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고마워요. 진심으로.”
아직 파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것처럼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눈물 자국을 닦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라이의 모습은 처음이었단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파티 뒤풀이까지 참석할 생각이 없던 발톱의 부대는 곧장 사복으로 갈아입은 차였다.
하지만 파티의 여운은 가주만이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나디사는 이 행복한 기운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파티라는 곳에서 추는 춤이 즐거웠다.
왕세자의 파티는 그보다 더 화려하고, 그보다 더 아름다웠음에도.
좋아하는 이들과 형식 없는 춤을 추고, 마침내 라드에 올라타 불꽃을 들고서 바람을 느끼는 때에 그 행복함.
나디사는 순수한 행복으로 젖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 꼭 해야 할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모세스 가주가 전해 준 것은 작은 펜던트였다. 똑같은 여섯 개의 펜던트는 모세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것이었다.
“가진 것은 열 개인데 여러분은 여섯 명이니까요.”
“이게 무엇입니까.”
“크라신에 와서 언제든 도움을 받고 싶으면, 이것을 내미세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작은 펜던트를 내민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미련은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단지 앞으로 별을 보면 슬퍼지겠다는 말을 남겼다.
“아.”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눈으로 그들을 훑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한 분은 어디 갔죠? 그 은발에…….”
모세스 가주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분명 이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은발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디사의 눈길이 바람에 흔들리는 문가에 닿았다. 히아신 아스. 나디사는 그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에게도 전해 주지요.”
“그래요.”
모세스 가문의 은인에게만 전하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아들에게 즐거운 기억을 준 이를 은인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이 한계에 몰려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디사는 조용히 나누어 주는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은 하나를 자신이 챙겼다.
“가주님. 저희가 임무는 끝이 났어도 복귀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루 이틀 정도 더 묵어야 할 듯싶은데 만일 곤란하시다면 밖에 따로 나가 숙소를 잡겠습니다.”
“전혀요. 오히려 더 붙잡고 싶은걸요. 라이가 저렇게 되고 나서부터 손님이건 파티건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어요. 오랜만의 사람이라 저택에도 활기가 돌고.”
나디사는 오늘 제 나이답게 천진하던 라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부터 아팠던 건가요?”
“안쓰럽게도 제 재혼이 결정된 후부터예요. 그래서 더 재혼을 서두르게 됐죠. 아이가 하루라도 더 좋은 아버지를 가졌으면 했으니까.”
그 후로 모세스 가주는 아들 라이에 대한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파티 뒤풀이 중에 라이의 생일 선물을 전하기로 했다. 현재 그를 위해 계부와 둘이 잠시 파티장을 빠져나갔단다.
생일 선물은 라드를 대신해서 귀여운 조랑말로 준비했다며 웃었다.
그 조랑말을 타는 라이를 상상해 보며, 나디사는 파티로 인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히아신은 이 여름밤에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일까. 춤을 싫어한다면서, 춤을 추는 그녀를 바라보던 따듯한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 * *
히아신은 지붕 꼭대기에 누워 있었다.
파티장에서 훔쳐 온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음악 소리에 맞춰 발끝을 까닥거렸다.
음악, 편지, 춤. 그가 싫어하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리아, 그녀가. 그의 어머니였다.
해벗 종족답게 대단한 사랑을 한 그의 어머니는 좀처럼 자식을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한 남자의 자식임에도 그랬다.
해벗 종족의 저주란 그런 것이었다.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자식들은 평생을 어떠한 결핍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그 거지 같은 운명에 굴복하여 부모와 비슷한 절차를 밟는다.
신을 만나면 꼭 죽여야지. 제 손으로 하지 못하면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하지만 히아신은 결국 해벗 종족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 신을 가장 숭배하는 신도가 되어, 그녀의 절망과 사랑을 동시에 바라는 저질스러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느낌에 히아신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발소리는 언제나 그의 귓가에 잡힌다.
‘감사해요, 아버지!’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히아신은 눈을 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버림받았다.
그리고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후, 그녀 또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는 그에게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자식은 부모에게 맹목적이었다.
맹목적이지 않은 부모는 있어도, 자식은 살아남기 위해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회중시계가 3시 3분에서 멈춘 것을, 그는 자신을 향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조차 어미가 그에게 준 것이 아니고, 뺏은 것이다. 죽은 어미에게서 몰래 가져왔다.
히아신은 눈을 감고서 그 시계를 꺼냈다. 그리고 그 시계 안에 담겨 있는 초상화를 펼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나만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나 나를 신도로 만든 아름다운 신의 죄도 있지 않겠어.”
그러나 도무지 죽이는 것만은, 할 수가 없겠는데.
히아신은 그 초상화를 주머니 깊이에 찔러 넣고서 아래를 바라봤다.
조랑말을 받고서 행복해하는 아들과 아버지. 그들의 행복으로 히아신은 천천히 뛰어내렸다.
“악!”
“라이!”
갑자기 지붕에서 뛰어내려 나타난 히아신을 보고서 두 사람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는 얼굴을 했다.
“당신, 라드군 아닙니까?”
히아신은 낡은 회중시계를 손가락에 걸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시계를 보는 계부와 라이의 눈동자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자, 여기를 보세요.”
선택할 수 없는 문제. 히아신은 이런 귀찮은 일에 끼어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신에게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좋았다.
계부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혼자 남은 아이는 조랑말과 단둘이 남았다. 라이는 히아신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내비쳤다.
“누, 누구세요. 우리 엄마가 누군지…….”
“주위를 둘러봐, 라이. 여기가 어디지?”
저를 납치한 사람의 말임에도 라이는 친절히 따라 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돌리다가 감탄하고 있었다.
“은하수?”
조랑말을 뛰어놀게 하기 위해 깔아둔 너른 정원과 저택의 건물이 사라지고 라이는 현재 얕은 호수에 잠겨 있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호수는 은하수가 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별, 별, 별뿐이었다.
까만 하늘에 뜬 하얀 별들을 보며 라이의 입이 벌어졌다.
작은 조랑말을 옆에 끼우고 얕은 호수를 첨벙, 첨벙, 걸어 다니던 라이는 웃으며 히아신의 앞까지 달려왔다.
“여기, 여기가 뭐예요?”
“나의 신이 부탁한 공간이지. 그런데 너 상상력이 빈곤하구나.”
“신?”
감흥 없는 히아신의 표정과 달리 라이의 얼굴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라이는 가장 크고 하얀 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별을 떨어트려 줄 수 있어요?”
라이의 포동포동한 뺨을 무심히 내려 보던 히아신은 손가락을 들어 그 별을 가리킨 뒤, 아래로 슬그머니 끌어 내렸다.
그러자 가만히 빛나고 있던 별이 하나둘, 이 호수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수십 개의 별을 보며 라이는 손을 꼭 모으고 기도를 했다.
“그런다고 소원은 안 이루어져.”
하지만 이미 듣지 않고 있는 라이를 내버려 두고 히아신은 천천히 그 호수를 빠져나왔다.
아이는 조랑말과 함께 호수에 서서 그 별들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