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4화 (54/210)

54화

“내일 아침에 돌아가야 한다고?”

따듯한 수프를 나무 그릇에 떠다 준 마로닌 부인은 앉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막 돌아온 딸의 얼굴을 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침이면 돌아가야 한다니. 나열하고 나니 어처구니없을 법도 했다.

“네. 휴일이 내일이면 끝나서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길게 올게요.”

눈물의 재회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에 앉게 된 나디사는 제 군복을 부끄러워하듯 자꾸 숨으려고 들었다.

그녀를 키워 온 마로닌 부부가 그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조금 위축되어 식사를 하고 있는 나디사의 손을 잡았다.

“나디사. 군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익은 당근을 씹고 있던 나디사가 수줍은 듯이 웃었다. 굽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역시 신경 쓰고 있던 것이 맞나 보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말이 없고 멍하다는 인상이 있지만, 제 딸아이는 은근히 감정 표현이 확실한 편이었다.

나디사는 맛있게 식사를 하며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워 내고 있었다.

마로닌 부인은 더 떠다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마이사. 내가 할게.”

“됐어. 앉아 있어.”

서로 일을 하려는 부부였지만, 결국 언제나 승리는 마로닌 부인에게로 돌아갔다.

국자로 수프를 뜨면서 일부러 건더기도 많이 넣었다. 마로닌 부인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새 수프를 놓아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뜨는 나디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못 본 사이 뺨이 홀쭉해진 딸이 마음 아팠다.

“아, 맞아요.”

“응? 왜?”

“제가 드린 봉급이요. 쓰셨어요?”

마로닌 부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어디에 쓰셨어요?”

“여기저기, 뭐.”

그때 눈치 없는 로단이 빈 그릇을 치우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푼도 안 썼잖아. 어디에 썼어? 마이사.”

“아, 로단…….”

마로닌 부인이 이마를 짚으며 표정을 굳히자 로단이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눈치를 챈 나디사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 안 쓰셨어요.”

“모으려고.”

나디사가 더 무어라 하기 전에 마로닌 부인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작 좀 더 가져와야겠다.”

“내가…….”

눈치를 수프에 끓여 먹은 로단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마로닌 부인의 한숨은 바깥 문을 엶과 동시에 빠져나갔다. 찬 바람에 섞인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변해 갔다.

문을 닫고 나온 마로닌 부인은 실망한 듯 보이는 나디사의 얼굴을 떠올리곤 가슴이 아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 돈을 쓸 수 있을까.

나디사에게 말은 안 했다만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랜 친구이자 은인이자 원수, 티사가 아이를 맡기러 올 때의 모습이 딱 그랬다.

‘아이?’

‘응.’

‘아이를 맡아 달라고? 언제 낳았는데?’

‘금방 데려갈게.’

‘티사!’

금방 데려가겠다던 그녀가 다시 돌아온 건 이미 정이 들 대로 든 후였다.

네 살짜리 아이의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지 않고 떠난 티사는 죽음으로 답장해 왔다.

그러므로 원수였다. 죽긴 왜 죽냔 말이다. 알아 온 세월이 무려 17년이었다. 그럼 아이를 맡기고 적어도 17년은 살았어야 했다.

나디사 같은 아이를 주어서 고맙다고, 그 아이도 라드군이 되었다고, 17년이면 그런 소식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얼굴이 닮았어도 나디사는 제 딸이며 티사와는 달랐다.

고아로 자란 티사 레나이와 다르게 그녀는 그래도 사랑으로 키웠다. 티사처럼 앞만 보고 달릴 사람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 라드군에 있어도 별일 없겠지. 티사, 네가 지켜 주겠지.

쌓아 둔 장작 앞에서 별구경 중이던 마로닌 부인은 싸늘한 인기척을 느꼈다.

빙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는 차가운 바람은 상관없는 듯이 가벼운 복장이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샤포드에서 저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혹시 설산에 방문했다가 길이라도 잃었나, 싶었다. 간혹 그런 여행객이 있으니 말이다.

“저기, 괜찮아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서 폐가를 바라보던 남자가 사뿐히 몸을 돌렸다. 은발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남이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누구…….”

나디사는 오자마자 재워 둔 마른고기를 가져다가 저 폐가에 있는 라드에게 가져다주었다.

