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상황은 모난 곳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서 연습한 대로 숨결에 불을 붙이자 멀리서 보았을 때 별처럼 아득히 빛이 났다.
그 중 나디사는 숨결의 양을 늘려, 가장 큰 별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름다운 별을 전하는 라이의 생일 파티 계획은 차근차근 그 모든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조로운 일정 속. 고작 파티를 이틀 앞두고 나디사는 심란한 마음에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군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온 나디사는 정원을 맴돌고, 또 맴돌았다.
이유 모를 불안함이 입 안에 가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무더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그녀의 턱에 작은 땀방울이 맺히게 했다.
땅을 보고 걷던 그녀는 까만 군화를 보고서 걸음을 쉬었다.
매캐한 연기. 더위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은 듯이 퀭한 눈을 가진 아트리스가 하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땅만 보고 걷느라 그가 이 구석에 숨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는 막 나온 사람처럼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아트리스.”
말없이 제 품에서 철통같은 담뱃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피워 본 적 없어.”
“누구나 처음은 그래.”
나디사는 그의 철통 안에 있는 담배에 손을 대려다가 다시 손을 물렸다.
마로닌 부인은 술은 마셔도 담배는 피지 말라고 늘 로단에게 말했었다.
로단은 그 말을 철저히 따랐고. 마로닌 부인의 말은 집에서 곧 법이었다.
“어머니가 싫어해서.”
아트리스는 이번에는 별다른 반발 없이 담뱃갑을 닫았다. 그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부의 맑은 여름은 밤하늘의 별을 잘 보이게 만들었다. 숲으로 떨어질 것처럼 박힌 별들을 보면서 나디사는 말했다.
“안 자고 나와 있어.”
“적어도 난 옷은 갈아입었어.”
아트리스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교리 책을 끼고 다닐 정도로 신실한 남자였지 않은가.
나디사는 생각에 잠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히아신을 때릴 정도로 그가 인내심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그는 원래도 히아신과 상성이 좋지 않지만, 때릴 정도로 이성을 잃진 않았었다.
“왜.”
“네가.”
아트리스는 연기를 뱉으며 조금 웃었다. 말이 겹치자 아트리스는 먼저 말하라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히아신의 말은 거의……. 사람을 골리려고 하는 게 많아. 사람이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면 더 좋아하거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
아트리스는 조금 더 크게 웃으며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그리고 나디사, 부탁 하나만 할게.”
“무슨 부탁.”
“그런 식으로 그놈을 감싸지 마.”
“감싼 적 없어.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야.”
“그게 감싸는 거야. 그놈의 지저분한 행동을 도발로 치부하는 게. 사실은 알고 있지 않아? 그게 도발이 아니라 그놈의 진심이라는 걸.”
여름밤을 지새울 기세로 울던 풀벌레 소리가 조용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트리스와 말이 없어졌다.
그러한가. 자신이 그의 모든 말들을 도발이고, 장난이고, 그리 가볍게 생각했던 것인가.
아트리스는 돌연 눈을 질끈 감고 두통이 온 것처럼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소리 지른 것은 미안.”
나디사는 눈을 감고 이 밤을 버텨 내는 듯해 보이는 아트리스에게 이 질문을 던져, 더한 짐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내내, 나디사는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 없었다.
히아신의 장난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건 정말로 그를 자신도 모르게 감싸고 있던 걸까.
그의 단순한 질문 하나도 넘기지 못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자신은 그걸 장난이라고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트리스. 이건 그냥 묻는 건데.”
하얀 연기가 그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노란 달빛 같은 눈빛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아름다운 거짓과 흉측한 진실이 있으면, 너는 어느 쪽을 택할래.”
아트리스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느리게 담배를 끼운 손을 내렸다.
나디사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달빛 같던 그의 노란 눈에 말간 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나디사는 그게 꼭 호수에 잠긴 달처럼 보였다.
그에게도 어려운 질문이었나 보다. 저를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않았던 아트리스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나한테 왜 물어.”
