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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6화 (56/210)

56화

그리사는 휴가 내내 운동만 하고 있었다.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오후까지 부대 주변을 뛰어다녔다.

시네라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떠나지 못하고, 히아신은 말도 없이 부대를 떠났다.

나디사는 모두 알다시피 고향으로 갔고.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에 틀어박혀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날이 좋아서 어디론가로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아트리스는 환자에 시네라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사는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휴가가 끝나는 날이니 어제보다 일찍 복귀해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고 했다.

휴가를 함께 보내지 않는 대신 저녁 식사는 꼭 같이해야 한다며 준비하고 있는 마벤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 보였다.

시네라를 데리고 열심히 어제 쇼핑을 하고 오기도 했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이제 그리사는 기대하기도 지쳤다.

경비와 인사를 나누고 땀 흘린 티를 벗으며 바로 샤워장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구간을 지나던 그리사는 하늘로 푸드덕거리며 올라가는 하얀 비둘기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 성탑에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쓰는 새는 모두 까마귀였다.

아무래도 편지 전달용으로 훈련된 하얀 비둘기는 이쪽의 것이 아닌 듯싶었다.

땀을 닦으며 그 비둘기가 떠나는 방향을 지켜보던 그리사는 별안간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트리스였다.

“옷은 방에 들어가 벗어.”

“저 뒤에 있었어요?”

“산책.”

그리사는 다시 비둘기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지만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아트리스는 성탑의 문을 열며 그를 기다려 주었다.

“마벤이 보기 전에 얼른 들어가.”

“왜 이래요. 다 벗은 것도 아니잖아요.”

“마벤은 동료이기 전에 여자야. 선은 지켜.”

그리사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성탑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속의 하나 걸친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으려나. 마벤은 아마 자기가 홀딱 벗고 다녀도 상관하지 않을 거다.

그리사는 계단을 올라가며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은 왜 데이트 안 해요?”

먼저 그리사를 보내고 따라서 걸어 올라가던 아트리스는 눈을 차갑게 빛냈다.

“어떤 두 사람.”

“수장하고 마벤. 식사 자리에서도 여러 번 마벤이 티를 내던데. 한 번쯤 같이 가 줘요.”

아침 식사 때 아트리스의 앞에 앉아 노골적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마벤은 다 들으라는 식으로 요즘 이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리스트를 읊었다.

누구하고 가고 싶어 하는지 그 시선의 방향이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정한 아트리스는 그 시선을 한 번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는 마벤의 집념이 대단해 보인다만.

그리사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단에 멈추어 선 아트리스의 시선은 더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너까지 마벤의 장난에 장단 맞추지 마.”

“장난이랄 것 같진 없잖아요. 저쪽은 진심인데.”

“그 진심이 내게는 진심일 수 없어. 장난으로 끝나는 게 서로에게 좋아.”

아트리스는 그를 지나쳐 식당 방향으로 꺾어 들어갔다.

매사 웃음기 없는 남자가 저 정도 반응을 보인다는 건 진심으로 싫다는 뜻이었다.

어쩌겠나. 마벤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그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구경할 맛이 났다. 웃으며 계단을 마저 오르던 그리사는 여자 숙사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꺾어지는 계단에는 마벤이 서 있었다.

오늘 저녁에 복귀하는 나디사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더니. 양손에 화려한 촛대를 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마벤은 텅 빈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화를 다 들었구나. 깊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그리사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울 거 있으면 말해요.”

그녀가 서 있는 계단을 지나쳐 올라간 그는 제일 마지막 층에 있는 제 방문을 열었다.

얇은 속의까지 벗고서 욕탕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거봐. 내가 벗고 있어도 상관 안 할 거라고 했지?

그리사는 창문을 열고서 환기를 시킨 뒤 노크도 없이 들어온 마벤을 바라봤다.

“이러면 나도 노크 없이 들어가요.”

“야.”

“네.”

“내가, 그렇게 별로야?”

자존심이 잔뜩 상한 얼굴이었다. 화려한 촛대를 침대에 던진 마벤이 팔짱을 끼고 방 안을 왔다 갔다 돌아다녔다.

“씨, 말도 안 돼. 나처럼 완벽한 여자가 좋다고 들이대는데 저거 신관 지망생처럼 왜 저래.”

그리사는 걸어가 던져진 촛대를 주워 책상에 올려 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유형이 아닌가 보죠, 마벤이.”

“걔가 어떤 여자 유형을 좋아하는데?”

