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엎드려 팔굽힌 자세로 버티는 훈련이었다.
해변 모래에 발끝이 푹 빠졌다. 달리는 것도 맨바닥보다 몇 배는 힘든 이 사장을 스무 바퀴 넘게 달렸다.
“체력이 없으면 숨결을 써 봤자 조루처럼 금방 쓰러진다고. 오늘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사람이 식사 제외, 라는 벌을 받는 걸로 하지.”
노인처럼 허리를 굽히고 다녔던 건 랭키의 속임수였다. 얇은 티 한 장을 걸친 그의 팔은 나이에 맞지 않는 근육질이었다.
훈련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평온한 목소리와 별개로 지금 아래는 지옥이었다.
팔로 온몸을 지탱하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모른다. 더군다나 바다 바로 앞자리이니 파도가 수시로 뺨을 쳐댔다.
“윽, 아…….”
남자들은 그럭저럭 버티는 모양이었지만 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디사, 마벤은 5분도 지나지 않아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회복이 덜 된 나디사는 달리기를 할 때부터 낙오자 신세였다.
오기와 집념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슬슬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땀이 흘러 시야를 가렸다.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의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디사의 몸이 휘청거리자 지켜보고 있던 랭키가 물었다.
“포기하고 싶나?”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엄청난 동요를 보이던 그는 날이 지날수록 나디사를 남들과 똑같이 대했다. 아니, 오히려 독하게 훈련시키는 면도 있었다.
다른 이에게는 휴식을 자주 권하면서 그녀에게는 단 한 번의 휴식도 용납하지 않았다.
“포기하면 저녁은 없다.”
저녁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이 핑핑 도는데 멀미가 같이 왔다. 코앞에서 하는 랭키의 말도 윙윙대는 벌의 날갯짓 소리처럼 들렸다.
갑자기 모래 위로 풀썩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랭키는 일어나 쓰러진 사람의 앞으로 갔다.
나디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잠시 나갔다가 돌아온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쓰러진 사람은 히아신 아스였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넘어진 히아신은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 쓰러진 게 맞나?”
“팔이 아직 덜 나아서.”
아야야, 엄살을 부리며 히아신은 팔목을 살살 돌렸다.
나디사는 떨어지는 땀 사이로 그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또 봤다.
“모두 일어나.”
히아신에게 고마운 것과 별개로 기분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녀의 체력이었다. 이건 임시방편으로 모면한 것에 불과했다.
땀에 젖은 나디사는 일어나 앉아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노디를 들어.”
훈련은 노을이 질 때까지 계속됐다. 모두 어두운 얼굴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노디를 꺼냈다.
짧은, 검은색의 막대를 들고 있자 파닥파닥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라드들은 주인이 노디를 들면 가까이 오기로 훈련을 받았다.
라드들은 기본적으로 먹이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노디를 들면 고기를 주는 방식으로 훈련을 했는데 강아지 훈련 같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제 주인을 찾아와 등 뒤에 선 라드들을 보며 랭키가 손을 들었다.
“시작.”
노디 훈련이 반복될수록 배우는 게 많았다.
플란 종족인 나디사와 그리사는 오래 훈련을 받아도 지치거나 피만 좀 흘릴 뿐, 책에서 본 것처럼 심한 부작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훈련이 끝나고 두드러기가 올라오거나 환영을 보고, 심할 경우에는 쓰러져 발작까지 일으켰다.
바로 어제 발작을 경험한 시네라는 노디를 들고 있는 손이 발발 떨렸다.
“그렇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아, 아닙니다!”
“그럼 시작해, 꾸물대지 말고.”
시네라가 노디를 든 손을 높이 올렸다. 그것을 기점으로 나머지 다섯 명의 노디도 하늘을 찔렀다.
눈을 질끈 감고 라드와 연결된 정신에 집중하다가 보면 손에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기 시작한다.
노디와 연결된 라드는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 빨간색의 눈으로 변해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노디에 양보한다.
라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의 양이 많을수록 훌륭한 라드군이라는 뜻이었다.
하얀색의 숨결은 바람의 흉내를 내며 노디의 끝에 감겼다. 회오리치는 기둥처럼 보일 때까지 숨결을 쌓으면 훈련 준비는 다 된 셈이다.
“자, 어제처럼. 왼쪽에서부터 시작한다.”
왼쪽에 선 마벤이 숨결 매인 노디를 들고서 바다로 갔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에 그녀는 당차게 손을 휘둘렀다.
“아!”
그러나 덜 쌓아 올린 숨결을 던져 봤자 미미하게 파도를 쓸고 갈 뿐이었다.
