가 긁었다. 나디사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히아신은 마른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미소를 유지했다.

“갔으면 어떡하게. 응?”

“갈게.”

감정 실린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닫혀 있지 않았다. 오두막 밖으로 나간 그녀의 뒤를 히아신이 즉각 따랐다. 혼자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오두막 주위를 둘러싼 호수는 건널 방법이 따로 없었다. 그때 딱, 딱,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추어 나룻배 한 척이 오두막으로 접근했다.

사공 없이 떠다니는 배가 도착한 순간에도 히아신은 별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는 다만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려고 했었다.

“너무하네.”

나디사는 손수 치마를 걷고 올라타며 그 손을 거부했다. 배 한 쪽에 올라탄 히아신은 제 손이 민망한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노를 젓는 건 그의 몫이었다. 수면을 가르며 나아가는 나룻배가 하얀 물새들을 만났다. 그 아름다운 새 떼는 자리를 내주듯 호수 위로 날아올랐다.

“나디사.”

“…….”

“나디사.”

갑자기 호수 중간에 멈추어 서는 그를 보며 나디사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뜨거운 뙤약볕이 부리처럼 작은 나룻배에 내리쬐었다. 이 더위에 히아신은 노를 놓고서 어깃장을 부렸다.

“뱃삯은 내.”

“얼마인데.”

그 치졸한 놀음에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었다. 히아신은 당돌하게 받아치는 그녀가 마음에 드는 듯이 웃어 보였다.

“여기, 뺨에 입 맞추기.”

제 뺨을 가리켰다. 괘씸해진 나디사는 일어서서 노를 대신 쥐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뻗어지는 손이 있었다. 배가 기우뚱, 할 정도로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아 당겼다.

나디사는 그의 허벅지에 잠시 앉게 됐다. 한쪽으로 중심이 쏠리자 배가 기우뚱거렸다. 놀란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일어나는 차였다.

“입 맞추기 대신 포옹이었지만 배는 출발해 줄게.”

다시 앉게 된 자리는 그와 가까웠다. 작은 배라서 그의 발 사이 간격에 그녀의 발이 쏙 들어갔다.

“나디사.”

꼼지락거리는 발이 도망치지 않게 그가 양측 구두로 지그시 눌렀다.

“나 그 여자 생겼다?”

그 여자, 가 누구인지 나디사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쓸려 가는 물소리에 맞춰 시선을 들었다. 장난이 아닌 양 그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 진짜로…….”

말로만 들었던 운명의 짝을 정말 제 손으로 죽여 달라는 건가. 그러기로 약속했지만서도 말이다. 이건 철천지원수쯤은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의 설명을 빌리자면 ‘신’이라고 그랬다. 그의 유일신이 된 여자를 죽일 만한 마음이 대뜸 생길 리 없었다.

히아신은 무슨 생각 중에선지 노를 젓기만 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죽여 달란 말도, 하다못해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히아신. 그게 장난이 아니라면 더 말을 해 봐.”

“내가 그 여자에 대해 말하면 말이야, 나디사.”

“응.”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돈을 꾼 대가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을 책임졌다는 걸 말이다.

“죽여 주는 대신 가져다줄래?”

해 보자면 살인보다 납치가 쉬울 것이다. 그 여자를 꼭 죽여 달라던 히아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해벗 종족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에게 신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아니, 지난밤들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짓은 무어란 말인가.

그녀도 알 거 다 아는 나이였다. 신이라고 해서 순수하게 추앙만 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설렘과 기쁨, 묘한 두려움으로 맞이한 밤이 그에게는 하룻밤 유희 거리일 수도 있겠다. 바람처럼 가벼운 남자가 제 신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저한테는 당연하지 않던 배려가 그녀에게는 당연해질 거다.

그 차이를 짚어 나가자 가슴이 쫙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자신과 밤을 보낸 것은, 조금 더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함인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샤포드에서 온 촌스러운 여자애 하나 놀려 먹는 게 무어가 어려웠겠는가.

히아신은 거의 다 왔음에도 노를 놓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신을 그리는 눈은 그처럼 깊었다.

“어떻게 가져다주는데.”

상념을 빠져나온 그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저런 웃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신을 이길까. 그녀는 뭣도 모르고 마음을 가져 버린 여자에 불과했다.

“나 먼저 내릴게.”

나룻배가 뭍에 도착하자마자 폴짝 뛰어내렸다. 배가 출렁, 흔들리며 그가 일어섰다.

“나만 두고 가?”

나디사는 수풀을 거두어 내고 허둥지둥 발을 들였다.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고, 무시하며 뛰어갔다.

긴긴 여름밤, 심금을 울리던 사랑의 말은 전부 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 신을 위한 제물이 된 나디사는 어린 양처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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