“그냥 포기해요. 당신은 알아도 맞출 수 없으니까.”

무시하고서 샤워장으로 직진하던 그리사는 달려와 앞길을 막는 마벤 때문에 한숨이 터졌다.

“왜 나한테 와서 그래요?”

“그럼 걔한테 가서 물어? 그건 너무 차, 창피하잖아!”

“창피한 걸 알긴 알았군요.”

저를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리사를 보던 마벤이 팔짱을 꼈다.

“너 나디사 좋아하지?”

“하.”

그리사는 그녀처럼 제 마음을 광고하고 다니는 하수에게 걸려들 일이 없었다.

그리사의 다 자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눌렀다.

“야! 안 놔!”

“비켜요, 같이 샤워장 들어갈 거 아니면.”

얼굴을 누른 채로 밀어 옮긴 그리사는 샤워장으로 들어가 달칵, 문을 잠갔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눈을 감은 그리사는 문득 한 말이 떠올라 다시 눈을 떴다.

‘저거 신관 지망생처럼 왜 저래.’

그 하얀 비둘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신관들이 키우는 비둘기였다.

웬만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신관들이 들고 다니던 금색 새장 속 비둘기. 입문식을 치르던 날에 봤었다.

물을 잠근 그리사는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며 표정을 지웠다.

그 비둘기. 그냥 무시하기엔 감이 좋지 않았다.

* * *

늦은 저녁에 도착한 나디사는 마구간에 로마를 넣어 두고 성탑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라서 모두 자고 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깜깜하게 불이 꺼진 성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짐 가방을 방에 올려 두고 식당으로 내려가려 했던 나디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왔다.

오는 길에 육포는 로마에게 양보하고 식사는 성탑에 돌아와 하려고 했었다.

배가 고픈 나디사는 식당에 들러 식사부터 해결하고 방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어쩌면 휴가의 마지막 날이니 다 같이 시내에 가서 저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간단하게 빵을 꺼내서 해결하려고 문을 연 나디사는 따스한 주황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아무도 없는 식당. 하지만 나무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촛대와 불이 있었다.

그 아래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바구니에 놓인 빵을 보며 나디사는 식당 문을 닫았다.

“마벤?”

식탁 밑에 삐져나온 구두를 보고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서서히 식탁 뒤에서 얼굴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하…….”

가는 한숨 소리와 함께 그리사가 일어났다. 식탁 밑에 숨어 있던 아트리스, 시네라도 천천히 일어났다.

“놀라게 하자고 한 본인이 들키면 어떡해요?”

“아니, 쟤가 눈썰미가 좋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말싸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아트리스와 시네라는 식탁에 먼저 앉았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된 나디사는 웃으면서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

“잘, 다녀와, 왔어?”

“응, 시네라도?”

“나는, 못 갔어. 늦잠을 자서.”

“하하, 그렇구나.”

가방을 내려놓은 나디사가 자리에 앉자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이 포르르 달려왔다.

마벤은 툴툴 입술을 내밀며 나디사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다음부터는 나만 두고 휴가 가지 마. 내가 이 남자들이랑 살면서 얼마나 속 터진 줄 알아?”

“어떻게 속 터졌는데.”

“방에 가서 말해 줄게. 드디어 혼자 안 자네. 있다 없으니까 안 그래도 낡은 이 성탑이 무서워 죽을 뻔했잖아.”

투정 부리는 마벤이 제가 준비한 거라며 아름다운 촛대를 보여 줬다.

나디사는 그것참 값나가 보인다고 칭찬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오가는 식탁은 평화로웠다. 마벤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트리스, 그리사, 시네라와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나디사는 막상 식사를 시작하자 조용한 마벤에게 물었다.

“아픈 건 아니지.”

“전, 혀.”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구운 등심에 나이프를 콱 꽂은 마벤이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아트리스와 마벤을 번갈아 보던 나디사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아, 맞아, 히아신이 안 왔네.”

“맞아. 얘 복귀 안 하면 우리만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우리 다음 휴가에 지장…….”

쾅, 문이 열렸다. 발로 문을 차고 들어온 히아신은 들어오자마자 식탁 위 촛불을 못 견뎌 했다.

“아, 촌스러워.”

“뭐?”

얌전하던 마벤이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그에게 달려들 듯이 일어났다.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고 소리 지르는 마벤과 그 꼴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그리사. 아트리스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시네라.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히아신.

집 나갔던 마지막 망아지가 귀환했다.

아주 오랜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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