이 훈련은 파도를 반으로 갈라야지만 의미가 있었다.
노디에 감싸진 숨결은 사용자에 따라 검처럼, 폭풍처럼 바꾸어 쓸 수 있었다.
노디로 방패를 만드는 훈련까지 군에서 배울 수 있다고 랭키가 그랬다. 노디를 검으로 만드는 훈련의 기초는 파도 가르기였다.
실패한 마벤은 노디를 내려놓고 해변을 달렸다. 가르지 못하면 한 바퀴 뛰고 오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바다에 별이 뜨는 늦저녁까지 쉬지 않았다. 다음 차례인 나디사는 뒤에 뜬 로마를 바라봤다.
로마는 벌게진 눈으로 넋을 잃고 있었다. 주인을 위해 흘린 숨결을 노디에 꿀처럼 감았다.
“윽!”
그날 그 숲에서 한 것처럼 폭발적인 힘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올라 치는 파도의 물결이 반으로 살짝 갈라졌다가 다시 오므라졌다. 가르기에 성공한 것이다.
노디를 들고서 날렵한 검의 날을 상상한 차였다. 하얀 숨결은 끝이 날카로운 반원 모양으로 변하며 성공을 알렸다.
바라보는 랭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칭찬을 받은 보람이 없게도 나디사의 무릎이 무너졌다. 노디가 놓친 숨결은 로마에게로 돌아갔다.
랭키는 크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제 일처럼 아쉬워했다.
“다만 네 단점은 숨결 양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거야. 센스는 있지만, 양을 조절해서 지속 시간을 늘리도록 해.”
“네.”
숨이 가쁜 그녀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무리하지 마.”
“고마워.”
다음 순번인 아트리스였다. 랭키의 부름에 답하며 노디를 꺼낸 그가 머나먼 해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랭키 씨.”
“왜 그러지?”
훈련을 준비하던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랭키의 시선도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는 이를 향했다.
푸른 망토에 하얀 군복 차림인 라드군이었다. 말끔한 인상의 군인은 가슴팍에 노란 몸통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랭키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다가오는 이를 기다렸다. 윗사람을 만나면 서서 인사를 받기 전까지 차렷 자세를 취해야 했다.
다가온 군인은 눈인사로 발톱 부대와 첫 만남을 가졌다. 삐딱한 태도를 고수한 랭키만이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랭키 씨.”
“누구지.”
“몸통의 수장입니다. 헤번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여기는 무슨 일로.”
“몇 차례 편지를 드렸으나 도통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요.”
랭키의 차가운 표정에도 굴하지 않은 헤번은 직접 남서부까지 가져온 하얗고 깨끗한 편지를 넘겼다.
마땅치 않으나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안 받을 수도 없었다.
편지가 몰고 온 작은 긴장감이 석양녘 해변을 떠돌았다.
“저래서 난 편지가 싫다니까.”
어느 순간 나디사의 뒤로 온 히아신이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를 들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히아신의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등줄기에 얹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는 나디사의 몸이 뒤로 넘어지지 않게 가슴과 복근으로 받치고 있었다. 뒤이어 들려온 속삭임은.
“내가 의자 해 줄게.”
나디사의 눈이 잠시 떨렸다.
“내용은 읽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현 심장의 수장으로 계신 라넌 님의 편지입니다.”
“라넌. 반가운 이름이군.”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편지를 뜯은 랭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건 반갑지 않은 내용이고.”
“그럼 이제 제가 인도해도 될까요?”
아무런 직위가 없는 퇴역 군인에게 이만큼 대우해 주는 것은 그의 옛 명성을 존중해서였다.
랭키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편지를 실수로 놓친 척했다. 라넌이 준 금박의 편지는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가 파도가 날름 먹어 치웠다.
“제 마음대로 여기에 두었다가, 제가 거슬리기 시작하니 다시 가져간다라.”
“곡해 마시죠. 복귀일 뿐입니다.”
헤번은 편지가 날아가자마자 싸늘하게 변한 표정으로 랭키에게 인사했다.
랭키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쳤다. 헤번은 자세 한 번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버텼다.
복귀, 떠나가는 랭키, 한 바퀴를 달리고 돌아오는 마벤.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죽박죽 섞인 때에 랭키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헤번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복귀한다. 짐을 싸도록 해.”
갑작스러운 임무처럼 갑작스러운 복귀였다.
발톱의 노디를 보는 헤번의 시선이 생각에 찼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임무만큼이나 이번 복귀도 쉽지 않을 것을 예감하는 중이었다.