“……누구한테 들었는데. 나는 어느 쪽이 나은지 모르겠어서.”
그 질문이 어떤 소년을 향한 것이라면. 더더욱.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면 기울어지는 저울 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두 가지 다 끔찍하기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나디사는 제 질문에 깊이 빠져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트리스라면 쉬울 줄 알았다.
그는 거짓이라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포장을 썼다고 하더라도 거부하지 않을까.
“나였다면.”
“응.”
“거짓을 택하겠어.”
그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나디사는 이 무더운 여름날과 어울리지 않는 한기를 느꼈다.
“진실은 상대를 아프게 할 뿐이니까. 아프지 않는 거짓에서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는 상대를 아프지 않게 하고 싶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두려움에 젖은 그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진실 때문에 아프지 않게 하고 싶은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디사는 그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물렸다.
“먼저 들어갈게. 대답 고마워.”
아트리스는 이 여름날에 어울리는, 미련이 더위처럼 남은 목소리로 그녀를 잡았다.
“그 거짓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어.”
나디사는 떠나려다가, 뒤돌아서 그를 바라봤다. 그건 그냥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트리스의 충혈된 눈은 그 질문에 자신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디사는 의문 섞인 눈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너라는 거야?”
아트리스는 그날의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나디사는 그의 말에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이 무더위와 함께 피하고만 싶었다.
그리고 그 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별관 안으로 들어온 나디사는 역시 그에게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답을 한 순간, 그녀의 마음에도 답이 정해졌으니.
* * *
아트리스와 달밤 아래서 대화하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바쁜 파티 준비를 보내는 중이었다.
이번 파티의 콘셉트는 모두 생일의 주인공인 라이 모세스가 정한 것이었다.
여자는 요정. 남자는 사냥꾼. 진부한 동화의 나오는 인물들을 초대한 사람들에게 입히고, 정작 제 어미와 본인은 왕자와 공주로 선택한 것이 재밌었다.
이 파티에는 모세스 가문의 직계 가족 몇몇과 평상시 라이와 친한 사용인들만이 참여한 파티였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둘러싸인 생일 파티였다.
오늘 저녁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파티를 위해서 선물로 받은 요정 옷을 입어 본 나디사와 마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깔깔거렸다.
“안 어울려!”
“그러게.”
“이럴 땐 나도 안 어울린다고 해야지!”
유치한 요정의 날개가 달린 옷과 프릴이 심한 드레스는 어린 소녀가 입었으면 그림처럼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다 된 나디사와 마벤이 입자 어린아이의 옷을 뺏어 입은 못된 어른 같았다.
라드를 타야 하니 안에 짧은 속바지를 입었다. 그게 오히려 두 여자를 유치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벤은 이따위 옷을 입혔냐고 하기 전, 터진 웃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치겠다, 진짜.”
“다른 애들은?”
“말하고 보니 걔들 것도 엄청 기대되네.”
마벤은 나디사의 팔에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려다가, 주춤 물러섰다. 나디사는 이유를 몰라 마벤을 물끄러미 봤다.
“며칠 좀 껄끄러웠지?”
“우리가?”
“너, 바보야?”
“전혀 몰랐어.”
마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저 혼자 너무 틱틱 댄 것은 아닐까, 처음 사귄 여자 친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으로 지새운 밤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니.
나디사가 아트리스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걸 두고 혼자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게 얼마나 유치한 생각이었는지. 마벤은 고민 없이 나디사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가,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하하하!”
마벤의 웃음이 퍼지는 작은 별관 앞에는 네 명의 사냥꾼이 있었다.
사냥꾼이라기보단 도둑을 연상케 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디사는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두 여자의 어울리지 않는 요정 모습을 보고 저쪽도 웃음을 참았다는 건, 네 명만의 비밀로 해두기로 했다.
무더운 여름날, 네 명의 사냥꾼과 두 명의 요정의 비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