같이 가 본 로단의 말로는 엄청 큰 도마뱀 같단다.

라드를 훔치러 온 간 큰 도둑이라도 되려나. 하지만 그러기에 너무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였다.

가슴팍에 달린 배지가 나디사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하얀 셔츠만 입어서 군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디사를 보러 오셨나요?”

고작 이틀 휴가를 줘 놓고선. 고새를 못 참고 데리러 왔나 싶었다. 조금 싸늘해진 마로닌 부인의 태도를 지켜보던 남자가 친근하게 웃었다.

“아!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 집에 로마가 있어서 여기 사는 줄 알았죠, 나는?”

장작을 가지러 나온 마로닌 부인이 한참 들어오지를 않자 로단이 밖으로 나왔다. 집 안의 따듯한 공기가 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마이사, 왜 안 들어오고.”

로단도 폐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경계하는 눈빛을 띠었다.

이곳엔 외지인이 거의 없었다. 한동네 살면서 얼굴을 아는 이들 외엔 경계하는 게 좋았다. 신문에 실리지 않는 살인 사건도 가끔 일어나니 말이다.

“누구십니까.”

로단과 마이사가 그러고 있자 앉아 있던 나디사도 따라 나왔다.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나디사는 상대를 알아본 듯 눈이 커졌다.

“히아신?”

나디사의 말에 마로닌 부부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몰렸다. 아는 이였구나. 빙산으로부터 오는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오늘은 손님이 잔뜩이었다.

* * *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표정은 굉장히 상반되고 있었다.

나디사는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며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히아신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귀여웠겠는데요.”

“머리 끈이 다양하지 않아서 양 갈래로 따서 묶어 주거나 하나로 땋기도 하고. 여러 방식의 변화를 줘서 동네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했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히아신과 마로닌 부인이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었다.

로단만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팔짱 낀 채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룻밤 자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로단. 그러면 길바닥에서 자라고 하란 말이야?”

“잘 곳은 생각해 두고 온 것이 아닌가.”

히아신은 대놓고 저를 뚱하게 바라보고 있는 로단에게 사근사근 대했다.

그는 나디사의 어깨에 기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전혀 생각 안 하고 왔는데요.”

“폐가에서 자, 히아신. 거기도 따듯해.”

“거기 춥더라. 로마도 막 떨던데?”

“거짓말하지 마. 아까 보고 왔어.”

“나는 연약한 사람이라서 따듯한 이불과 코코아가 필요해, 나디사.”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로닌 부인은 코코아를 더 따라 주며 물었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인 거지?”

“아니요.”

확답한 나디사를 보는 히아신의 얼굴에 미련이 뚝뚝 흘렀다.

물론 그가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디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오, 저런.”

손톱과 이, 머릿결 상태를 보니 귀하게 자란 자식인 듯하고. 게다가 나디사와 같은 군인이라고 하니 신분도 확실해 보였다.

나디사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행복하길 바라는 마로닌 부인의 눈에는 완벽한 신랑감처럼 보였다.

“폐가에서 잘 테니 기분 풀어. 자다가 얼어 죽어도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마요. 남는 방도 있고.”

불만이 많은 로단만 남는 방 같은 건 없으니 거실을 내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감사하다며 말하는 목소리가 마로닌 부인의 마음을 녹였다.

화기애애한 마로닌 부인과 히아신을 보던 나디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서랍을 열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간단히 씻고서 곧바로 자리에 누웠다.

히아신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누워서도 그에 대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저 망아지 같은 남자는 머릿속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나디사는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그에게 돈을 빌렸으니, 자신의 집을 아는 것은 당연한 건가. 쫓아오는 느낌도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추격당한 건지 모르겠다.

디디를 타고 온 것도 아닌데 그는 어떻게 제시간에 뒤를 밟을 수 있었을까.

그때 창문에 통, 통, 무언가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빗방울 소리인 줄 알았다.

신경이 거슬리게 하는 그 소리는 결국 나디사가 직접 창문 쪽으로 가서야 상황이 종결됐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창문 유리에 부딪혀 떨어지고 있었다.

나디사는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돌멩이를 들고 있는 은색 망아지가 그곳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